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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강과 평안 ( 왕하9:14-25 )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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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강과 평안 ( 왕하9:14-25 )

주하인 2011. 7. 19. 09:37

제 9 장 ( Chapter 9, 2 Kings )

 

비가 왔는가

날이 어두운가

바람이 부는가

 

난 그래도

꽃을 피우리라

이슬을 만들어 내리라

 

허락하신

그 샬롬의 평강으로

내 주의 영광

꽃 피워내리라 


 

16.  예후가 병거를 타고 이스르엘로 가니 요람이 거기 누웠음이라 유다 왕 아하시야는 요람을 보러

      내려왔더라 
  요람.

누워있고

예후는 병거를 타고 왔다.

한사람은 사그러지고 한사람은 위세가 올라간다.


  
19.  다시 한 사람을 말을 태워 보내었더니 저희에게 가서 가로되 왕의 말씀이 평안이냐 하시더이다

     하매 예후가 가로되 평안이 네게 상관이 있느냐 내 뒤로 돌이키라 하니라 
 불안한 요람은 계속 '평안'을 구한다.

그러나 세상의 그 구하는 평안, peace가 정말 영원할까?

예후의 말대로 그 평안은 사람의 뒤로 돌이켜지는

조삼모사...다.

  
  
26.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어젯날에 나봇의 피와 그 아들들의 피를 분명히 보았노라 또 말씀하

     시기를 이 토지에서 네게 갚으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여호와의 말씀대로 그 시체를 취하여 이 밭에

     던질지니라
 더구나 '하나님'의 이름이 들어가는

자의식적 해석의 세상 것은 '무섭다'

그 것은 당하는 자도 그렇거니와

하나님의 도구로 이용될 뿐인,

힘을 행하는 자도 모른다.

그가 누리는 지금의 평안이 잠시의 만족 뿐인 것을...

 

 

 

 세상 사는 것.

그 본질을 들여다 보면 다 ... '뻔~'하다.

그래서 무엇을 해도 유치했다.

개개인의 특성,

그들의 성품상의 강한 욕구에 따라

그 욕구를 만족시켜 가는 과정이다.

허겁지겁 그 만족을 이루어 가는 것이 인생의 목적인 양 살아간다.

그들의 허겁거리는 그 깊숙한 이유를 보면

'평안'을 누리기 위한것이다.

다양한 이유와 명분으로

어떤 이는  자식을 성공시키는 것에서 만족을 찾으려 하고

또 어떤 이는 세상의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것을

또 다른 자는 단순히 경쟁에서 승리하는 것을.........

그들이 인식하든 하지 않든 목표로 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정점에는 '통쾌함'이나 '만족'이 있다.

그들의 느끼고 표현하는 바는 어쩔지 모르지만

그 영혼 깊숙이 그들을 그 곳으로 이끌어

인생의 과정 중 다른 것을 보지 못하게 만드는 것의

동기 motive 는 영혼의 '평안'이다.

 영혼이 고요하고 평안함.

어쩌면 세상의 사람들은 너무 분주해서 영혼이란 것을 얘기하기가 두려울 정도로

콧방귀 끼고 부인하려 한다.

이것은 과학의 발전에 따라 모든 것을 눈에 보이는 '유물론'적 관점일 뿐,

그런다고 '진리'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보이지 않는 다고 공기가 없는가?

우리가 살고 죽고 또 다른 세대가.............이런 것을

단지 고기 덩어리가 숨쉬는 것으로 치부하기엔 해석되지 않는 맹점이 너무 많지 않은가?

 이제 영혼의 존재를 인식하지 않으려는

그들의 태도는 그 영혼의 곤고함을 가져올 수 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그들은 그 곤고를 대치할 다른

가짜 평안을 추구하게 되는 것이다.

그게 '인생의 목표'나 '성공'이라는 이름에 포장되어

그들을 이 세상에 눈을 고정시키는 이유다.

 그 평안.

그들의 그 평안.

그게 진짜 평안인가?

peace.

그 누림을 설령 이땅에서 누리고 획득했다한들,

그게 손에 잡힐 손가?

많은 부를 누려도 또 허덕이는 게 인간이고

대통령까지 되어도

뛰어내리고 마는게 인간의 깊은 속성이다.

그 속에는 평안이 있을 수가 없다.

