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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묘실은 절망이 아니다[왕상14:1-20]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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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묘실은 절망이 아니다[왕상14:1-20]

주하인 2017. 6. 8. 09:31



1. 그 때에 여로보암의 아들 아비야가 병든지라

' 그때에' 란다.

무언가 중요한 .. 그러나 일상중에 잊어먹고 스쳐지나갈 수 있는 데서

깨어 있는 자들만 발견할 '의미의 순간'

'그 때에'


그런데.. 그 때에..라 하신 그 내용이

여로보암의 아들이 '겨우'.. 겨우다.. 병든지라...다.

아들 병든 게 그리 대단할까?


병든 것.

그게 의미가 있다면 어떤 의미가 이들, 아니 나.. 우리에게 있을까?



2.여로보암이 자기 아내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일어나 변장하여 사람들이 그대가 여로보암의 아내임을 알지

   못하게 하고 실로로 가라 거기 선지자 아히야가 있나니 그는 이전에 내가 이 백성의 왕이 될 것을 내게

   말한 사람이니라
 일단, 여로보암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도우심에 의하여 왕이 된 자.

그러기에 그가 아무리 악하게 행하는 왕이라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

그는 '하나님'을 아는 자이고

하나님 만이 고치실 수 있음을 아는 자다.

그래도 그는 염치가 있던지 아내를 변장을 시켜서 '선지자'에게 보낸다.


 병을 통하여 그래도 '믿음'을 회복할 찬스는 주어지는 것이다.

그렇다 .

고난의 의미의 첫번째다.


그런데 또다른 의문이 남는다.

하나님은 굳이 '병'이나 '아픔'을 통하여서만 우리에게 기회를 주시는가..다ㅏ.

다른 방법은 없으신가..다.

 이 부분...

그 우주적인 의미, 하나님의 원리를 우리가 어찌 알겠는가마는

'아픔'을 통하여 '회복', 특히 영적인 회복을 허락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뜻인게 사실이다.

아프면 .. 우선 주님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는 아픔 후의 회복의 달콤함도 맛보아야 한다.



12.너는 일어나 네 집으로 가라 네 발이 성읍에 들어갈 때에 그 아이가 죽을지라

 또한, 병을 주님이 주시는가?

병이 있으면 그 시간에 주를 찾을 때까지 주께서 기다려 주시는 것인가?

'선지자'에게 나타나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이러이러하게 찾아올 것이니 이리 대답하라" 

여기는 모델링의 케이스이기에 그러실 것이긴 하지만

그외에도 병은 자신의 잘못으로 인한 징책이나

허락되어진 이땅의 수명을 마무리 하게 되는 도구.. 뭐 다양하게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레마..로 주어지는 이 아들의 병은

하나님이 주셨든, 아니면 병이 걸릴 때까지 허락하시다가 때가되어 그 죽음을 매개로

새로운 역사를 하시기 위한 도구의 시간이던가.. 어쨋든

'병'을 통한 선한 역사'가 그 목적이신 게 맞다.



13.온 이스라엘이 그를 위하여 슬퍼하며 장사하려니와 여로보암에게 속한 자는 오직 이 아이만

   묘실에 들어가리니 이는 여로보암의 집 가운데에서 그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향하여

   선한 뜻을  품었음이니라  

 그렇다면

아들의 죽음,

아버지의 죄와 상관없이 죽을 아들의 죽음을

과연 선하다고 받을 수 잇는가?


그렇다.

여기에서 아프거나 심한 병을 든 사람들, 심한 절망의 나락에 있을

믿는 자들의 갈등이 시작될 것이다.


아닐까?

장로님이신 남편이 췌장암으로 돌아가시기 바로 당일

당신의 양말을 빨아 놓고 돌아가신 후 교회에 나가지 않기 시작하신 권사님 부인께서

따님이 '난소혹' 파열로 본 주하인에게 수술을 받고나서

그 절망의 눈물을 흘리다가

다시 회복하시면서 고백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때는 '내 진료실'에 걸어 놓은 이 블로그의 '시화'들을 읽어가며 다시 교회에 나가야겠다고 하시며

영적으로 회복된 후의 고백이셨지만.. ...

