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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떠한 인물(창36:1-24)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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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떠한 인물(창36:1-24)

주하인 2007. 5. 25. 10:36

 

05년 성가합창제 참여 중인 안물 중 하나가,  그럴듯해 보이지만 실은 그토록 어리석은 주 모 올시다.)

 

 

 

 

1.  야곱이 가나안 땅 곧 그 아비의 우거하던 땅에 거하였으니
 야곱은 결국 살던 곳에 살계 되었다.

옮겨야 별것 없다는 뜻인가? 
 
2. 야곱의 약전이 이러하니라 요셉이 십 칠세의 소년으로서 그 형제와 함께 양을 칠 때에 그 아비의

    첩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로 더불어 함께 하였더니 그가 그들의 과실을 아비에게 고하더라  
3.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보다 그를 깊이 사랑하여 위하여 채색옷을

    지었더니 
4.  그 형들이 아비가 형제들보다 그를 사랑함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언사가 불평하였더라  
5.  요셉이 꿈을 꾸고 자기 형들에게 고하매 그들이 그를 더욱 미워하였더라 
  미움 받을 짓만 한다.

나도 그렇다.

교회에서

가정에서

사회에서 분노를 잘 터뜨리니 원...

 야곱은 또 편애를 왜 하는가?

나름대로 잘 연단받아 정결해졌다면서...

형제들은 미울 수 밖에.

 

 주님은 이런 것들도 그냥 허락하신다.

우리는 알지 않는가?

요셉이 그래서 총리가 된 것을 .

문제는 현재의 상태가 아니다.

그래도

그래도

절대로 주님의 뜻을 놓치지 않는 것이다.
  

11. 그 형들은 시기하되 그 아비는 그 말을 마음에 두었더라 
  내 말로 상처 입었을 것을 그리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듯 싶다.

나는 잘못하면 크게 dep. 되었었다.

그래도 듣는 잔 듣는다.

시기는

주님께 고정만 되려고 노력하면

결국은 다 선을 위해서 사용된다.
 
 
 
13.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이르되 네 형들이 세겜에서 양을 치지 아니하느냐 너를 그들에게로 보내리라

     요셉이 아비에게 대답하되 내가 그리하겠나이다 
 어린 요셉은 어려서인지 엉터리 같은 인격을 가지고 있었어도

-난 ...- 아버지에게 순종은 잘했다.

"순종"이 미덕이다.

 

 그리고

형제들이 자신을 미워할 것이란 것은 전혀 생각지도 않는가보다.

왕따의 피해의식이란 것은 아예 없다.

'자신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줄 아는 요셉'


 
15. 어떤 사람이 그를 만난즉 그가 들에서 방황하는지라 그 사람이 그에게 물어 가로되 네가 무엇을

     찾느냐 
  어떤 사람이 누군가?
   

고후7:5-6)

 5  우리가 마게도냐에 이르렀을 때에도 우리 육체가 편치 못하고 사방으로 환난을 당하여 밖으로는 다툼

    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라 
 6  그러나 비천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이 디도의 옴으로 우리를 위로하셨으니
 

 

 마게도냐에 이른 사도바울 일행도 다툼, 두려움, 비천한 자괴감 등이 그들을 괴롭혔다.

할렐루야.

 

 솔직히

난 요즈음 수요예배 후

성가대 연습 때 짜증이 나서 견딜 수가 없다.

 

은혜는 없는데

사람들은 이합집산

밤톨이 석쇠 위에서 이리튀고 저리 튀듯이

연습하려면

한사람은 이리

또한사람은 저리

거기에

인도하시는 김전도사님이 되지도 않는 욕심으로 마구 악보를 바꾸는 게 10시 반이 되어서야 시작.

내가 빈정댔다.

아내가 삐져서 뛰쳐나간다.

 

 성질이 나서 말도 하기 싫다.

은혜 가운데 해야 하는데

난 은혜가 없다고 생각하면 하기 싫어진다.

왜이리 난 한번 드라이브 걸리면 막을 수가 없는가?

 

내 자신이 이게 싫다.

사도 바울이 비천한 자괴감이란 게 그대로 가슴에 온다.

다음에 회복하지 못할 거라는 두려움이 더 크다.

그리고 나서는 혼자 삐져서 들어가는 아내를 향해 말 걸기도 싫어서

어제 내내 아들 방에 누워서 컴퓨터 영화만 보며 아무 생각하지 않고 머리를 누였다.

 

난 쉬고 싶다.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다.

그냥 될대로 되라.

힘이 없다.

 

 그리고 나서는 눈치 보는 내가 싫어서 선택적으로 눈치 안보고 누워 있었다.

