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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세겜 동네를 벗고 싶다 ( 창35:1-22 )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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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세겜 동네를 벗고 싶다 ( 창35:1-22 )

주하인 2007. 5. 23. 08:34

제 35 장 ( Chapter 35, Genesis )


1.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하나님이 나타나셨다.

그리고 초심(初心)을 회복하라 하신다.

주님께 서언했던 그 '벧엘'이 아니고

'세겜'에 안주하게 됨으로써 결과적으로  벌어진 그 사단을 통하여

야곱은 정신을 차린다.

 

 문제는 이것이다.

야곱은 세상적인 성향을 짙게 가진 자이다.

술수와 모사가 심하다.

그러나,

그는 특장점이 있다.

 

 주님의 말씀에 민감하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잘못된 선택까지도 존중하신다.

일정기간 침묵하심으로 우리가 돌아서기를 기다리신다.

그리고 그 기간이 길어지면 환란과 풍파를 묵인하심으로 돌이키길 기대하신다.

때가 되면 임하신다.

 

그러나,

힘들 때 주님을 찾는 것 조차 쉽지 않다.

야곱은 그런 의미에서

쉽게 주님께 돌이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2.  야곱이 이에 자기 집 사람과 자기와 함께 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중의 이방 신상을 버리고 자신

    을 정결케 하고 의복을 바꾸라  
 또한,

그는 주님의 말씀을 준행하는 특별한 점이 있다.

돌이키면 과감하다.

일도양단의 모습이다.

주님께서 권하지 않으신 면까지 그는 행한다.

 이방 신상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케 하고

의복을 바꾸길 선택한다.

그게 자신뿐 아니라 자신의 식구들과 모든 사람들에게 권고한다.

 

 배울 면이다.

회개한다.

회개한 후 과감히 돌이킨다.

권면하여 선한 영향을 이웃에게 끼친다.

 

 

 
3.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나의 환난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나의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단을 쌓으려 하노라 

 그가 이렇게 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의 기복적 믿음처럼

혹여나 환란 중에 주님을 찾을 그나마 선한 기독교인 들 조차

자신의 이익을 놓치지 않으려는 과부의 강청같은 그런 모습이 아니다.

그는 정말

주님이 원하시는 것을 알고 거기에 부응하기 위한 결단을 하는 것이다.

결코

결단이 주님을 앞서지도 않았다.

행실로서 무엇을 이루려는 그런 행실의 표시가 아니다.

주님의 뜻이라 생각하면

언제든지 과감히.... 이다.

 

 그런 그의 속내가 이 고백에 그대로 나와 있다.

 

" 내가 환난 받던 날에 내게 그 분은 응답하셨었다.

 그런 난 그분이 가슴 깊이 기쁘다.

 그분은 내 생명보다 귀하다.

 돌아보면 내 인생 과정 과정 , 여정여정에 서 계신 그 분이시다.

 그 분은 내 걸어온 길에서 단 한번도 나와 헤어진 적이없던 분이다.

 이제

 처음 약속했던 그 곳에 돌아가련다.

 내가 거기서 단을 쌓을 것이다.

 그게 그 분이 원하시는 것이시다. "

 

비록 몇 글자 더 집어 넣었지만

어찌 보면 저건 내 고백이다.

난 주님을 생각하면 눈물이 앞을 가리려 한다.

특별히 내가 걸어온 그 어려운 고비에

그 분이 함께 계셔서

날 지긋이 바라보고

그 분을 향하여 두 손을 내밀어

주님~ 하고 외칠 때

그 분은 내 속에 깊은 눈물을 집어 넣어 주셔서

그 눈물을 통하여

내 속깊은 속앓이의 찌거기를 하나 둘씩 꺼내 주셨었고

그 어려운 환난의풍파 속에서

버티고 살아올 디딤목이 되셨다.

솔직히

주님 그 분이 안계셨더라면

....................

 

 그러한 그 분은

오늘 야곱이 목소리 크게 내어 - 아마도 크게 내었을 것이다.    수천년을 뚫고 그 분은 나와 공감하고 계신다.    야곱께서 ~~  -이리 고백한 사실이 그의 오늘과 같은 바람직한 다짐을 하게 한 배경이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그는 아들 들이 벌이는 일들을 보고 있었다.