그 절망의 순간이 내 일이라면..

어찌 '실족'의 위험에 빠지지 않을까 장담할 수 있을까?


그런데...오늘 '묘실에 들어갈 자 이 아이  뿐'이라시는 말씀에서

우리의 절망을 딛고 더 크게 영적 지평을 넓혀야할 단초를 본다.

 물론, 아무리 애써도 우리는 이 땅에 눈이 붙어 있는 '지구인'일 뿐이다.

유한한 이 땅의 생명에 목숨을 걸다보니

아무리 영원을 말씀하시고 영생을 이아기하셔도

죽음 앞에는 속절없이 영혼 육신 마음이 무너질 수 밖에 없다.


그런데...

묘실.. 그 묘실은 하나님의 영광에 든자들이 들어갈 자격이 있는 곳 아닐까?
그렇다면 의미하시는 바..

하나님은 '이 땅'에 죽음을 통하여 영생을 다시시작하게 하실 것인데

무에가 걱정일 것이냐 시는 것이고

우리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영혼으로 가슴 깊이 오지 않아서 일 것이다.


 손을 닦다가 세면대 바로 앞에 걸린 달력에

'구스타프 클림트(금빛 일색으로 그림을 그려나간 유명한 화가..ㅎ)' 의 그림을 보며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영감' 靈感'에 대하여 느껴지면서 감동이 온다.

그들.. 미술가들은 아마도 우리가 육신으로 보지 못하는 영적 세상의 감동을

조금더 쉬이 느끼면서 세상에 그림으로 묘사해내는 능력을 가진 자들이고

그렇다함은 우리, 이 물질계에 속한 자들은 아무리 무시하려 해도

예술이란 방법으로 그 미리 알던 세상, 진정으로 존재하는 '영적'세상을

다양하게 표시해내는 것이란 것을 깨닫게 되었다.


 '묘실에 들다.'

'오직 하나님을 향하여 선한 뜻을 품'은 아들.

그가 죽음은 이 악한 세대의 마지막 '축복'임을 오히려 말씀하시지 않는가?

다시 한번 그렇다면...

병, 절망, 고통, 죽음, ..........이것을 끝으로 생각하게 하는 것이야 말로

'사단'의 가장 쉬운 계교이고

하나님은 당연히도 이 땅에 우리 인간을 세운 당신의 잠깐의 뜻을 이루게 한 후

죽음을 통하여 '선택받은 자', '그중에서도 선택받은 소수'들을

영생의 자리에 앉히시는 게 뜻이시며

'병', '죽음' , 고통'은 우리 인간에게는

새로운 변화를 위한 도약의 기회일 수 있으며

그 기회는 오직' 주님의 뜻'을 잊지 않는 자들에게만 주어진다는 사실이다.


잊지 말아야 한다.

이것을 오늘...

이 미련한 '여로보암'과 '그의 아내'의 절망의 두려움............

그 바보같은 이땅에 고착된 시선을 통하여

더욱 선명히 깨달아야 한다.


그렇다.

난..

내게 주어진 어떤 것도

하나님의 말씀에 맞추는 훈련을 하고 있다.

내 매일의 순간들이 결코 바람직하고 곧고 옳다고 장담을 하지는 못하겠지만

주님 앞에 몸부림치는 동안은

난..결코 버려지지 않았다.

난... 늘 소망 가운데 있을 자격이 있다.

하나님의 묘실에 들어가는 그 때까지... 절대로 말씀을 놓치지 않으리라.

주님의 은혜로 날 채워가게 허락하시리라.

귀한 그 분께서...



주님.

감사하나이다.

오래 쓴 손과 팔에 자꾸만 버걱거리는 증상들이 나와서 힘이 들어갑니다.

아픕니다.

주여.

제 열심히 쓰고 잇는 이 주님 말씀의 대언을 기쁘게 받으시리라 믿습니다.

내 주여.

죽도록 충성할 수 있도록

제 손과 팔도 보호하소서.

그러나, 그동안

이 아픔과 다른 절망 마져도

주님 안에서 소망으로 바뀌게 하소서.

내 주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받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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