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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적 그 진실에 대하여[마12:38-50]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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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적 그 진실에 대하여[마12:38-50]

주하인 2014. 2. 20. 12:22

표적이 저렇듯

눈에 띄고 확실하며

가슴을 뚫어주는 것이면

얼마나 좋을까

 

하나님의 원하시는

진정함도 그것이다

 

푸른 소망

 

하지만

그것을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하나님의 그것은

영원하고 확실함임을

믿음이다

 

믿지 못하는 자에게

그것은

무덤이고 십자가 고난 일 뿐이며

썩어 문드러질 일회적인

표적일 뿐이다

 

 

 

38 그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 주시기를 원하나이다 
 표적.

눈에 띄는 타켓.

그것을 목표로 나갈 수 있는 지표.

 

 왜 그것을 원하는가?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흔들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만 보고 나가면 되는 기준이 되어서 쉽고 단순해진다.

 

그러기에 표적은 '환해야 하고 뚜렷하고 단순해야' 한다.

사격장의 표적을 보면 그렇지 않은가?

그리고 '보장'이 되어 있어야 한다.

편안함, 따스함, 배부름, 기분 좋음.. ..

 

그러나 어떤 위험이 있는가?

단순화 하기에 다른 것을 보지 못한다.

'믿음'이 단순화 되면 힘은 있으되 타인을 다치게 하기 쉽다.

초보 운전자들.

앞만보고 나가다가 '사고'들 많이 낸다.

갑작스레이 뛰어 들어오는 문제들에 대처하기 힘들다.

 사람들.

삶.  인생, 산다는 것, 관계, 행복.........

인간이 그리 단순한가?

심리의 복잡함은 똑같은 조건에도 너무나 다른 반응이 나온다.

나 만해도 동일한 조건에서도 하루에 몇번씩 다른 감정이 나옴을 느끼지 않던가?

 '율법'은 그런거다.

 조건을 배제한 지나치게 단순화한 믿음.

믿음이 뛰어남은 존경할 만하지만

사랑이 배제되고 인간에 대한 이해가 없는 믿음은

칼을 든 '반사회적 범죄'자를 큰 차이가 없을 가능성도 크다.

 

 하나님은 그것을 경계하시는 것이다.

 

 

3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보라.

하나님의 표적은 '어둠의 표적'이기도 하다.

인간의 눈으로 보면 말이다.

이해하지 못하는 아이들은 어른들의 쓴물 마시는 '음주'를 이해하지 못하고

우유 먹지 않는 식사를 이해하지 못하며

단것을 모든 식사로 대치하지 않는 어른 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

표적 만을 구하는 세대에게

진정한 표적이 될 '요나'의 물고기 뱃속 이나

무덤속의 예수님의 상황을 이해시키거나 표적으로 삼게 하기 불가능하다.

 

오직 은혜를 깊이 아는 자들만이 가능한 일이다.

단지.. 가능한..

 

그것이 표적이 되기 위해서는 '깊은 영적 체험'과 더불어

'선택'의 힘을 통한

하나님과의 깊은 교감을 전제로 한다.

그제야 표적으로서의 '예수님' 십자가 고난이 이해가 가며

매일 영적 성결함을 선택하고 준행하며

매일 매시 하나님의 성령으로 인도받지 않고는

표적을 잃기 쉽상이다.

아무리 노려봐도 표적은 어두워지거나 안개끼면 흐릿해질 수 밖에 없지 않은가?

예수님 믿는 과정은

절대로 평이한 '표적'만을 쫓는 과정이 아니다.

시간이 길어질 수록

표적의 필요성에 절감하다가

표적을 추구하지 않아도 자유로운,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필요성에 대하여

절감하지 않을 수 없어진다. ^^;

 

 

40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
 그렇다면 ,

난 '요나'의 뱃속,

예수 그리스도의 무덤을 '표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가 자문해본다 .

 

 없다.  

아니다.

있는 것도 같다.

 

무슨 말인가?

이제는 '표적'을 찾아 손을 달달 떨고 나무 그루 한개를 뽑으며

목청이 찢어지듯 소리높여 기도하다가

마침내 '권사님 목청' ^^;; - 죄송'- 이 될 만큼 안해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을 조금은 깨달을 것도 같고

원하시는 대로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이야기다.

 물질이 쏟아 부어지고

일상이 내 원하고 바라는 대로가 아니고

내 주변 가까운 자들의 잘나가는 것을 비록 나는 받지 못하였어도

하나님이 날 계속 '축복'하고 계심을 믿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가끔 흔들리기는 해도...

 

 거기에  혼란이 오고 곤란이 와도 - 아직도 그렇다 .. 자주.. 그렇다 . ^^;; - 그게

어쩌면 곧 있을 '부활'의 전조 현상임을 믿어지려 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난.. .그것을 깨달아

내 마음 속에 자꾸 갈무리 해가짐이 감사해진다.

 

이제.. 다시 나를 돌아본다.

아직도 나를 흔드는 삶에 대한 곤란과 피곤들..

(피곤이라 표현한다.  다행이도.. 격이 낮아졌다. .. )

그 '무덤'의 냄새나는 현상들이

이제 별로 나에게 큰 흔듦이 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느끼는 것...

어쩌면 그게 나에게는 더 희망이고 소망이 되어간다는 것이다.

 

세상이 안변하니

내가 변함을 받아 들이는 것,

그 변함이 몸부림쳐도 안되던 것이 이제는 조금더 쉽게

특별히 '기도'하려 눈을 감고 주님을 집중하면

깨달아지고 영혼 깊숙한 곳에 '자연스럼'으로 내려 앉으려는 현상.