원죄,

아담의 사과 사건 이후에 인간에 들어온 그 깊은 영혼의 상처를

어찌 인간의 노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가?

 

 오직,

주님 예수님

그 주님을 믿고 십자가 보혈로 영혼이 씻김을 받은 후

성령의 인치심을 받은 자라야 가능하다.

그 때야 평안을 이야기할 수 있다.

아..............

아니다.

평안이 아니다.

그것은 '일시적 개념'이고 어쩌면 너무 무미 건조한 표현이다.

'평강'이 맞다.

샬롬.

shalom.

 하나님이 그처럼 우리 에게 주시고 싶어하는 은혜라 표현되는 현상.

 도저히 상황으로 판단하여도 이해될 수 없는 때,

오직 주님을 바람으로 우리 영혼에 깊고 넓게 퍼져 나가는 깊은 안온감.

 근심 걱정 어두움이 휘몰아 쳐도

주님 성령님이 임하시면 놀라운 평강과 밝음이 영혼에 펼쳐져 가며

어느새 어두움은 지평 저너머 멀리가고

희망이 엄습해 오는 ^^* 그 놀라운 현상.

 눈물이 마치 안구 뒤쪽에서 스며나오듯하며

심장의 아랫쪽에서 따스한 감각이 피어올라오고

등줄기를 그리도 오래 누르고 있던 무거운 감각 - 아..........그러고 보니

언젠가 부터 수십년 내 등줄기를 누르던 그 무겁고 시린 감각이 없어져 버렸다.......

잊어 버린지 오래다 !! -이 사라지고

내 영혼에 느껴져 오는 감정은 '희망' , 감동, 감사, 기쁨, 이해, 포용.......의 단어들로

대치되는 현상.

 가만히 있지만 내 가만히 있음과는 상관없는 하나님의 안아주시고 다독거리시는

그 만족스러운 안온감........

더 이상 표현하기는 표현력의 부족으로 가능치 못하지만

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평강'이시다.

그 평강을 주시기 위해

주님은 그토록 수천년 전의 고대 중동에

성육신하시고 그 열사의 땅에서 33년을 사시고

고난을 겪으신 후 드디어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이다.

그리고 그 놀라운 회복을 세상에 펼치시기 위해

부활하셔서 성령으로 보혜사를 주신 것 아니시던가?

 

 아...

감사하다.

특별히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요람'의 불안에 떨면서 '평안'을 찾는 모습과

하나님을 제대로 모르면서

하나님의 사자인양 영혼에 한껏 바람이 든

예후의 모습을 보며

그들이 추구하는 그 거짓 평안과 대비되는

진심으로 하나님의 절대적 사랑으로 체험되는

이 놀라운 '평강'의 행운을

다시금 이 아침 보게 된다.

 

나.

샬롬'을 입에 달고 산다.

수년간 - 이 블로그를 운영한게 7년 째니 본격적으로 묵상을 시작한게 8년 이상 된 것이다. - 난,

주님의 '평강'이 내 인생을 이어나가는

삶의 에너지였다.

다행이도 그 언젠가 ' 하나님의 말씀' 만을 내 인생의 모토로 하기로 결심하고

기도드린이후 말씀을 통하여 '네가 기도한 후 내게 들린 바되었다..' 시던

그 이후......... 주님은 쏟아지는 성령의 은혜로

날 평강의 깊은 감동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하셨다.

그리고는 서서히 내 인격이 변하기 시작하고

내 삶이 변하기 시작하고

삶 속에서 내 여러 인생의 도구들이 변화되어 왔다.

그 어려운 환경에서

아무런 세상적 모사의 능력이 없던 자로

그래도 가장 나에 맞게

흔들림없는 자리를 주시고

내 나아갈 인생의 방향을 인도하여 주시고 계시다.

 그러나, 그러함에도

주님의 가끔 입다무심 ,

나의 의지와 깨달음을 위하여 조용히 하시는 그 순간에

난 아직도 많이 흔들림을 경험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주님의 조용하신 순간에도 ,

난 세상의 거짓 평안에 요동하지는 않고 있다.

 생각이 조금 더 정리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주님의 인도하심을 기다릴 필요가 있다.

너무 세상과 분리되어 구분지어

삶과 괴리된 믿음은 원치 않는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주님의 그 평강이 희석되지 않는

통합적이고 지혜로운,

내 살아가는 과정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며

어떤 모습으로 처해지더라도

주님이 주시는 평강의 원류를 놓치지 않는 삶을 원한다.