감정싸움도 싫다.

내가 원하면 안싸우면 된다.

내가 원하면 회복한다.

 

 주님 앞에는 아무래도 죄송하기 그지 없다.

 

아침에 나오는데

성경을 읽었다.

부담이 없다.

이전에 같으면 '나 같은 것이' 했는데 그것이 없는 것이

한편으로 대견하기도 하고

한편으로 어이없기도 하다.

이게 무슨 양심없는 짓이냐..한다.

그래도 주님 생각하는 게 다행이긴 하다.

 

성경을 묵상하려니

오늘 구절을 모르겠다.

그래서 눈에 띄는 부분을 읽었는 바 이게 내일 구절이었다.

그래도 상관없다.

나한테 주시는 말씀이니...

 

 '어떤 사람'이 눈에 들어온다.

 어떤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왜 어떤 사람은 이름이 없는가?

그가 길을 가르쳐 준 이유는 무엇인가?

혹시 그는 천사 아닌가?

특별한 역할을 하는데도 무명이다.

그는 그렇다면 요셉을 왜 나쁜 길로 갈 것을 알면서 인도하는가?

 

 아침에 병원에 앉아서 혼자 큐티를 하려다가 변이 급해서 성경을 들고 갔다.

고린도 후서를 펼쳤더니

사도 바울이 고난 받는 장면이 눈에 들어온다.

 다투고

두려움이 있고

좌절감

위로가 필요한 상황.

 그도 나와 큰 차이가 없다.

그도 싸운다.

그도 두려워 한다.

그도 좌절한다.

대단한

그도 위로를 받을 대상이 필요한 연약한 인간이다.

그는 항상 성령 충만하여

100% 모든 일에 주님의 성령의 열매가 맺힌 사람이길 기대하지만

적은 부분에서 나랑 비슷한 게 보여서 위로가 된다.

그러면서

사람이 와서 그를 위로한다.

그게 디도란다.

 

 오늘 무작위로 뽑아든 성경구절과 어찌 이리 닮아 있는고?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다 보면

이리 상황이 비슷하게 전개되는 게 너무도 많다.

 

 그래.

내 심정에 맞는 것만 눈에 들어오는 게 사람 심사이니 당연히 그럴수도 있지.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찌 그리 그런 구절만 성경에 있는고?

 

그리고

그런 상황에 맞다는 것이

내가 내 인지력을 발휘해서

눈에 심지를 돋구고 논리적 합의점을 찾아내서 한 것이 아니다.

그냥 주님이 알아서 눈에 넣어 주신다.

그러고는 어떤 시간의 소요가 필요없이 그냥 그럴 것이다라는 느낌이 온다.

묵상을 정리하려 컴 앞에 앉으면

평생 문학 작품이라는 것은

잠을 자기 위한 도구일 뿐

학교다닐 때 읽어 본 적이 없는 무식한 나에게

오직 만화와 무협지 읽은 그런 경험을 통하여

내 손을 통해 정리되어 나가도록 하는 글을 보고

많은 분들이

글 솜씨 있다고 한다 .

참 희한치 않는가?

주님 아니고는 내 이런 현상에 대하여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바다.

정말이다.

 

 오늘도 그렇다.

어떤 사람이

요셉에게 그랬는가?

어떤 사람은 누구인가?

왜 그는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체 전 인류에 그리도 중요한 행사를 가르쳐 주는가?

만일 그가 길을 잘못 가르쳤다면

요셉은 그 무서운 고생을 하지 않았어도 좋을 것이고

형제들은 형제 분란, 골육상쟁

시기 질투의 극단전 패륜행위를 하지 않았어도 되었을 것이고

그것은 또한

새로운 루트를 통하여 예수님이 성경에 등장하게될 기회가 되었을 지도 모른다.

오늘 날

요셉이라는 존경할 만한 인격자에 대하여 다시금 묵상할 기회를 얻지 못할 것이고

그의 입지전적 성공에 대하여 희망을 가질 모본을 잊을 지도 모른다.

 

 이 어떠한 인물이

내 인생에서는 어떠한 영향을 미치련가?

 이 어떠한 인물은 분명코 부정적 영향을 요셉에게 주었지만

그걸 통해 역사는 주님의 뜻대로 흘러가고 있다.

 

 사도바울은

안팎으로 분란과 자괴감과 두려움에 쌓였지만

디도라는 인물을 통해 또 한번 거뜬히 이겨나가는 길이 되었다.

 사도 바울에게는 디도가 그 어떠한 인물이다.

 

나에겐 누가 어떠한 인물인가?

오늘 그 어떠한 인물은 내 인생에 나타날 것인가?

