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나의 네 이 동생(눅15:25-32) 본문
(눅15:25-35)
그래 세상아
너
그럴 듯 하구나
네 위용과
너의 밤이
끝없을 듯 하구나
하지만
조금만 기다려라
나
곧 떠오르실
내 하나님의 황홀함을
곧
보게 되리라
31.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32.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동생이 왔는데 '화'를 낸다.
형이 그랬다.
거의 죽었다 살아오면 기뻐해야 함이 마땅하나
그는 들어가 보지 도 않고 '종'만 불러 물어 본 후 '화'를 낸다.
야....
정말 대단하다.
이것은 '수천년 전'의 가정사 임에도 그 가정의 감정 흐름의 왜곡이
마치 오늘 날 복잡한 막장 드라마를 보는 듯하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사람이 살아가는 데 어디에도 '갈등'이 없을 수 없다는 것이고
그 갈등의 유형이 정확히도 똑같다는 것이다. ^^;
형이 그러는 이유를 예상해 보면
우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형제간의 우애 부족이다.
좀 이해하기는 힘들지만,..
저리 좋은 아버지 밑에서 커온 형제들이
돌아온 동생을 화를 낼 만큼 우애가 나쁜 것은 생각하기 힘들다.
그렇다면 형이나 인간 본성적으로 가지고 있는
자체의 문제를 생각해볼 수 있다.
'질투'다.
동생이 원하는 대로 다해주고
이제는 그대로 망해서 돌아 왔는데도
또 잔치를 베푸는 것에 대하여
자신 만 왕따 당한다는 '...
이것은 아버지의 '위로'에서도 그냥 나온다.
또한 '욕심'이다.
자신의 것을 빼앗긴다는 위기 의식이다.
그런데 이 생각이 틀린가?
타당하지는 않는가?
전혀 틀리지 않다.
맞다.
그는 화낼 당연한 이유가 있다.
하지만 틀리다.
왜 인가?
아버지의 말씀대로다.
첫째 그는 항상 '아버지'와 함께 있는 자다.
그 귀중한 사실을 그는 잊고 있다.
난.. 안그런가?
구약의 대부분의 사람들 역시 그랬다.
하나님 사랑이 넘치면 그들은 죄를 짓는다.
망각.
원죄의 특징.
...
(잊지 않게 하소서)
둘째, ' 이 내 '동생...이라 하신다.
동생은 혈연 관계로 이어져 있다.
어떤 다른 사실을 넘어서라도
하나님이 깊은 사랑의 관계로 이어준 사이다.
하나님은 그 사실을 잊지 않길 원하신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고 하셨다.
이처럼 사랑하신 세상.
더구나 가까운 형제임에야.....
나.
주님이 그처럼 사랑하시는 내 식구들을 사랑하고
내 믿음의 형제들은 사랑하던가?
하나님께서 만드신 모든 피조물은 더 귀히 여기던가?
...
(용서하소서.)
셋째, 그는 아버지께서 가지신 모든 것을
유산으로 물려 받을 자격이 있는 자임을 잊었다.
왜 이리 잘 있는가?
왜 썩어질 세상의 흔들림에는 민감하면서도
나에게 주어진 이 풍성한 '감격'과 '기쁨'과
곧 주님 곁에 가서 누릴 그 놀라운 영광과
어쩌면 또 예정되어 주어질 이 땅의 부요함도
모두 내 것임을 왜 난 이리도 잘 있는가?
무슨 차이인가?
형의 고민도 이해가 간다.
아버지의 말씀에 아차 했다.
무슨 차이인가?
형은 '땅'의 것,
자신의 현재 생각에 집중해 있었다ㅏ.
그러나 진실은
'하늘'의 것에 있다.
형은 '아버지'와 '형제'와의 관계를 염두에 두지 않은 판단이었지만
실은 아버지
즉, '하나님과의 관계' 내에서 모든 것을 판단해야 옳은 판단이 된다.
