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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혼의 금빛 송아지(왕하 10:18-36)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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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혼의 금빛 송아지(왕하 10:18-36)

주하인 2011. 7. 22. 09:26

제 10 장 ( Chapter 10, 2 Kings )

 


 

28.  예후가 이와 같이 이스라엘 중에서 바알을 멸하였으나
29.  이스라엘로 범죄케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 곧 벧엘과 단에 있는 금송아지를 섬기는

      죄에서는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바알 믿는 자들을 정말 멋지게 해치우는  '예후'

저런 칼같은 결단력과 추진력이 있기에 주님의 쓰임을 받았나보다.

달란트.

정말 중요한 부분.

주님의 일을 하기엔 주님을 순종하는 '열심'이 우선이지만

10달란트 받은 자가 하는 일은 1달란트 받은 자가 하기엔 역부족임이 확실하다.

예후를 보니 그렇다.

 

 그러나, 달란트가 꼭 하나님 앞에서 받는 '상급'과 비례하지 않음은

또 예후의 예를 보면 알 수 있다.
달란트가 크면 클 수록 세상에서 누림과 칭송을 받고

그 안에 교만이 들어설 위험성이 크다.

많이 가진 자는 더 조심하라 하지 않던가?

선 줄 알거든 넘어질까 조심하라시지 않던가?

한편으로 가장 연약한 부위인 '발'에

더 아름다운 것으로 감싼다는 이야기도 있다.

거기에는 '예후'의 예후도 예외는 아닌가 보다.

그는 '금송아지' 만큼은 털어내지 못했다.

 

 그렇다면...........

 이 구약을 보면 아론으로 부터 여러 왕을 통하여

내내 되풀이 되는 '금송아지' 우상의 정체는 무엇이길래...

이처럼 우리들의 보기에 어리석은 짓을 되풀이 하던가?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금'이라는 반짝임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눈 앞을 현혹하는 것.

홀리는 것.

더구나 우상은 '귀신'을 섬기는 것이기에

그 귀신의 영적인 존재임을 감안할 때 어느 정도 사람들의 바램을

일시적이나마 충족시키는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상은 '이 땅'에서 제한적이고 반드시 '보상'을 해야하는 특성을 지녔지만

비교적 즉각적인 반응을 보일 수도 있기에

주면 받는 단순한 논리에 걱정을 할 이유도 없고

양심이나 하나님의 뜻을 살피는 무거운 의무(?)도 없는 듯하다.

거기에 영적 암흑세력의 중독적 끌어댕김...

그러니 , 이 어리석은 사람들은 날파리처럼, 불나방처럼

우상에 매달리는 것이다.

 

 예후의 금송아지는 무슨 의미였을까?
주님이 주시고 축복한 것으로 부족한 것이었을까?

그것이 상징하는 바는 무엇일까?

엇그제 이후의 묵상을 통하여 돌아 볼때

그는 '내 열심'이라는 소리를 하며

하나님의 앞을 가리는 욕심이 있는 자이다.

그는 '자신의 영광'을 금송아지 우상으로 삼았던 것이다.

하나님의 힘을 얻어 자신을 드러내는.............

 하나님은 그의 그런 어이없음을 잘 아시지만

그를 통하여 역사를 이루어가실 뜻으로

그에게 4대까지는 축복을 허락하신다.

 그러니 그게 그리 자랑스럽고 , 부러운 일이던가?

 

 나.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하려 애쓰는 자.

하나님을 동행하려는 삶을 동경하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기쁨이 무엇인지 아는 자.

바알 같은 현세적 우상의 축복을 바라기에는

이미 머리가 커버린 자.

그런 내가 혹여 아직도

내 영혼의 깊숙이 지니고 있는

'금송아지'는 또 무엇일까?

 

무엇이 나로 하여금 주님 앞을 나서게 하고 픈 욕구를 자극하는가?

무슨 달란트로 하여 남 앞에 드러내고 픈 욕구가 있던가?

 

 오늘은 금요일 성령집회 있는 날이다.

어제는 목요일.

2주만에 당직을 서러 갔다가 밤새 지독한 고생을 했다.

너무 환자들이 밀려서 잠도 제대로 못자고

얼마나 순간순간 판단의 정확도를 요구하는 상황이 겹치는지

아주 잠시의 시간, 당직실에 쉬러 올라갔다가

정신없이 초저녁에 곯아 떨어지는

그런 힘든 시간들이었다.

산모도 계속 밀려 들어와 새벽에도 그렇더만

아침 , 8시가 되어 출근 시간이 딱되어서 또 분만이 있다.

간호사에게 늦겠다고 전화를 해놓고

분만장에 들어가 얼른 아가를 이쁘게 받아 놓고

마침 출근한 주치의에게 인계를 하고 서둘러 나오려 했다.

아가는 신생아 처치대에서 얼마나 건강히 소리를 지르면서 우는지

귀가 쟁쟁할 정도였다.

건강한 아가는 누구라 할 것 없이 눕혀 놓으면

놀라서 누구라도 거머 안을 듯 손발을 공중에 휘저으며 바둥 댄다.

이것은 '생명의 현상'으로 'Reflex'라는 이름을 붙혀

신경계의 안정을 의미하는 귀한 현상이다.

그 모습을 내려다보니

아이의 팔을 허우적 거리는 그 속도와

아가의 분홍색으로 발그레한 모습,

거머쥐는 그 손가락의 앙증 스러움이

내 영혼을 강렬히 파고든다.

