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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쉼 [시23:1-6]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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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쉼 [시23:1-6]

주하인 2013. 12. 26. 10:02

저쯤 어디엔가

쉴만한 곳이 있을까

 

 

 

언제쯤 되어야

내 영혼

영생의 푸른 쉼을 갖게되고

 

 

 

 

 

또 언제가 되어야

목자 인도받는

어린 양의

기쁨을 외치게 될까나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나는 홀로가 아니다.

내게는 주인이 계시다.

하나님이 그 분이시다.

 

 이제

내게는

더 이상

부족함이 없다 !

 

그게 사실이다.

그게 사실이 맞을 것이다.

그게 맞다.

 

그래서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리 표현하심이

더 뚜렷하게 느껴진다.

 

더 이상 바라짐이 없다.

모두 가져서가 아니고

아무리 해도 안되어서 포기하려 하고 있다.

포기하면 필요해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게 진정 부족함이 없는 것인가?

 

그러나,

그 분이 오늘 그러신다.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주께서 목자가 되시니...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푸른 풀밭

푸른 색.

양으로서 먹고 쉴 수 있는 풀밭.

거기에

그가

나를

누이신다.

눕게 하여 주신다.

마치 잠들고 싶은 어린 아이적

내 의지와 상관없이

머리가 뒤로 자꾸 넘어가는 심한 졸음에

큰 팔로 날 안아 누여주시던

그 어릴 적 부모 같이

목자이신 하나님이

날 푸른 풀밭에 누이신단다.

 싱그러운 풀 냄새

쉴 만한 물가.

먹고 자고 눕고 쉬고.. 걱정이 하나도 안되는

온전한 쉼이다.

 

이 온전하지 않은 시절,

이 불편 부당한 시간에

주님이 이러신다.

너무도 유명한 구절을 통해

오늘

다 털어버리고 burn out 될 거 같은

이 때에

주님이 '온전한' 쉼을 약속하신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신다.

보라.

Burn out,

탈진,

더 이상 짜낼 힘도 없을 것 같은 것을 알고 그러신다.

이 아침에

나를 일으키시겠다신다.

 

자기 이름을 위하여 그러신단다.

의의 길로 인도하신단다.

 

나.

아무 힘없지만

주님 그러신다면

그리 되겠지..

주의 뜻대로..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보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이야기가

갑자기

뜬금없이

푸른 풀밭의 쉼 가운데서 튀어나온다 .

 

그러니

지금껏 하나님이 목자되시고

풀밭에 누이시고

쉬게 하시고

마시게 하시고...................는

그런 축복의 시간이 내게 있음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다.

 

나.

신학 제대로 안해서 잘 모른다.

다윗이 정말 저렇게 완전히 쉬는 상태로 있어서

저런 고백을 하는지..

그러나...

그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아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상황에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이 된다.

 

그런데

그가 해(害)를 두려워 하지 않고

푸른 쉼을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은

'주께서 함께 '하시고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안위'하심을

그가 믿을 수 있어서다.

 

 

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주님이

원수의 눈 앞에서

그에게 상을 차려 주심을

철저히 경험한 탓이고

그...........

고통의 상황에서도

상 차림 받고

머리에 기름 부음을 받음을

그는 믿을 수 있는 자였다.

 

그 복잡한 상황

그 상황에서

흔들리지 않고

푸른 풀밭에 누여지고

쉴만한 물가에서 쉬는 것을 체험하여

부어 넘치는 잔의 축복을 고백할 수 있는 것이

진정한 '복'이다.

그게 그 다윗의 훌륭함이다.

 

그게 '믿음'의 본질을 나타내는 자이다.

 

그렇게 되면

일희 일비 하지 않는다.

아니다.

안흔들린다는 것을 넘어서

오히려 누리는 평강의 기쁨을 삶속에서 나타내는

옳게 믿는 자의 '전형'이다.

 

나...

그게 필요하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이리 고백하며 그리 살고 싶다.

 

상황이 아무리 변해도

좋아도 너무 좋아 하지 않게 되고

싫어도 너무 싫어하지 않게 되는

평강의 고백 말이다.

 

'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를 것이다'

이리 고백하게 될 것이다 .

 

또한

'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집에

영원히

살게될 것이다.'

 

하나님의 집에 살면서

어찌 불안하고

어찌 흔들리겟는가?

세상의 어지러움

이 땅의 인과관계

이 삶에서 얽히고 섥힘이

어찌 그러한 그에게 문제가 될 수나 있을까?

 

영생.

영원히 삶.

영원히 푸른 풀밭의 쉼.

그게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사는 자의 고백이다.

 

이땅에 사는 자로서 그런 고백

더구나 사울, 전쟁, 친구, 죽음.... 영화... 온갖 세상의 풍상에 시달리는 자로

저런 고백을 할 수 있는

그의 영혼의 '평강'을

난 닮고 싶다.

