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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치고 나온 자와 홍사를 감은 자 ( 창 38:12-30) 본문

구약 QT

터치고 나온 자와 홍사를 감은 자 ( 창 38:12-30)

주하인 2007. 5. 28. 09:05

 
제 38 장 ( Chapter 38, Genesis )


12.  얼마 후에 유다의 아내 수아의 딸이 죽은지라 유다가 위로를 받은 후에 그 친구 아둘람 사람 히라와

     함께 딤나로 올라가서 자기 양털 깎는 자에게 이르렀더니  
13.  혹이 다말에게 고하되 네 시부가 자기 양털을 깎으려고 딤나에 올라왔다 한지라  
 아내가 죽었다.

허전하다.

친구들의 위로가 있다.

마음이 약해질 수 있다.

 

자기 양털.

양털이 아니고

자기 양털이다.

시사하는 바가 있다.

 

 내것

세상을 살면서

세상의 것을 할 수 밖에 없지만

거기에

모든 일이 주님께 하듯 하는 마음으로 하기를 권유하시는 듯한 뉘앙스.

 

 유다는

세상일을 자기 일 하듯이 했다.

 

여러가지 죄를 짓기 좋은 조건에 있다.

 

 
14. 그가 그 과부의 의복을 벗고 면박으로 얼굴을 가리고 몸을 휩싸고 딤나 길곁 에나임 문에 앉으니

     이는 셀라가 장성함을 보았어도 자기를 그의 아내로 주지 않음을 인함이라
  죄는 어디에도 있다.

늘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지 않으면

가족에게서도 원망의 씨앗이 나온다.


 
15.  그가 얼굴을 가리웠으므로 유다가 그를 보고 창녀로 여겨
 얼굴을 가리웠다고 창녀로 여기나?

오래 산 가족은 체취 만으로도 알 수 있을 걸.

 그는

아내가 죽은 후 마음이 허탈해 져 있고

자기 양털이라는

세상적,

오직 세상적인 일을 하러 왔다.

그 와중에

그는 음란의 죄에 걸려 드는 것이다.

 

 난

영적인 음란

세상적인 음란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가?

일 순간이다.

죄는 방심을 타고 들어온다. 

 
24.  석달쯤 후에 혹이 유다에게 고하여 가로되 네 며느리 다말이 행음하였고 그 행음함을 인하여 잉태

      하였느니라 유다가 가로되 그를 끌어내어 불사르라
 죄의 결과가 드러난다.

아직 그는 자신의 죄를 모른다.

인식하든 못하든

때가 되면 죄의 씨앗은 반드시 드러나게 되어 있다.


  
 
 
 
27.  임산하여 보니 쌍태라
 모든 일에는

두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님의 뜻

 내 뜻


 
28.  해산할 때에 손이 나오는지라 산파가 가로되 이는 먼저 나온 자라 하고 홍사를 가져 그 손에

      매었더니
 인간들은 홍사를 매면

그것을 맨 자가 반드시 먼저 나올 줄 알고 있다.

세상 이치가 그렇다고 생각한다.
 


29.  그 손을 도로 들이며 그 형제가 나오는지라 산파가 가로되 네가 어찌하여 터치고 나오느냐

      고로 그 이름을 베레스라 불렀고   
 그러나,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홍사를 맨자가 당연히 먼저 나올 줄 알았지만

베레스가 먼저 나온다.

 

 먼저 터치고 나온자.

그가 베레스다.

불륜의 씨앗이지만

그 씨앗에도

의미가 있었다.

다말이 죽을 죄를 지었지만

그 불륜의 씨앗에서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베레스를 먼저 출생하게 하시고

그 출생한 베레스를 통하여

예수님의 계보가 이어지게 한다.

무언가 의미가 심장하지 않은가?

 

 죄는 짓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지어진 죄 때문에 언제까지 고민할 것인가?

주님 앞에 내려놓고 예수님의 보혈로 철저히 회개하고는 잊어야 한다.

죄책감은 쓸모가 없다.

전향적으로 터치고 나온 후

그 곳에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알고

긍정적으로 나가면 된다.

 예수님.

참.. 희한하신 분이시다.

인간이 지닐 수 있는 모든 결점을 다 한번 씩 체험하시는 분이시다.

 

 

 

30.  그 형제 곧 손에 홍사 있는 자가 뒤에 나오니 그 이름을 세라라 불렀더라
  홍사가 있는 자

 

인간 들이 선 후를 구분 하기 위해 묶어 놓은 합리적인 형이 되어야 할  존재.

인간의 인지 상 당연한 존재

 

 홍사를 팔에 두른 자.

 

베레스

터지고 나온자에게

예상을 뒤엎고

장자 자리를 빼앗길 자.

 

 

 

 

 

 

 자꾸만 자꾸만

내 자아가 스며 나오려 합니다.

주여

 

 내 인지 상에는 이것이 좋은 듯 하여

이것이 합리적인 듯 하여

홍사를 감아 놓아야 할 것만 같아서

그리합니다.

 

 당연한 것

관습적인 것

자연적인 것

그것의 기준으로 자꾸만 홍사를 매려 합니다.

 

그렇습니다.

홍사를 매면

그것에 벗어나는 것은

이해하지 아니하려는 것입니다.

 

일단

홍사에 합당타 하면

그것에 어긋 난 것은

어리석은 일로 짜르려 합니다.

제 안의 어리석은 자아가요.

 

그러나

주님은

터치고 나오는 자를 보이십니다.

산부인과 의사로

이해하기 어려운 현실이지만

그 안에서

보이지 않는

그 좁은 태 안에서

하나님의 역사는

그렇게

이루어져 가고 있습니다.

 

베레스

터치고 나온 자

주하인

홍사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이 어리석은 행태와 생각의 기준에

한번 더 펀치를 매기고 계십니다.

 

주여

오늘

저에게 합당한 말씀을 주고 계십니다.

어느새

양떼 키우는 일이

주님을 위한 고귀한 일이 되지 않고

내 생업을 위하고

내 가업 만을 위하고

내 노후의 안정 만을 위하여

관심을 가지게 되어가고 있음을 경고하시는 듯 합니다.

 

그 어리석은 나태와 무지와 자아의 용트림에

다시 한번 그냥 두는 어리석음을 통하여

다말을 범하는

유다의 나태한 죄의 결과물을 보이고 계십니다.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

 

이제

모든 걸

주 안에서 생각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가능하면

내 양떼 보다는

주님의 양떼를 키울 수 있기를 원합니다.

 

가능하면

홍사를 이해하고

홍사를 존중하되

베레스의

존재를 염두에 둘 수 있는 균형잡힌 시각을 원합니다.

주님이 원하시면

합리라 생각되는 모든 것 조차 비합리로 인식될 수 있는 자연스러운 신심을 원합니다.

예수님

지나간 죄악은

베레스의 계보로 당신께서 태어나셨듯

그 마져도

주님 당신께 고하고 나면

잊을 수 있고

주님 당신의 뜻 안에서 이해할 수 있는 여유로움을 알게하소서.

예수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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