 나이가 할아비 나이가 되어가니 그런가.

예전의 아이 사랑이 더욱 깊어지며

그런 아이의 발짓이 내 영혼을 파고든다.

견디지 못해서 한 쪽 어금니를 머금으며

'이구~~~' 하며 꼬집고라도 싶다.

잘 소독된 손이기에 아가의 손바닥에 손을 가져다 대니

아가는 얼른 내 손을 고사리보다 작은 손으로 잡아댄다.

내 입에서는 나도 모르는 '깔깔' 소리가 터져나온다.

 얼마나 그 생명의 순수함이 귀하고 사랑스럽던지...

하나님이 당신을 순종하는 자들을 보는 눈이 그러리라는 생각이

불현듯 스친다.

 저런 아이들이 서서히 커가며

세상을 알고 자아의 개념이 생기면서 조금씩 미운 짓을 하더니

그중 일부는 어제 초저녁 17살짜리 임신 23주의 조산걸려

다 낳기 직전까지 되어서

부모들 걱정시키고 의사들을 거의 판단의 혼란 - 초저녁에 까무러치듯 잠든 이유가 그 아이 탓이다 ^^;;- 을

가져오는 '죄'로 물들어 가는 것이다.

그 죄야 실수 이겠지만 그 순수한 신생아에 비해서

어른으로서 쳐다보는 마음의 부담이 그렇다는 이야기다.

쳐다볼때 느껴지는 그 영혼의 감동을 가져오는 순수성이 사라졌다는 의미다.

 

 어찌되었던 그렇다.

예후의 금송아지는

참 아름답게 만들어 선택해 놓은

우리 '선택받은 자',

생명을 받아 그리 아름답게 만들어 놓은 자의 영혼에

금송아지 우상이 더럽게 들어와 앉은 꼴이다.

 

나.

혹여 하나님 앞에 버리지 못한 금송아지 우상은 무엇인가?

그토록 유혹적이고, 때로는 죄가 아닌듯,

이만큼 만 하면 되었지 않았을까.. 하는 정도의 수준으로

내 영혼 깊숙이 중심에 자리잡아 반짝이는,

그래서 그 감동의 순수함이 사라지게 만드는...

그게 무엇일까?

오늘 내가 깨달아 버려야 할 것......

 

 하기오스 찬양대에 선다.

찬양..

난.. 내 영혼을 다 바쳐 부른다.

진짜다.

찬양을 할 때 그 음의 흐름 하나하나 ,

거기에 내 바이브레이션을 잔뜩넣고, 살짝 넣고

목소리를 아랫배에서 밀어올리고 살짝 힘을 빼고

길게 끌고 짧게 스타카토로 하고

화음을 넣고 멜로디를 하고

손을들고 내리고

눈을 감고 뜨고

주님의 십자가를 연상하고 연상못하고............

그 차이에 따라 아주 단순한 곡의 멜로디지만

얼마나 천화만변의 변화 무쌍한 곡이 느껴지는 지

찬양을 부르면서 난 다양한 감성으로 기도를 드릴 때가 있다.

그러나, 때로... 난

내 잘난 맛이 날 사로잡을 때가 없지 않아 있다.

사람들이 내 찬양에 심취되지는 않았을까..

하나님을 바라보기보다는 사람의 얼굴들을 보며

그 반응에 따라 뜨거워지기도한다.

그때는 하나님의 영광은 멀리 사라지고

내 금빛 송아지 만 휘황 찬란하게 드러내지는 듯하다.

 

하나님.

날 보시며

오늘은 내 손짓과 발짓과 영혼의 사위가

혹여 그 신생아를 보는 듯 감동하실까?

아니면 그 고민덩어리 사춘기 미혼모를 보듯 안타까워 하실까?

예후를 보며 주님은 어찌 보셨을까?

네가 그럴 줄 알았다. .. .그러니 고생한 만큼만.. 하고

세상의 부와 영화만 주고 마셨을까?

그 안에 애뜻한 아이를 향한 사랑처럼 보지는 최소한 아니하셧을것 같다.

 

 날 보실때.. 어떨까?

비단 찬양할 때 뿐 아니라 내 인생에서 매일 흐르는 찬양의 삶 속에서

날 주님은 어찌 보실까?

내 금송아지 번쩍이는 이 느글거림을 싫어하시지는 않을까?

조심하고 묵상하며 찬양드리는 하루가 되길 원한다.

아기 같은 순전함으로

바둥대는 그 손발의 강력한 뻗침처럼....

 

 

기도

 주여.

예후처럼 열심히 주의 일 하길 원합니다.

그러나, 주님.

그 안에 제 금송아지가 번쩍 거리며

서슬시퍼렇게 살아 있으면

그렇지 않으셔도 됩니다.

주여.

제 자아의 금빛 송아지는 왜 그렇게도 꺼지지 않는지요.

사랑하시는 주님.

절 사랑하여 주소서.

매일 더 겸허하게 하여 주세요.

더 낮은 모습으로

주님 기뻐하는 모습으로

첫사랑으로 전율할 때의 그 순수한 모습으로

신생아의 그 생명력 넘치는 사위를 닮게 하소서.

그리 하여 주님의 깊은 사랑가운데 인도하소서.

제 부모님.

제 아내

제 아들들.

제 지인들

제 불로그 식구들.. 모두 그리하소서.

그리 축복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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