비록 주변의 그것들은 아직도 '어두컴컴'하고 비전 조차 보이지 않는

마치 '예수님 무덤 속' 같은 어두움이 지속될지라도

별 흔들림이 없어지는 것.

비록 주님이 내게 원하시는 세상적인 것을 조금씩 보여주고

길이다 싶은 방향이 보여지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아직도 그것은 내가 더 나가야 할 것이라 생각되어지며

그것 마져 '자연스러움'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내게는 스스로 '소망'이 되어 간다는 것이다.

 

 

 

 

 

5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

그렇다.

표적이

외부적일 이유는 없다.

내부적이어도 된다.

 아.

도를 추구하는 '도인'들이나 '중'들도

홀로 힘으로 자신을 내려 놓을 수 있다.

 

 그러나, 그들과 전혀 다른 게 있다.

그들은 그들의 '자아'가 약해지는 착각을 하며 엄청난 '의지'로 인하여 허탈해지는 착각이지만

우리 믿는 자,

철저한 타력 종교이며 진리인 '기독교' ,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그 마져 모두 하나님이 하신 것임을 깨닫기에

더 가벼운 것이다.

아니다.

진정 가벼운 것이고

진정 '자아의 죽음',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어

무덤에 내려 앉게 되고 , 결국 다시 '부활'의 숙명을 가지는

온전한 '자아의 부인'이다.

난.. 다만 그것을 선택하고 받아들일 뿐.

 

그렇다.

이제 표적이다.

그것이 나에게 느껴지고

글로서 정리가 되어감이 '표적'의 조그만 현상이다.

이제 진정한 표적은 그렇다.

그러함을 '매시 매초에 ' 진정으로 ' 기뻐함'이다.

내 지금의 고백은

묵상구절,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주시는 은혜에 따라 '인사이트'를 가지고 하나하나 붙들어 들어가야

눈앞에 보이는 '깨달음'이지만

이제 생각하려는 노력이 없어도

너무나 자연스럽게 '자아'가 죽어감을 느끼고

그것이 '가벼움'으로 변하여

한줌 바람에도 날아갈 듯한 '깃털 같은 가벼움'으로 변하여

어디에도 구애 받지 않는 삶이 되는 것이다.

 

 자아로 자아를 죽이려는 홀로의 노력이나

진정한 표적을 의지하여 매일 주님의 손잡고 나가지 않는 믿음은

결국 '더 큰 사단'의 획책을 가져올 뿐이다.

 

그거.

누군가 고백했듯...

결국 '인생은 고해' , 고난의 바다일 뿐이고

수미산보다 높은 '죄의 산'을 쌓고 간다고

죽을 때 '더 ' 큰 땅을 치고 눈 감지 못할 회한 만 남기고 가게 될 뿐이다.

 

하나님께 오늘 진정한 표적을 구한다.

흔들리지 않는 말씀 사랑.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내 일생의 삶의 행태 유지

그것을 통하여 매일 나를 내려 놓는 현상.

그리하여 결국 '예수님 처럼' 내 '자아'를 십자가에 못박게 되어

무덤같은 인생의 어려움이 있어도

오히려 기쁨으로 자유롭고 가볍게 살수 있게 되어

단 일초라도 하나님을 기억하지 못함이 없고

늘 내 속을 거대한 '성령의 폭포수'로 내주합일 되는

그런 진정한 ' 부활'의 삶을 살다가

주님 날 부르시면 진정한 감사와

가슴두근 거리는 천국에의 기대를 가지고

하나님 나라에 가게 되는

그런 내가 되엇으면 한다.

 

 

주님.

내 하나님 아버지.

오늘은 표적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고백합니다.

아직도 솔직히 '달콤'하고 무게가 가벼운 '표적'을 내 심사는 원합니다.

어려운 인생의 되풀이 됨은 내 다리에 힘이 없어 주저앉게도 합니다.

주여.

그게 하나님의 원하시는 내 십자가,

주님 예수님의 무덤을 동참하는 표적의 현상임을

머리로는 이해하면서도 자꾸만 부인하고 돌아서서 몸부림치고

친한 친구, 지인들... 그들과의 부담없는 지꺼림을 사모하고 있음이 사실입니다.

주여.

그것도 감사하지만

이제 '제 안' 막달라 굴 속의 다섯 왕인

오래된 '사단의 송사'들을 기억합니다.

그들의 소리로 인하여 참 오랫동안 힘들었지만

이제 '십자가 '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그것이 오히려 '표적'의 도구로 사용되었음을 깨닫습니다.

주님.

제게 온전한 '부활'의 증표가 될 때

그들은 더 이상 제 인생에서의 효용가치를 잃고

제 안에서 떠나게 되어

저는 오직 '성령의 내주 합일'로 폭포수 같은 은혜의 매일 매시를

경험하고 늘 찬양하고 감사하며 사는 것이 기대가됩니다.

주여.

간절히 소원할 것은

말씀을 붙들고 묵상을 하고 정리를 할 때 뿐이 아니고

현실이라는 이름의 내 앞에 놓여진 매사 매일을 통하여

세상을 접할 때도

주여

제 깨달음이 잊혀지지 않게 하소서.

그것을 표적으로

진정한 표적으로 붙들기를 원합니다.

은혜없는 표적 구하기를 사절합니다.

주여.

제가 더 드러나는 표적 구하기를 피하게 하소서.

오직 은혜로,

주위를 향한 사랑의 향기를 더 크게 베풀어지는 자가 되게 하소서.

 

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도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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