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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에 이미[마12:1- 13] 본문

신약 QT

그때에 이미[마12:1- 13]

주하인 2014. 2. 17. 10:13

 

아직도 남은 고난은

장애인 줄 알았는데

난 이미

차원 다른 곳에 있음을 알았다

 

하나님은 나를

그때에 이미

천국의 푸른 안식을

허락하고 계셨었다

 

그분은

매일

말씀으로 은혜로 찾아오셔서

내 지평을 넓혀 주신다

 

 
1.  그 때에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실새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으니

 '그 때에'

그때가 언젠가?

아마 뒤 부분을 강조하기 위한 수사 이겠지만

'그 때에'란 부분이 크게 들어오는 것은

내가 눈 뜨고 하나님을 마주하는 이 시점.. 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던가?

무슨 시간이 나에게 의미가 있을까?

되돌릴 수 없는 '과거의 되풀이"?

오지않은 미래의 불안한 예측?

아니다.

'그때에'라는 말씀이 나에게 의미가 있음은

매일 주님을 마주하는 '이 시간', 나를 잠시 흔들리게 하는 문제를 가지고 있는

바로 '이 시간' 이 아닐까?

무슨 문제일까?

특별하지 않지만, 특별한..

 

그렇다면 '그 때에'는 내 깊은 문제를 통한 현재 지금을 결정하는

어떤 상황이었을 지는 말씀으로 다시 돌아가 추정해봄이 옳지 않을까?

 

'안식일'이다.

쉴 때다.

상황과 상관없이 '고요한 평화'의 시간들이다.

( 수년전에 그 고요한 안식의 나른함을 묵상시키신 적이 있었고

  그 분위기를 위해 아래에 복사해 놓았다 )

그러나, 안식일을 대하는 나의 기대, 아니 일반적인 기대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서 그분이 주는 안식에 대한 막연한 기대는

'물질적 풍요'와 더불은 평온한 행복을 막연히 기대하지는 않을까?

그때에.. 말이다.

 

그러나, 사실은 '배고프다' .

제자들이 배고파서 밀 이삭을 베물어 먹었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그들을 일부러 이신지 '메밀 밭'으로 가로질러 가심으로

그들의 시장기를 제어하지 못하도록 유도 ?, 인도? 하신 것이다.

놀랍다.

분명코 다음 구절에 나오듯 바리새인들의 '질타' 가 있지 않은가?

 

이게...... '안식'인가?

이게 ....  눈앞에 보이는 '메시야' 예수님을 따르는 자의 현실인가?
이게...... 얼마나 더 유지 되어야 하는 '장밋빛 ' 미래를 위한 과정이던가?

 

 그 시간 , 그 자리에 있는 제자들이야

배고파서 그 시대 몸에 배였을 율법의 가르침을 어기는 행동에 대한

약간의 주저함도 없이 밀 이삭을 베물어 먹었을 테지만

배부른 '제자를 지향하는 ' 주하인은

과연 그게 안식일, 그 본질의 의미를 지향은 하지만

그래도 아직도 저들처럼 '허덕이고 ' 있음을

이 아침에 눈치 채이고는 있지 않은가 말이다.

 

그래서 '그 때에'라는 말이 눈에 들어왔던 모양이다.

하나님이 말씀 하시고자 하는 것.

그것을 깨닫게 되는 지점이다.

 

조수미의 아베 마리아는 전혀 예수님 만을 바라보는 '진리의 입장'인

우리에게는 의미는 없지만 (성모.. 마리아...$#$% )

그 분위기 만은 '안식'의 마음을 잘 표현하고 있는 것 같아

수년전 묵상을 진행할 때 즉시 내 마음에 떠올라

인터넷을 뒤져서 가져다가 꽂은 음악이다.

 

그렇다면 그들, 제자들의 지금 상태는 어떨까?

' 그때에' 내가 되어야 할 영적 상태가 어떨까라는 것이다.

' 아베마리아♬' 노랫 속의 저 고요함.

그 안정감이 저들 밀밭 사이의 제자들의 그것이 아닐까?

 

그렇다.

현실은 배고프고 힘들어도

유혹적인 현상이 이해할 수 없게 다가와도 (배고픈 자들의 밀밭사이.. 따먹을 수 밖에 없는.. 유혹)

그래서 어쩌면 '그때에'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주하인이라면

마구 혼돈 스러울 시간에 오히려

깊은 평강을 누림이 ' 안식'의 진정한 의미라는 것이다.