그러기 위해 내 오늘 할 일을 다시 생각해 본다.

혹여,

 주님의 원하시는 뜻에 어긋나는 일은 없는가?

 누구를 괜히 미워하고

 나에게 직간접적인 해를 끼치는 자들을 용서하지 못하는 바는 없는가?

 나에게 도움을 원하며 다가오는 자들에게

함부로 정죄하고 가볍게 대하지는 않는가?

세상의 부족함을 보고 괜히 흥분하고 정죄하지는 않는가?

아담 이후로 그 누구도 완전한 자가 있을 수 없음에도

난 어리석게도 세상에게 완전함을 기대하고 실망하고 있지는 않던가?

주님이 허락하신 이 고요의 상태에 난 혹시 흔들리지 않던가?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음을 또 잊지 않았던가?

허락하시는 과정 중에 약함과 곤란함을 너무 두려워 하지는 않던가?

남을 긍휼히 여기길 바라는 그 주님의 뜻에 반하는 마음은 어떤 이유인가?

교만은 또 없는가?

남을 인정하고 더 낫게 여기고는 있는가?

.........

그 어떤 것이라도

주님의 평강을 누리지 못하도록 막는 것은 '죄'다.

주님은 우리와 동행하길 원하신다.

그 하나님의 성령님이 내 영혼에 계시길 원하신다.

그 동행하시고 거하심의 '증상' 이 '평강'이다.

세상의 평안.......

그것은 주님의 평강으로 인하여 자연적으로 누려질 일이다.

 나.

더욱 깨어 있어야 한다.

감사하다.

 

 

 

적용

1.  세상의 거짓 평안에 솔깃하는 일이 없는가 돌아보자.

  그렇다고 세상을 도외시함은 주님의 뜻이 아니다.

  어찌할까?

   주님께 기도하고 여쭈어 보고 깨달음으로 세상을 이겨나감이 순서다.

  지혜마져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그리고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한다.

  내 오늘 최선을 다해 삶은 어떠한가?

 

2. 아직도 날 막아서는 큰 장애물.

   평강이 소실되는 듯.....한..그 순간.

   암담한.......

   그러나, 그 안에도 주님의 뜻이 계심을 잊지 말자.

   주님이 모르시는 게 있던가?

   그것마져 주님이 원하시는 최선이 있다.

   주님이 선하심을 강하게 믿는 연습이 되어야 한다.

 

3. 환우들에게 최선을 다하자.

 더 웃고 더 친절하고 더 들어주자.

 머리속 빠개지고 가슴이 터지는 일이 있어도 주님을 생각함으로 그러하자.

 

4. 성경 세장 읽자.

 

5.  평강. 샬롬...을 사모하자.

  세상의 것.... 요람 같이 아차 하는 순간에 잃을 수 있다.

 부귀 영화, 생명...

 그것,.. 잃어짐.. 그리 붙들지 말자.

 주님의 평강을 잃음만  안타까워 하자.

  그러지 않도록 늘 말씀과 기도와 찬양 안에서

  기대하고 기다리자.

 

기도

 주님.

그렇습니다.

세상의 누구도 '평안'이 그들이 추구하는 근본임을 압니다.

그것을 어떤 자들은 '복'이라 표현하기도

행복이라고 묘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전제되지 않음은 어떤 것도 '거짓'평안 임을 전 압니다.

저...

이제 평안을 넘어서는 평강의 그 감성을 가지고 있고 체험한 자입니다.

주여.

평강으로 늘 절 채우소서.

그래서 이제는 주님을 위하여 쓰임 받게 하소서.

제 자식들,

제 아내...

참 어려운 과정들을 걸어 왔지만

그 과정이 '평강을 위한' 과정임을

이해보다는 확신하고 느끼게 하소서.

남아 있는 인생 과정들...

슬픔이나 괴로움이나 힘듦보다는

그래도 주님이 계시기에.. 라는 고백을 늘 할 수 있는 자들 되게 하소서.

저도 그리하시고

제 아는 모든 분들 그리 하소서.

주여.

예수 ..

오직 십자가 만이 내 삶의 이유가 되게 하시고

성령의 은혜만이 내 삶의 에너지 되게 하소서.

주님 하나님 뵐 때까지

절 끝까지

제 식구들 끝까지 잡으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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