그렇다.
그것은 '오류'다.
오늘 날 세상은 ' 자기'를 중심으로 돌아가라고 마구 강요한다.
내가 옳은 것이 옳은 것이라 한다.
거기에는 '절대 진리'가 없다.
그것은 '힌두이즘'의 사상이다.
' 포스트 모더니즘'이다.
신이 수억개란다.
너도 옳고 나도 옳다.
모두 다 옳다.
그렇다 보니 '편하다'
마구 성질을 내도 누구하나 뭐라 하는 사람 없다.
그게 인간적이고 보기 좋으니
예수님 조차
이방 귀신들과 사귀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ㅜ.ㅜ;
(종교대타협......!)
이 엉터리..같은.......
자기 만을 중심으로 세상이 돌아가니 걸리는 것 없고 편안하지만
관계는 마구 파괴 된다.
세상이 지옥 같다.
그래도 그들은 옳다.
스스로는.......
그리고 회개할 수 조차 없다.
회개는 크고 올바른 가치 기준이 있어야 함에도
그들은 없다.
이게 문제다.
나.
나에겐 이런 인지의 왜곡은 없는가?
어느새 '너 혼자 독야 청청 하느냐?'는 비아냥이 두려워
세상의 기준에 슬그머니 휩쓸려 들어가지는 않는가?
아니면, 정말 오래 전 부터
나 혼자만의 기준,
타인을 배려 하지 않는
하나님의 뜻을 생각지 않는
그 오래된 역기능의 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형'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지는 않던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래서 하나님이 말씀을 주시는 것 아니겠던가?
' 저들은 다, '이 내 형' 같은 자들이다 .
사랑하라.
아버지의 사랑으로 사랑하라.
손해 받는 것 같던가?
내 것이 다 네것인데 무엇이 손해인가?
너그러워라.
긍휼히 여겨라...... 신다.
그렇다.
다시 한번
하나님께서 구원해주신 존재가
나 임을 명심해야 한다.
또 다시한번 내 형제, 내 가족들도
다 주님이 사랑하시는 자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주신 이도 주시요,
받으실 이도 주이심을 잊지 말아야 한다.
난, 이 땅의 소유를 위해 온 자가 아니고
'청지기'로 잠깐 왔다가 가는 자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난, 주하인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기도
주님.
귀하신 내 주님.
너무도 당연한 사실을
매일 매시간 매초........잊어 버리고 삽니다.
열심히 살다가 보면
어느새 난 형의 억울함에 사로잡힙니다.
그것,
옳은 것이 아님에도
수천년 전의 이 형의 예처럼,
내 속을 사로잡아 올 때가 있습니다.
주여.
속지 않도록 하소서.
형의 억울함을 가장한
사단의 궤계에 속지 않도록 하소서.
나의 기준으로 판단치 않게 하시고
하나님의 나라의 원리로 세상을 바라보게 하소서.
모든 것이 내것이고
모든 것을 주님이 다 주셨음에도
썩을 것에만 관심 가지고 상대적 박탈감으로 마음을 웅크리지 않게 하시옵소서.
억울함 풀게 넓은 마음 허락하소서.
'네 이 동생'이라시는 하나님의 깨우치심이
제 영혼을 크게 울리게 하소서.
주님.
관계 속에서 사랑으로 익어가게 하소서.
오늘 더욱 더 그리하게 하소서.
억울하고 속상한 것.........
다 묻어 버리게 하소서.
이렇듯, 위로하시고 깨우치시는
주님의 원리 가운데
그럴 수도 있다고 예를 드시는
수천년 전 가정사에 흐르는 동일한 왜곡을 통하여
위로를 받게 하소서.
예수님을 닮아가는 자 되게 하소서.
아주 죄송스럽게도
너무 적은 변화지만
또 일보 나가게 하소서.
올바르게 그리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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