 

그것을 그때에라는 주제로 주님이 주심은

오늘 어쩌면

그러함을 이해하고 있어도

'배고픈 상황'이 있을 수도 있고

'배고픈데도 배고픔을 더 자극하는 일' 이 있을 수도 있지만

그것은 '그때에'라는 사실을 명심하면

'율법'과 '관습'과 '오래된 내 생각의 틀'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안식,

밀을 따먹는 '죄' 같은 행위가 진정한 죄는 아니고

오히려 그로 '자유'를 체득하고 영혼 깊숙이 자유로움을 느끼는

그래서 '예수님'과 동행함은

진리가 아닌 것으로 부터의 자유,

안식의 진정한 누림을 누리는 자로서 마땅히 다가올 '흔듦'에 대하여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것 같다.

 

아침.

눈 뜨고 출근할 때

내속에 '익숙~히 ' 다가오는 생각들.

날 좌절 시키려는 혼란들.

그것... 그때에 있는 ' 유혹'과 '시험'들이란 것이시다.

내가 '믿는 자로서 이것 밖에.. '하려던 것을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손잡고 동행하는 삶이라 주장하면서도 이것 밖에.. 라고 공격해오는 혼란들을

하나님은 ' 이 때에'라는 말씀으로 들여다 보게 하신다.

그들도 그랬다.

 
 

 

13. 이에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내밀매 다른 손과 같이 회복되어 성하더라

 주님은 손마른 사람에게 그러신다.

'손을 내밀라'

손 마른, 아니 손 말랐던 사람은

마른 손  아니 '말랐던 손'을 나은 줄도 모르고 내민다.

그러나, 벌써 손은 나아 있었다.

 

그렇다.

하나님은 안식을 주신다.

안식을 주시면서 '더 노력하라'고도 하시지만 강제하지 않으신다.

노력해야만 얻어질 안식이라기 보다 동행하면서 누리면

아직 변화 없는 듯한 상황에서도 '자유'를 누리게 되고

그 자유 가운데 어느새 변해 있는 모든 것을 경험하게 하신다.

자신도 모르는 변화가 어느새 와 있음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영적' 부분에 꼭 국한 됨이 아니다.

어느새 모르게 변화되는 것은 '심리적 부분'이기도 하다 .

어느새 불안은 사라지고 고요해진다.

자책감이 사라져 가벼워진다.

그리고 '육신적 '부분도 해당된다.

예수님 따라다는 모두가 다 고침 받고 모두 다 구원되지는 않았다.

사도 중 한 사람은 결국 실족했지 않은가?

고침 받은 사람들은 '믿음'이 있는 사람 뿐 아니지 않던가?

물론, 예수님의 하나님 영광드러내실 목적으로도 고치셨지만..

 

 또.. 그렇다 ^^*

 

'그 때에'라는 단어가 가슴에 들어옴은

그 때에 그런 사실을 인식할 때라는 것이다.

온전한 안식을 난 이미 받았고 누리는 자고

그렇다면 그들에게도 아직은 '도전'이 있었다.

자연스레이 이겨냈지만..

 

나도 그렇다.

도전은 '당연한 것'이다.

내 도전은 '의혹'들이다.

하지만 자연스레이 이겨낼 것이고

난 이미 '안식'이 어떤 것인지 깨닫고 , 그 것을 잃는 것보다 전 세계를 잃는 것이 나음을 알고 있는 자다.

 

 

 

적용

1. 성경 세장 읽겠다.

 

2. 그런 나를 사랑하겠다.

  이 귀한 하나님의 안식을 알고 은혜를 아는 자임에도 아직 흔들리는 내 속.

 그러나, 그런 나를 이해하고 사랑한다.

 그때에 ..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셔서 그 말씀을 또.. 주시지 않는가?

 

3. 하나님의 신묘하심, 세밀하심을 찬양한다.

 기도 중 특별히 그때에라시면서 지도하시는 '매일' 매시의 내 하나님을 찬양하자.

 

4. 안식.

 매 삶속에서의 안식을 누리자.

 기도하고 사모하자.

 

5.  타인의 질타는 당연하다.

 누구하나 세상 살면서 욕 안먹고 살 수 있을까?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면서도 매일 질타의 타겟이었다.

 

6. 배고픔, 손마름 .. 모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도구들이다.

 고난을 기뻐할 논리적 근거다.

