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산울타리 천국 꽃(눅14:15-24) 본문
(눅14:15-24)
주님
산 울타리에
주님의 부르심 임하니
이토록 아름답습니다
주님
어지러운
제 이름 부르시니
제 영혼
한폭의 그림이 됩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내 모든 의미이신
내 하나님
내 주시여
15.함께 먹는 사람 중의 하나가 이 말을 듣고 이르되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 하니
당연하다.
천국의 떡.
영생, 거기에다 영생의 축복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을..
그러나, 천국은 눈에 보이지 않아서인가?
18.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밭을 샀으매 아무래도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19.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20.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장가 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
다 '일치하게' 사양한다.
그런데 그 사양이 일리가 있어 보인다.
' 아무래도'
' 청컨데'
' 그러므로'
모두 정말 절박한 일이 맞다.
저들의 말을 들으니 마치 '내 사정' 같다.
누가 잔치 초빙한다고
밭을 사는 중요한 일을 하는데 가며
재산의 전부인 '소' 사는데 그것을 포기하고 가겠으며
장가들어야 하는데 또 그것을 포기하고 얼른 가겠는가?
하나도 중요치 않은 게 없다.
이 '삶'을 유지하기 위한 너무나도 중요한......
그래서 정중하게 들.. 사양한다.
문제는 정중한데 있다.
그들은 초청 받음이 중요한 것은 아는 듯한 '뉘앙스'가 풍긴다는 것이다.
이 땅의 삶에 너무 빠져
'천국'의 초청 잔치를 사양하는 데 문제가 있지만.......
21.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 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
23.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초청 받은 자들은 하나님의 아는 자들이었고
이 들은 모르는 자들 - 주님이 모르시지는 않겠지만 관심 덜한 존재-이었다.
'거리' 와 '골목'에서 떠돌던 자들이다.
'길'에 노숙하던 자들 같은 사람들이다.
'산울타리' 외진 곳에 살던 자들이다.
마치... 현대에서 조금 후진국의 ' 노숙자'나 ' 사회 소외 계층 ' 같이
문명과 관심 밖에서 어렵게 살고 있는 자 같은 느낌이다.
그러나, 그들이 '천국' 잔치에 초청을 받았다.
선민으로 상징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 들 만의 세상에서
현재의 삶 속에만 열심하느라
본질이신 하나님을 잊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탓에
'이방'이 구원을 받은 것을 상징하는 사건이시긴 하지만
이 말씀을 읽으면서
몇 가지 나에게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들이 있다.
첫째는 '나는 정말 절박하고 소중하게 매일 매일을 아주 소중히 산다고 하고 있지만
그 삶이 진정 하나님을 잊은 삶은 아니었는가" 하는 것이다.
현대에 만연하고 있는 종교 다원 주의 뿐 아니라
교회에는 나가지만 하나님 따로 '삶' 따로 사는 '이원론 적' 삶이
진정 '위험'한 불신의 것이 맞다는 것이며,
나의 삶의 태도에서는 '하나님'과 ' 내문제'와 양립시키는 것은 없는지 하는 것이다.
둘째, 천국, 하나님 이란 단어나 의미들이
나에게 얼마나 의미가 있던 가 하는 것이다.
위의 물음에 이어지는 것이지만
어쩌면 난 반신 반의 하고 있을 줄 모른다.
실은 정말 중요한 것은
지금껏 살아보니 52년이란 세월이
진정으로 영원에 비하며 한줌 '순식간', 눈깜박일 시간의 허무한 것임에도
아직도 하나님의 곁, 천국에서
영생의 떡
생명을 누리며 산다는 것의 위대하고 절박한 것을
왜 인정하고 있지 못하냐 하는 것이다.
셋째,
'산울타리' 가 주는 묘한 가슴 떨림이다.
현실은 마치 필리핀 쓰레기 더미 속의 빈민가 같은 의미이고
어쩌면 신학공부는 안했지만 '문둥병 환자' 들이 모여살듯한
산기슭가의 아주 처참한 환경의 동네일지도 모르지만
그 단어가 주는
산과 울타리의 이미지는
마치 시와 음악과 예술.....등을 사모는 하지만
배운 바 없고
현실에서 그냥 적응해서 살기 위해
허덕허덕 거리며 여기까지 살아온
내 스스로의 이미지가 거기에 투영되어 공감되는 것인 듯한 느낌이다.