주님께서 그의 앞에 나타나서

회개하기를 권고하고 다시 돌이키기를 말씀하실 바로 전까지 어리석은 멘트를 날렸던 것으로 보아서 그렇다. (34장 30절에 걱정하는 어리석은 야곱을 보라)

 

그러던 그가 이렇게 달라진 것은

그의 하나님에 대한 민감성과 환란 중에 함께 한 하나님의 그 아찔하지만 아련한 '전우애, 동지애'를 수만배 확대한 그런 기억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4.  그들이 자기 손에 있는 모든 이방 신상과 자기 귀에 있는 고리를 야곱에게 주는지라 야곱이 그것

    들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 묻고  

(  이 아래에 야곱이 과거를 묻었답니다. )


이제 이 야곱의 행위를 보라 .

배울 면이 많다.

 "세겜 근처 상수리 나무 아래"에 옛 것들을 묻었다.

회개 하려면 이렇게 해야 한다.

두려움과

안일과

분노와

세상의 안정과

다툼과

욕심

....

모든 편안하고 익숙하던 것들을 버려야 한다.

그리고

그것들이 다시 살아나지 못하도록 '상수리 나무 아래' 묻어 버려야 한다.

그리하면

나무 밑의 박테리아 들이 철저히 그 과거의 망령들을 분쇄하여

상수리 나무 뿌리를 통하여 영양 분으로 빨아들여지고

그 오류로 점철된

세상의 어리석은 옛것들은

또 다른 가녀리고 피곤한 자들에게 경험의 증거물로 남아 있을 것이며

"옛날에 주하인 그 분도 그랬어"라는

추억담과 함께

그들에게 희망과 새로운 쉼을 허락할 그늘을 제공할 단초가 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이 세겜의 흔적들을 그냥 지니고 간다면

그것은 역사 속에 묻혀 버릴 뿐 아니라

세상에 그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못하고

주님에게 질책받을 그런 소치가 되지 않을까 싶다.

 

 주님이 나에게 주시는 말씀이다.

 

 

 

5. 그들이 발행하였으나 하나님이 그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신 고로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는 자가 없었더라 
  주님이 축복하시는 원리를 그대로 보여 주신다.

 

 야곱은 크게 두려워 했었다.

 믿는 자에게는 두려워 하는 일이 실제로 벌어질 일은 없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대적들을 두려워 하게 하여 잠잠케 해주시기 때문이다.

 

 난 특별히 걱정이 아주아주 많으신 아버지 밑에서 그 유전인자와 더불어 거의 매일을 그 분의 걱정하고 잔소리 하시는 소리를 들으며 컸기에 많은 걱정을 몸에 짊어 지고 자라났다.

그러다 보니 세상의 삶이 순탄치 만은 않았다.

걱정에 묶여 있던 경우가 많다.

그러다가

우리 주님 영접하고 내 삶은 거의 전 분야에서 변화가 일었다.

 예수님 영접하고 가장 좋은 것은

두려움이 많이 사라졌다는 사실이다.

 

 이 야곱이 기특(?) 하게 다가오는 것은

자신의 고백처럼

그 환란 날에 함께 하시고 늘 동행하시는 하나님의 체험에도 불구하고

걱정이 많은 게

오늘 날  강하고 담대하지 못하면 잘못된 믿음이라고  천편일률 적으로  강요하는 현 소수 기독교 지도자들의  내용과는 다르게

내 연약한 모습을 많이 닮아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깊이 영접하고 그 분의 살아계심이 절절히 느껴지는 '은혜의 순간'에는

두려움이 없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하나, 살아 있는 동안은 연단의 과정이기에 자신의 성품에 맞게 두려움도 존재하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오늘 야곱이 그렇지 않은가?

문제는 그러기에 그런 약함을 주님 앞에 내려 놓아야 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두려움과 무서움, 환란과 고통은

주님이외 다른 곳에서 위안처를 찾으면 반드시 실패하고 주님 앞으로 돌아올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주님을 다시 찾을

주님을 떠나지 못하는

주님 쪽에서 생각하면 두려움은 또다른 주님의 안전장치이기도 하다. 
 
 
  
9.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돌아오매 하나님이 다시 야곱에게 나타나사 그에게 복을 주시고
 하나님께서 연달아 나타나신다.

그리고는 복을 주신다.

 때가 되어야 한다.

때는 기간을 의미한다.

 그 기간은 '연단'의 기간이다.