 

7. 기적.

 이미 왔을 수도 있다.

 손마른 환자는 손말랐던 환자임을 몰랐었었다.

 

 믿고 감사하자.

 

기도

 주님.

여러가지 깨닫는 바들이 있습니다.

아침에 출근할 때 여지없이 내 속에 드는 부대낌들이 있었고

그 부대낌에 대하여 또 내 속은 '왜.. 나는.. '하는 갉음도 있었습니다 .

주여.

그게 양심이면 당연히도 좋고 도움이 되겠지만

삶을 갉아 먹는 아픔이면 좋지 않음을 압니다.

송사와 양심, 하나님을 향한 양심이 구분이 가게 하소서.

이 때에.. 라는 말씀이 저에게 그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

매일 매일 말씀으로 정확히도 잡으시는 내 하나님.

'내살아계신 하나님으로 인하여 드디어 '안식'이 눈에 보입니다.

이들 제자들처럼 아직 인생의 배고픔은 여전히 있고

 흔들림은 있지만

하나님이 결국은 '안식'을 주시고 계심을 믿고

배고픔조차 감사함으로 바뀌게 하실 줄 믿습니다.

이제 주여...

간구할 것은 깨달음 붙들고 오늘 하루 이기게 하소서.

어떻든 감사하는 하루가 되게 하소서.

그리고 제 지력을 높이시사

말랐던 손인 줄 모르고 아직도 마른 줄 알고

고민하여 영적인 에너지를 소모하지 않게 하소서.

주여.

믿고 받을 줄 믿습니다.

제 안의 마른 손 같은 문제들. .. 어쩌면 벌써 나아 있을 것을

믿음 부족하여 이루어 받지 못할 것만 같습니다.

주여.

내 주여.

하나님이 계셔서 전 너무 다행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감사하며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아멘

 

 

 

 

 

 

 

 

 

 

 

 

------------   2012 년 동일한 구절 묵상

 

 

제 6 장 ( Chapter 6, Luke )

 

작년

강변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밀밭 사진이 없고

올린 사진이 용량이 축소되어서

안 이뻐요.

그러나,

오늘 내용과는 상관없는

아베마리아지만

조수미님의 감미로운 목소리와

아름다운 음율이

밀밭 사이로 지나시는

예수님 일행의

그 허허로운 여유를 느끼기에는

그리 부족함이 없게 만드네요.

아니시라고요?

상상력 부족 탓입니다.

아니 감성 부족요.ㅎㅎ

 

주님과 같이 한번 걸어가 보시지요!

아,

저들의 배고픔도 한번 느껴 보시고요

그들의 자유로운 영혼의 허허로움도

같이 한번 느껴보세요.

 

 


1.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새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비어 먹으니

왜 요 장면에 오면

사뭇

머리 속에 그림이 그려질까요?

 

마침

조수미님의 아베마리아가

제 블로그 '음악' 카테고리에 있네요.

그래서

오늘 묵상이랑

잘 맞는 듯 싶어서 집어 왔어요.

 

안식일에 거기를 걸어서

어디로 가실까요?

 

아..

밀밭 사이로

새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중동의 날씨가

그 당시에는 좀 선선하지 않았을까요?

그리 그려집니다.

제 피부에 부닥쳐 오는

바람의 느낌이

조금은 선선합니다.

 

사람들의 눈을 봅니다.

눈이 조금은 내리 뜨여져 있습니다.

그 눈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차분함이 서려 있네요.

 

주님은 앞서 가십니다.

무언가 형용할 수 없는

예기가 느껴집니다.

그냥 저 분을 따라가면

될 듯도 싶습니다.

 

사람들은 자유롭습니다.

 

어떤 이는 뒤를 쳐다보고 가만히 있네요.

무엇을 보고 있을까요?

밀밭 사이에서 날아오르는

새 날갯 짓에

퍼득 놀라

하늘을 날아오르는

그 새의 형적을 따라 쳐다 보는 군요.

어떤 이는

잠시 쭈구려 앉아 있군요.

풀 숲 안으로 들어가서..

무얼 하나요?

혹시...끙~~~!! ㅎㅎ

설마 그럴리가요..ㅎㅎ

아마도

숨어 있는 이쁜 꽃을 감상했겠지요.ㅎㅎ

 

어떤 이는

밀대를 꺽어

입에 물고 있군요.

누구는 팔짱끼고 걷네요.