그게 그립다.

그런 영생의 평강을 주시는

하나님을

더욱 더 사모한다 .

 

 

 

 

주님.

과정을 압니다.

인생의 그 풍파를 치던 것이 고요해지며

덜 흔들리는 마음을 허락하시는 주께서

내 내적인 부대낌을 정리하시고자

허락하시는 과정임도 압니다.

 

그러나,

burn out

탈진이라는 표현처럼

다 알면서도

더 이상 내가 낼 힘이 없음 같은

온전한 피로에 있을 때

주님은 나를 아시고

제게 이러십니다.

 

내게 너를 푸른 풀밭에 누이고

쉴만한 물가로 인도할 것이다.

두려워 하지 않아도 된다.

네 상황을 안다 .

네가 네 속에 네 원수의 소리들에 의하여 흔들림도 안다.

원수 속에 있는 거 같은 절박함을 안다.

그러나, 내가 네게 먹이리라.

너를 입히리라.

널 눕혀 쉬게하고 마시게 하리라.

막대기와 지팡이로 널 보호하고 안위할 것이다 .

다윗을 닮아라.

그의 평강을 배우게 될 것이다... 하시는 것 같습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말씀 한마디로

그의 온전한 믿음이 제것이 되면

정말 좋겠습니다...

그리함을 믿을 수 있다면 또 얼마나 좋겠습니까?

 

저.

노력을 하지 않아도

주님의 말씀으로

제안에 들어오는

그러함을 제가 체험하길 원합니다.

 

주여.

아시오매

제 지침을 이해하실 줄 믿습니다.

그래서 내가 가만히 있으면

온통 세상이 안돌아 갈 것같고

온통 주님의 말씀이

내 안에서 깨달음으로 그치고

더 이상 진행되지 않을 것 같던

초조함을 벗어 버리려 합니다.

 

어느게 옳은 지 잘 모르겠습니다.

가만히 있는 것이 방임이고 직무 태만인지

책임회피이고 도피인지

아니면

주님의 역사하심에

손들고 맡기는 과정 중의 하나인지.......

그것도 잘  모르겠습니다.

 

제 머리가 지금 쉼이 필요한 것은

말씀따르며 제 나름 열심히 했으나

한계에 부딛힌 것 같은 생각 탓입니다.

주님 아시오매

제 특수한 상황을 이해하시고

오늘

너무 유명한 구절로 제게 보이십니다.

주님.

습관적으로 들여다본 말씀에서

늘 레마로 주시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통하여

제 가슴에

다시금 소망으로 채우십니다.

 

내 살아계신 하나님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주여.

오늘 시편 기자에게 보이신

그런 쉼과

그런 위안과

그런 담대함과

그런 결심과

그런 평강을

제게 허락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PS)

 

예상 '된' 것 처럼

다윗은 '사망의 골짜기'를 지나고 있을 때

시편 23편을 썼단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서핑 통해 알아본 바에 의하면

아들 '압살롬'에게 쫓겨 광야에 도망 중일 때 쓴 시일거라

추정하고 있다.

 

보라.

그는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를 외칠

상황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는 6절에 '반드시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함께 하시고

'평생을 여호와의 집'에서 거할 것을 선언하고 있다.

 

그가 고백한 사망의 골짜기는

수많은 학자들이 '설왕설래'를 넘어서

' 아들'

그것도 '가장 사랑했던 아들'에게 쫓김 받는 것보다

더한 '사망의 골짜기'가 어디있다는 말인가?

 

인간 '다윗'의 머리는

수많은 적개심과 자괴감과 두려움과 원망과

그것보다 크게

그의 영혼을 밀고 들어오려는

하나님에 대한 '의구심'을 싸워야 하는 게

'사망의 골짜기의 원수'들은 아니었을까?

 

그것을 모르는 자들은

신학자들이라도

자식을 길러보지 않았거나

배반을 당해 보지 않고

평생을 공부만 하던

온실 속의 사람들이었을 게다 ^^;;;;;;;;;

 

그 상황에서

그는

목자에게 이끌림 받는 자신을 인정했고

그러기에

푸른 풀밭을 그 광야에서 누리게 되었을 것이고

쉴만한 물가에서 누임 받는

온전한

실제적

영혼의 쉼을 경험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게

푸른 쉼

오늘 주제로 내세운 나의 그것과

무엇이 다르던가?

 

할렐루야 다.

하나님은

그 분을 온전히 만나려하는 자들에게만

비밀을 열어

당신의 축복의 본질을

조~~금이나마 보여주신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이 어지러운

사망의 골짜기의 원수로 부터

내 머리를 안위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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