야곱은 분명히 에서를 만나기 전에 큰 연단을 겪었다.

하나님과 씨름을 한 얍복강가의 사건.

그리고 나서도

세겜의 오류와 더불어 자녀의 환란

도피....

 복은 당연히 주님의 영역이다.

주님은 선한 분이시기에 당연히 복을 주신다.

 

 문제는

주시옵소서~하고 아무리 강청을 해도

우는 아이에게만 먹을 것을 주는 어머니 처럼

어린 아이에게만 음식을 준다.

영적으로 어린아이들은 주시옵소서...하면 반드시 주신다.

 그러나, 몸뚱아리 크면 당연히 자신이 노력하고

나중에는 오히려 자신이 돈을 벌어 부모 공양하는 것처럼

우리 인생은 반드시 커야 한다.

크지 않으면 저능아가 된다.

박약아가 된다.

성장에는 고통을 생각지 않고는 이루어질 수가 없는 것이다.

영적인 박약아는 더 무섭다.

 

 세상 공부에도 많은 경쟁이 따른다.

이것이 연단이다.

연단은 누구나 받는 과정이다.

이 과정은 성장된 믿음인이 되어야 천국에 합당한 자격이라는 의미를 당연히 내포하고 있다.

 
 
10.  그에게 이르시되 네 이름이 야곱이다마는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고 이스라엘이

     네 이름이 되리라 하시고 그가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부르시고 
 
  이제 보라.

이스라엘.

얍복 강가에서 불렀던 그 이름을 다시 한번 부르신다.

이제 확실한 자격을 주시는 것이다.

대학생활을 마쳐도 졸업시험과 논문에 통과하는 등

졸업에 합당한 자격을 갖추어야 대학을 마쳤다고 한다.

그는  이스라엘 이었지만

비로소 이스라엘이 되었다.

 

 주님에 고정된 시각과

합당한 회개와

그에 따르는 결단과

이 모든 것에 바탕이 되는 '하나님에 대한 동행의 체험'의 일정한 기간, 즉 연단의 시간

그리고 거기에서 체득된 인격적 만남 즉, 생각만 해도 코를 막히게 하고 가슴을 뜨겁게 하며 눈에 눈물이 고일 하나님에 대한 감동의 체험이 바탕이 되어야 비로소 '이스라엘'에 합당하다는 인정을 받는 것이다.

 

 

적용

1. 잘못된 선택이 무엇인지 돌아 본다.

   처음 초심과 달라진 것은 무엇인가?

   난 , 올 초 주님을 위하여 남을 위하여 ...긍휼과 겸손... 등 선한 것을 목표로 잡았다.

  그러나, 자꾸만 지쳐간다.

  그래서 최근엔 줄일까 생각도 했다.

  내 몸은 그렇게 얘기하며 수많은 이유를 댄다.

  짜증도 나려한다.

   어제 저녁 운동하고 기도원에 갔다.

 밤에 자고 내려왔지만 특별히 기도를 못했다.

 오늘은 수요일 교회에서 주님을 집중하겠다.

 

2. 느껴지면 과감히 짜르고 싶다.

 그러나 , 내 속에서 나도 모르는 거부가 있다.

 주님께 기도하겠다.

 

3. 모든 사람들에게 친절하겠다.

  오늘 하루..

 

4. 성경 읽겠다.

   5장

 

 

 

 

 

 

 

 

기도

 

 

주님

제 마음이 요새 근원적으로 흔들거렸습니다.

알게 모르게

예전에 허락하셨고 깊이 기뻐해서 기도했던 많은 부분들이

마치 야곱의 세겜 시절같이

마음 편안하지만

주님께 올바르지 못한 상태인 듯합니다.

주여

이 어리석은 이방적 마음을

상수리 나무아래 묻을 수 있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

자꾸만 달라붙는 이 연민의 감정들은 떨구기 쉽지 않은 게 사실입니다.

주여

이제 야곱처럼

과감히 잘라내고 묻어 버리는 그런 담백하고 용기 있는 자가 되길 원하나이다.

이 마져 도우소서.

성품 상 자꾸만 자꾸만 하는 이 늘어지는 성품을 바꾸소서.

교만한 성품이 들어나지 않도록 하소서.

주여

겸손케 하소서.

주여 긍휼케 하소서.

주여

당신의 나라에 맞는 성품으로 온통 저를 change하소서.

도우소서.

도우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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