콧노래 하는 이도

휘파람 부는 이도 있군요.

아..

어떤 이가

이삭을 잘라 양손에 대고 부비는 군요.

어릴 적 생각이 납니다.

노란 벌판에

밀이 고개를 잘 숙이고 있을 때

그 밀을 잘라

불에 그슬려

양 손바닥에 대고

문지르면

고소한 밀이 먹기 좋게 되었던 기억요.

많이 먹을 게 없던 시절에

더 없는 간식이기도 했지요.

하지만

이들의 이 행동은

조금은 낭만과는 다른 듯한 면이 없지 않습니다.

 

'안식일'

어.

안식일인데 이러다니요.

그 엄한 시대에

엄격히 자란 이들이 이럽니다.

한편으로

얼마나 배고팠을지

상상이 갑니다.

참 불쌍해요.

그 시대의 어려운 삶이 그렇고

그 어려운 예수님 제자로서의 삶도 그렇고요.

그 배고픔은

경험자로서,

특히

오늘 아침

빈속으로 나오다가 들여다 본

버스 속의 묵상에서

절실히 - ㅎㅎ - 공감이 갑니다.

아마

배고픔을 못 참고

배고프면 영혼까지 시린 듯한

증상을 가진

저와 비슷한 사도신 듯해서

그 배고픔이

참 가련히도 느껴집니다. ㅎㅎ

그러나,

이스라엘의

그 엄한 분위기에

그 안식일에

그런 율법을 어기는 일을

사사로이 하다니

그것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예수님의

조금은 반사회적 허탈 분위기 - 세상의 눈으로 볼 때 말입니다. ^^;;;-를

동일 시해서 닮았다 감안해도

그것은 조금 지나치긴 하네요.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요?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이 사제 지간에

이 방탕스러워 보이는

타락(?) 이 말입니다.

 

밀밭사이로

걸어가는 이들의 분위기를 상상할 때마다

아베마리아 곡의 분위기가 떠오릅니다.

아.

아베마리아를 가져다가 들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우연히

너무도 맞아서 일 뿐이지요.

이 글 쓰기 전에

아침 묵상 전에

이 행렬의 분위기가

'허허로움'이란 네 단어로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그리 글을 쓸까 했었지만

밀밭 사이로가

더욱 서정적일 듯 싶어

그냥 붙혔을 뿐입니다.

 

제가 그 행렬에 있다고 가정해도

앞서 나가시는

예수님의 등을 보고

그 분의

그 휘적 휘적 걸으시며

무엇인가 생각하시는 듯한

분위기를 보면서는 요.

저도 모르게

밀을 한웅큼 들어서

생각없이

손에 올려놓고

두 손바닥으로 비빈 다음요...

아마

훅~~하고 불어서

알갱이를 남긴다음

입에 넣어

우적우적 씹었을 거예요.

펄쩍 뛰면서

한 발로

길 가의 풀 포기 하나를

발끝으로 축구하듯이 차기도 했을 것 같구요.

왜 냐구요?

날아갈 것 같아서요.

그냥 그래도 될 듯하여서 말입니다.

아마도

내 뱃속의 우릉우릉 소리가

내 육신의 기아상태를 방지하기 위한

방제장치의 가동 탓 ^^;; 도 있겠지만요...

실은

그 분이 주시는

그 자유로움 탓이

자유롭게 해서일 겁니다.

날 묶고 있던

온갖 규제와 내적 억압이

나도 모르게 잊혀 진 상태요.

그것은

아마도

그 사도도

마찬가지였을 거예요.

 

주님은

자유지요.

 

어제 그제 수요일...

오랫만에 일찍 퇴근해서

마음 먹고 기도원에 올라갔습니다.

그냥 그러고 싶어서요.

날은 정말 추웠습니다.

마스크를 쓰고

점퍼를 입고

목도리를 둘러썼음에도

찬 바람이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그럼에도

날은 청명했습니다.

걸어서

안양역 앞에 와서

2번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하늘을 쳐다보았습니다.

어찌나 맑고 이쁜지요.

노래가 나올 듯했습니다.

실은 월요일 글에도 고백을 했지만

약간은 멍한 상태였거든요.

올라가니 세시 예배가 있네요.

예배를 들어가서 앉는 다는 생각만으로도

허리가 아파오는 듯하고

졸릴 것 같은 생각이

나에게 의지를 강요하는 듯합니다.

항상 그래요.

