발칙한 QT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눅15:11-24) 본문
(눅15:11-24)
11.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나도 두 아들이 있다.
^^;
12.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둘째.
망나니.
그런데 그 망나니의 엉터리 요구도 '신중하게 검토하시고'
각각
공평하게 두 아들에게 분배해주셨다.
사랑의 모범
난....
내 판단이 아니면 절제 시킨다.
보통...
세상은 너무도 버겁게 변해가고
난 그들의 요구가 어이없게 느껴진다.
그래서 비교적 절제 시킨다.
따라서 아이들을 돌아보면
소비생활이 하나님의 원리 가운데 비교적 정제 되어 있어 보여 괜찮다.
하지만, 아이들은 나름대로 거기오기까지
마음에 어려움은 없지 않았을까
뒤돌아 보면 미안하기도 하다.
솔직히 이러한 나의 생활 기준은
우리 아버지가 나에게 대했던 것 보다는
엄청나게 경계를 확장 시켰지만
그보다 더욱 세상은 빨리 변해가고 있음을 생각해보면
난...... 생각하고 돌이킬 부분이 많다.
그러나, 오늘 이 아버지의 '자식'이 원하는 대로 풀어줌은
아들의 방탕을 초래한 면이 없지 않아
하나님 아버지께서 오늘 보이시는
이 완전한 사랑을
세상에 적용시키기엔
이 비좁은 가슴은 마음을 열지 못한다.
그러나, 세상의 방탕과 다른 것은
계속되는 아버지의 '믿음'을 전제로 할 때는
방탕이 아니다.
그렇다면 '나'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말씀이 이것이시다.
'그냥 믿어라
그리고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해주어라'
참.......힘든 주문이시다.
17.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8.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그 이유는
이 둘째 아들의 고생을 미리 두려워 해서 그랬던 것 같다.
그는 오랜 시간을 돌고 돌았다.
그리고 다시 집으로 왔지만 '원점'이었다.
'엄친아'들은 마구 마구 튀어나가는 데..........
나는 그게 두려웠던 것이다.
그래서 '안돼~' 소리를 어렷을 때 좀 많이 했던 편이다.
내 아버지가 그랬듯........
그런데, 정말 중요한 것이
'빠른 '
'세상의 성공'이 아닌 것이 확실함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보다는 '완전한 사랑'을 내가 베풀고
그들은 하나님의 그 사랑을 영혼 깊숙이 배우고 깨달아
'천국'의 백성으로 살 준비를 해가는 것,
그것 만이 이 세상의 살 의미인 것이다.
이것을 잊고 세상에 휘몰아 살아가는 것이
내 작은 가슴의 두려움과 옴추림과
그에 따라 자식들까지 절제 시키는 것은 아니지 싶다.
18절에 '둘째'의 고백이 눈에 들어온다.
돼지 우리에서 쥐엄열매를 먹고 죽을 만큼 고생한 후에
드디어 '아버지, 하나님'께 죄지었음을 깨달아 고백하는 것이다.
그리고 돌아오는 것이다.
그렇다.
해가 뜨기 직전이 가장 어둡다는 글은 유명하다.
고생이 최고조에 달하면 회복이 곧 있을 것이다.
아들은 심한 고난을 겪은 후에야
주님 앞으로 다시 돌아 온다.
구약의 그 되풀이 되는 인간의 허무한 약점들.
고난이 있어야 되돌아 오는 약점들.
자식을 바라볼 때,
그들의 등 따사로움과 고생하지 않고
일정 부분 성장하여 평안히 살기를 바라는 게
모든 부모의 바램일 수 있다.
거기에 신앙생활도 잘..........
그러나, 그것은 어쩌면 헛된 바람일 수 있다.
솔직히 돌아보면
고생하지 않고 높은 자리에 올라간 '모태 신앙'인들의
무서운 횡포,
타인의 어려움을 공감할 수도 없는
오직 발전과 성장 만이 하나님의 영광인지 알고 사는 ...
하나님 이름을 드러내며 죄인 지도 모르고 죄를 짓는
그래서 세상에 예수님이라면 치를 떨게 만드는 ..
그러면서도 절대로 자신은 옳다고 생각하는
의인의식에 뭉쳐져 있는
'왜곡된 신앙인'들이 얼마나 많이 있던가?
어쩌면,
둘째의 방탕과
오랜 기간의 고난은
그로 인하여 깊이 하나님을 만나고
사람들의 어려움을 긍휼한 마음으로 볼 수 있는
진정한 신앙인을 만나는 연단일 수 도 있다.
그런 면에서
아버지의 인내와 자식들을 믿어줌으로 인한
오랜 기다림은
진정한 사랑이 어떤 것인지
어떻게 내 자식들을 대해야 하는 지
다시 한번 돌아보게 하는 말씀인 듯하다.
20.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이 보라.
거리가 먼데도 기다리고 계시다가
한눈에 알아보고 달려가는 아버지의 '사랑'
이 사랑이 바탕이 되지 않으면
아들은 방탕에서 돌아올 수 없다.
아들이 생각할 때마다
그리운 곳이 '아버지'가 계신 곳임을 잊지 않게 되기 위해
그 아들을 믿어주고
무조건 베푸는 사랑이 필요하다.
24.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공평히 나누어주고
또 잔치를 베풀 수 있는
그 넉넉한 마음.
자신의 가르침에 어긋난 자식들 미워하고
그들의 잘못을 후회하길 바라는 차가운 교육의 눈이 아닌
단지 가슴 아파하는
그 사랑.
오늘 하나님이 아버지의 모습을 통하여
나에게 가르치고 싶어하시는
진정한 아버지의 모습이시다.
나.
참 부족하다.
배울게 많다.
아직도 정죄하고 고치려하고
초조해 하는 마음이 많다.
그냥 인내하고 믿고 기다리면
반드시 아이들은 옳은 방향으로 돌아올 것이고
현실의 비교는 아무 것도 의미가 없음을
다시한번 생각하게 한다.
진정 이땅에서 자식들이 얻어야 할 것은
'사랑하는 마음',
그리고 그 사랑을 통하여 세상을 넉넉히 볼 수 있는 눈 뿐이다.
물론,
하나님 아버지를 잊지 않음이 우선이고..
적용
1. 기다리자.
2. 믿자.
3. 긍휼히 여기자.
4. 비교하지 말자.
있는 그대로 사랑하자.
5. 어려움이 짙어지면 곧 회복도 있을 징조다.
어두움이 가장 짙으면 곧 해가 뜬다.
희망을 가지자.
6. 정말 필요한 것은 '웃음 ' 뿐이다.
웃고 살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주는 게 아버지의 할 바다.
7. 성경 세장 읽자.
기도
주님.
오늘 옳은 생각을 했습니다.
많은 깨달음을 가졌습니다.
돌아보는 기회도 가졌습니다.
이 모든 것들 다 잊지 않게 하소서.
도우소서.
성령님으로 도우소서.
제게 지혜를 주시고
인내를 주소서.
하나하나 상황은 인내하게 하시되
사람은 사랑하게 하시옵소서.
난 죽고
타인은 살아나게 하소서.
내가 이야기의 뒤편에 서게 하소서.
뒤편에서 떠 받쳐주는 자 되게 하소서.
정말 간절히 소원합니다.
믿음 가지고 기다리는 자 되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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