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나사로의 웃음(눅16:14-31) 본문
(눅16:14-31)
저기 어디엔가
나사로의 웃는 얼굴이
보이는 듯합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니
머리가
맑아지는 듯 합니다
한 겨울같은
이 마음이
햇빛 같이
따사로와 집니다
14.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
난 혹시
하나님 나라를 '비웃고 ' 있지는 않는가?
하나님 나라에서 받을 것이라면
혹시
시쿤둥하지는 않은가?
아니지 않다.
그렇다면 거기엔 '천국'에 대한 확신이 부족해서일 수도 있다.
오직 이 땅에 고정된 관심.
믿는 다 하면서도 깊이 믿지 못하는...
그럼으로 나오는 현상은
불만이고 이해하지 못함은 아니던가?
저들처럼 비아냥 거림은
가끔 흔들거리는 약한 신앙은
'천국'에 대한 확신 부족 탓이 아니던가?
25.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
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나사로.
이 땅에 거지로 살면서 얼마나 고통을 겪었겠는가?
그가 이제 천국에서 산다.
거지로 살아서 천국에 가고 부자로 살아서 지옥에 간다는 논리는 물론 아니다.
거지로 예수님 안믿고 마음대로 사는 경우는 다르지 않은가?
나사로는 아마도 고난을 '천국'을 생각하면서
인내하였기에 저 결과가 있지 않았을까?
이 땅에서의 '고난'은 '천국'에서 위로로 보응 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달리 생각하면
지금 받는 고난이 너무 힘들고 어려워
좌절이 너무 커서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가 생각나지 않고
하나님을 믿고 원리대로 살려고 해도
왜이리 끝없이 힘듦은 이어지고
'고난이 유익'임을 알면서도
아는 것 이상 마음 속으로 들어오지 않을 때
그 이유를 다시한번 깨닫게 해주시는 것일 수도 있다.
그 어려움.
나의 받는 이해할 수 없는 막힘.
그 것들에 대한 관심이 모두 '이 땅'에 치우침일 수 있다는 이야기다.
이땅에서 인과 관계와 하나님의 원리를 생각하려 할 때
도저히 답이 없는 경우가 많다.
나.
그렇다.
이해하지 못할 만큼 힘들 때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게 결코 이땅의 유한한 시간 뿐이시던가?
그 영원하신 하나님이
날 구원하신 이유가
그 어려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고난이
과연
이땅에 국한되어
잘먹고 잘살게 하고
이땅에서 잠시 고난 받은 댓가로 풍족한 삶을 누리는 것이던가?
조금 고생하고 예수님을 잘믿고 축복기도를 받고
며칠 씩 몇날 씩 금식하면 다 잘 풀리고
결국은 승리하여
호의호식하고 살다가
하나님 나라에 가서 떵떵거리며 사는게 모두인가?
그렇게 하기에는
너무 하나님을 이땅에 국한 시킴이 맞다.
나사로.
그는 천국에서 위로와 복을 받았다.
그렇지 않는 사람도 있으리라.
반드시 천국에서 보응 받을 것을 국한 시킴도
현실도피의 위험이 있다.
마음을 넓혀
내 모든 현상이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시간,
그것도 이 땅과 하늘 나라까지 넓혀 생각하면
모두 이해가 가지 않는가?
비록 삶은 힘들어도
더 큰 이유로 하여
하나님이 허락하셨다 판단하면 되지 않을까?
30.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그렇다.
그렇다면 초조할 이유가 별로 없다.
아이들이 그래도,
환경이 안풀어져도
앞으로 보아도 그리 큰 달라짐이 없을 것 같아도
결국은 하나님이 다 풀어 주신다.
나사로를 보자.
그게 이 땅에서만 국한시키지 않으면 된다.
결국은 선이다.
참 어렵다.
그러나, 그게 진실이다.
나이 오십 셋.
참 긴 시간인 것 같았지만
벌써 여기까지 왔다.
큰 아들.
내 레지던트로 근무하던 병원에서 출산하고
그 아이의 얼굴이 잘 그려지지 않아
밤새워 conference자료 준비하며
아이를 신생아실에서 안고 나와
한손과 한무릎에 올려놓고
한창 유행이던 '워드프로세서' 를 한손으로 쳐가면서 준비하던게
바로 어제 같은데
벌써 아들이 아들을 볼 나이가 되었다.