예배가 진행되면서

난 감동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

목사님의 설교는 너무나 훌륭했습니다.

하지만

그 감동은 인간이 줄 수있는

감동 스토리와는 좀 질이 다릅니다.

인간은

격정적이고

좀 일회적이고

코 풀고 나면 잊어버리는 감동이지만

주님이 주시는 감동은 좀 유다릅니다.

전 익히 잘 알고 있습니다.

이제 수년의 경험을 통해

이게 은혜인 줄 압니다.

우선

가슴 한 구석이 따뜻해집니다.

콧 잔등 어디에선가

촉촉한 습기가 맣겨 (smelled) 집니다.

눈 뒷쪽

안구 뒤쪽이

촉촉해집니다.

웬지 모르게

마음이 넓어집니다.

이걸 ' 마음의 지평이 넓어진다' 고

표현하고 싶어집니다.

괜히 옆의 사람이 사랑스러워집니다.

아니,

그것은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그런 감각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람의 관계에 의한 감동에 의할 때는 그렇지요.

그냥

넉넉히 사랑스럽고

모든 걸 포용할 듯 싶고

그들이 안스럽고 불쌍해집니다.

그런 사랑입니다.

미운 사람이 없어집니다.

걱정요 ?

온갖 세상의 걱정을 다 들고 가도

이상하게도

아주 작아져 보입니다.

마음이 아주 허허로와 집니다.

그래요.

오늘 묵상하며

허허롭다는 느낌이 '확~'하고 온 것은

바로 수요일인 어제 그제의

영적인 쉬임을 허락 받고 왔기에

표현이 가능한 단어들일 것입니다.

 

예배는 감동입니다.

특별한 감동이지요.

요새는 자주 그걸 느끼네요.

밀밭 사이로 걸어가는

제자들도 그럴 걸요?

 

이들

제자들의 자유로움은

영적인 허허로움의 표현인 것 만 같습니다.

그 자유는

현실을 넘어서는 안전감에서 발로된 것입니다.

방임과는

너무나도 다르지요.

같은 현상으로

건방지고 세상을 멋대로 사는 자들에게도

안식일 밀밭의 범죄를 벌일 수는 있겠지요.

하지만

그들은 그것으로 끝입니다.

 

믿음이 시간이 지나면서

어릴 때와

성장이 충분하게 일어나서

연단된 믿음을 가지게 될 때가

거의 비슷한 경우로 나타남을 보게 됩니다.

어릴 때는 너무 어려서

성장한 믿음은 규격이 필요가 없어서

자유가 주어지는 게 말입니다.

주님 곁에 바짝 서면

그 자유를 느끼게 됩니다.

영혼이 말이지요.

그래요.

그들 영혼은 그리 자유롭습니다.

주님 뒤를 따르는

밀밭 사이로 갈 때요.

 

 

 

적용

 

1. 주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오늘 하루 산다.

 

2. 주님의 그 허허로움과 여유로움을 묵상한다.

 

3. 한명 이상 이 기쁨을 전파한다.

주님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려 오셨다 선언했다.

 

4. 성경 여섯 장 읽겠다.

 

5. 밀밭 사이로 걸어 어디로 갔을까?

안식일을 지키려 성소로 갔을까?

어디로 갈까?

난?
늘 같이 걸으시는 주님을 묵상한다.

 

기도

 

주님

감사합니다.

우리 주님께 모든 영광올립니다.

우리 주님의 그 자유로움

우리 그 주님의 안전을 감사드립니다.

주님

그 평강의 샬롬을 감사드립니다.

주님

어디에 있어도

주님이 계시면

나 날아가는 종달새의 지저귐과

흐르는 바람의 볼스침을 느낄 수 있어 감사합니다.

어디에 있어도

주님을 만나면

세상은 멀리 물러나고

진실이신 주님을 알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밀밭 사이의 여유를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주님을 알게되어

너무 너무 감사합니다.

제 영혼은 자유롭습니다.

날아갈 듯 싶습니다.

밀대 하나 꺾어들고

휘파람 불다가

입에 넣어 질겅거리는

그 자유를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예수님

주님의 이 평강을 전하고 싶습니다.

환경

결단

흐르는 인생의 시간을

주여 인도하소서.

자격되지 않는 자의 강박과

지나친 태만을 허락지 마소서.

주여

당신이 원하시면

인도하소서.

듣겠나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슈베르트의 아베마리아 조수미

 

 

조수미 - 아베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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