가진 것 별로 없고
그러면서 고향의 울타리가 주는 허허로운 그리움.
누구도 찾아오지 않았던 그런 '외로움'이 느껴지는........
넷째, 의미다.
김춘수 시인의 '꽃'이란 너무나도 유명한 '詩'가 떠오른다.
그가 다가와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제야 '의미'가 되었다는 이야기.......
하나님께서 의미를 두고 수천년을 다독이고 이끌어오던
그들, 하나님의 사랑에 배부른 '이스라엘 ' 백성들은
자신들이 '선민'임을 인정하고 살면서
교만해지고 더불어 게을러 졌다.
하나님의 관심으로 인한 '의미'인 '선민의식'이
하나님을 귀찮아 하고있다.
하나님 보다 썩어질 소유의 흔들림을 두려워 하고 시선을 고정하고 있다.
내 모습은 아니던가?
그런데, 그런 그들에서
주님은 시선을 '산 울타리'까지 돌리신다.
아무도 찾지 않던 길, 골목을 지나
'산울타리'까지 돌리신다.
그 관심과 더불어 그 곳에 거하는 거민들의 '이름'을 불러 주신다.
그들을 잔치에 초청하신다.
그제서야 그들은 '크리스쳔'이라는 이름을 지니게 된다.
드디어 그 이름 불러주심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천국의 꽃'이 되었다.
나.
요새 흔들린다.
안다.
내 어려움의 이유도,
현실도..........
그러나 알면서도 흔들릴 때는 어지럽다.
물~론, 이전과 비교할 정도는 아니다.
상황은 어쩌면 그렇지 않으면서도 덜 흔들린다.
그럴 때 , 난
내가 산울타리에 거하는 자 같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하여 내가 '천국' 백성임은
누구보다 잘 인지하고 있음에도
가끔 가끔
이 인생이 주는 연단과
내 영혼에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으로 인한 흔들림에 의한
내 모습이 '산 울타리 ' 같다는 이야기다.
그런 나에게
오늘 주님은 다시 한번 확인시키시는 듯하다.
'주하인아.
난 오늘도 네게 다가온다.
말씀으로 다가온다.
성령으로 다가온다.
넌 천국의 떡을 먹을 자격이 있는 자이고
그런 잔치에 오늘 다시 초청한다.
그러니 힘을 내라.
네가 누구인지
네 외로움과 허전함이 사실인지 돌아보라.
네 분주함을 과감히 누르고
하늘 한번 다시보라..........' 시는 듯 하다.
감사하다.
오늘 '여성 유방센터' 에 '회식'을 마련했다.
새로우신 의사들이 오셔 보강되시고
수술이 늘어나며 전담하던 '수술방' 직원들을 초빙하여
잔치..^^* 를 벌인다.
부디 이 잔치를 통하여도
주님의 영광을 조금이라도 드러낼 수 있다면 좋겠다.
기도
주님
놀라우신 내 주님
제 삶.
아시지요?
산울타리 같은 느낌.
거기에 의미를 불어 넣어주시고
매일 매일 그리하시는 내 주님께
전
영광과 존귀와 찬미를 드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진 달란트만으로 찬양을 녹화해서 올리고는 있습니다.
주님.
그리해서 인지 마음은 뜨겁습니다.
주여.
의미를 찾아가는 제 인생을 살다가
지치지 않도록 하소서.
무기력하지 않게 하시고
오늘처럼
영생의 떡을
주님 곁 천국에서
먹을 그 사실을 잊지 않고 살게 하소서.
그것을 누구보다,
아니 다른 어떤 가치보다
더욱 현실감있고 뚜렷하게 자부하게 하소서.
그리 되게
성령으로 도우소서.
절
지옥의 백성에서 구하여 내시고
이리 매일 같이 말씀으로 불러
천국의 시민임을 깨닫게 하시고
의미로 세워주시는
내 주님을 찬양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올 들어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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