이 유한하면서도 바람 같이 짧은 삶.
여기에서 무엇을 더 기대하고 바랄 것인가?
고난.
오래고 끝이 없을 것 같아도
금방 없어지고 말 바람 속의 티끌 같은 것.
인생이란 원래 그런 것이 아니겠던가?
거기에서 어떤 의미를 찾으려 하고
거기에서 울고 웃을 큰 이유가 얼마나 더 있을까?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의 불신자들이나
하나님을 안다면서도 세상에만 고착되어 있는 관심을 가진 자들에게나
지금의 나 같이 흔들리는 약한 신앙을 가진 미련한 자들이나
저 짧고 유한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계속적인 말씀의 권고를 무시하고
이 땅에서 모든 원리를 찾아내려
그리도 안타까워 하지 않을까?
회개가 필요하다.
진정회개가 필요하다.
내 잘못을 회개해야 한다.
그 잘못 중 하나님의 뜻을
겨우 이땅에 고착시켜
혼자 한탄하고
혼자 좌절하고
혼자.........하는
이 엉터리 같은 심사의 오류를 회개해야 한다.
그래서 내 결국 있을 승리를 기뻐해야 한다.
곧 있을 하나님의 위로를 기다려야 한다.
매일 매일 말씀으로 허락하시는 깨달음을 기뻐해야 한다.
'회개'의 삶을 살아야 한다.
그래서 더욱 크고 어서어서 오시는
하나님의 위로를 기다려야 한다.
하나님의 시간을 더욱 당기기 위해서 어서 빨리 더욱 회개해야한다.
그 회개의 삶에 대한 확실한 결심이 유지되어야 한다.
그래서 '삶'은 어떻더라도
난 웃을 수 있어야 한다.
그게 정답이다.
이제 그만 눈을 들자.
이 땅의 조건에 일희 일비 하지 말자.
웃자.
적용
1. 웃자.
난 결국 하나님의 위로와 승리를 경험할 자다.
2. 누구에게든 잘하자.
하나님 나라의 위로를 생각하고
그들의 어떤 불의도 이해함으로 받자.
3. 이해하고 받아 들이자.
나사로는 심한 고생을 했다.
하나님을 믿어도 그랬다.
그리고는 천국에서 보응 받았다.
나의 고난을 단축함은 더욱 빨리 이해하고 받아 들임이 아닐까?
4. 내 인생은 이땅에 제한되어 있지 않다.
주님의 때에 정해져 있다
내 회개의 시기와 정도에 따라 달라진다.
5. 성경 세장 읽자.
기도
내 아버지 하나님.
어떤 때는 참으로 힘이 들어 지칠 때도 있습니다.
어떤 때는 얼마나 더........하고 지칠 때가 있습니다.
어떤 때는 나는 .......하며 좌절할 때도 있습니다.
여기까지 했는데 ....왜.. 할때도 있습니다.
참 .......어리석은 게 접니다.
주님.
하나님의 나에 대한 , 인생에 대한 뜻은
겨우 이땅에 국한 되지 않았음에도
나의 관심은 겨우 이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울컥 ..할 때가 많습니다.
이 어리석음을 회개합니다.
그래서 파생되는 어려움들을 회개합니다.
나의 무지로 인하여 고생하는 내 주위 사람들을 위하여 간구합니다.
도우소서.
회개의 영을 저에게 부어주시고
더 깊은 지혜를 허락하사
제 관심이 이 땅에만 머물지 않고
하나님 나라 갈 때 까지
그 이후에도 이루어질 수 있음을 기억하게 하시고
그렇더라도 기쁨으로 인내할 수 있도록 도우소서.
주님.
저의 혼자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나사로의 영생의 위안과 복을 기억하게 하시사
인내하게 하시고
이 짧지만 영벌처럼 느껴지는 인생의 왜곡들을
지혜로 이겨내고
기쁨으로 연단 받아 버텨 나가게 하소서.
주님.
지금껏 인도하셨듯
불가운데 더 큰 평강의 위안이 있음을 잊지 않게 하시사
어서어서 왜곡을 펴소서.
간절히 부탁하나이다.
이 모든 말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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