아니면

내가 어떠한 분에게 어떠한 인물의 역할을 하려고

이 성경의 다양한 엮임을

오늘의 묵상에 찝어 올리고

거기에 나의 경험을 접목시키고

나의 불충분한 , 요셉 같은 어리석은 , 형제들 같은 포악한 성품이지만

이것조차 주님의 역사 안에 있음을

그들에게 가르쳐 주는

내가 그 어떠한 인물이 될 역할의 소지가 있지 않은가?

 

 하여튼

예수님은 다양하게도 묵상을 일구신다.

그리고

그 틈틈히 그 분은 얼굴을 내미신다.

내 어리석은 본성조차도

그 분의 역사 속에

다시 사용될 가능성에 대하여

오늘 보이고 계시는 듯 싶다.

 

참 희한하다.

 

 

 

 

 


19.  서로 이르되 꿈 꾸는 자가 오는도다   
 

( 꿈은 아름다울 수록 좋습니다. )

 

꿈꾸는 자.

 

그건

비젼이 아니다.

장래의 거대한 목표가 아니다.

 

 그들을 핍박하고 수치스럽게 하는 꿈을 꾸고

어리석게 톡톡하고 말을 뱉는 유아적 성품의 요셉을 비웃어

하는 부정적 이야기이다.

 

 어떤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구릉을 기쁘게 달려오는 요셉이 멀리서 보이는 듯하다.

형들은

목초지에서 일을 하다가

멀리서 보이는 동생의 모습이 순간 눈에 들어오자 이런다.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

내 눈에 보이는 것이

어리석게도 부정적으로 보이는가?

그는 내 인생 뿐 아니라 전 인류를 구원할 구원자가 나올 밑 바탕을 마련할 자이다.

 

 주하인.

깨어 있으라.

스스로 회개하고 마음을 넓히지 않으면 안된다.

 

 

 

24.  그를 잡아 구덩이에 던지니 그 구덩이는 빈 것이라 그 속에 물이 없었더라 
 사람을 미워하는 것은

그를 구덩이에 던지는 것이다.

아니

자신을 구덩이에 던지는 것이며

그 구덩이는 남보다 훨씬 더 힘든 구덩이가 될 것이다.

빈것이다.

거기에는 물이 없을 뿐더러

중동의 뜨거운 햇빛이 내리쬐어도 피할 구석이 없는 아주 힘든 구덩이이다.

물이 없기 에 목이 마른 것은 당연하다.

형제들의 악의 근원이 뭉쳐있음을

그 속에서 느낄 수 밖에 없기에

피부가 태양에 타는 아픔보다

더욱 큰

악의 살기로 타는 아픔을 스스로 느껴야 한다.

 

 물없는 구덩이

태양이 내리 쬐는 구덩이

 

그 구덩이에서 올라올 방법은

예수님 손길 밖에 의지할 것이 없다.

예수님 손길을 잡기 위해서는

스스로 소리 질러야 한다 .

도와주세요..라고

도와주세요라는 구원의 음성은 절실해야 한다.

절실함은 자신의 내적 충실함에 의해 기초가 된다.

내적 충실함이란

용서와 화해와 결단의 의지를 말한다 .

 

주하인.

용서하고 이해해라.

 

 

 

 

 

적용

 

1. 순종하자.

   위 분의 말씀이라면 무조건 순종한다.

 

2. 요셉처럼

   사도바울의 다툼과 비천한 자괴감 후에도 자신을 받아들인 것 처럼

   나를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3. 회개한다.

   회개와 양립하는 듯한 자기 인정은 양립이 아니다.

   주님께 자신의 판정 조차 내려 놓는 것이다.

 

4. 용서한다.

    이해한다.

    절대로 용서와 이해는 반응성이 아니다.

    주권적 이해와 용서다.

 

5. 용서와 이해가 적당과 어떻게 구분이 될 것인가?

   힘들다.

   주여 ..  지혜를 주소서.

 

6. 꿈꾸는 자는 좋은 자다.

    부정으로 비틀어 보는 것은 오래된 구습이다.

    왕따의 소지가 다양한 요셉이 가장 큰 자가 되었다.

    모든 자를 아름다운 비젼 있는 자로 보자.

 

 

기도

 

주여

 스스로도 그렇고

남에게도 그렇습니다.

용서를 하지 못하고

용인을 못하며

용납이 어렵습니다.

오래

그럴 훈련을 해오고

그리 되었다 생각하고

마음을 놓으면

어느 순간에 저도 모르게 오류에 빠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면

사도바울의 비천한 자괴감에 저도 모르게 빠져

온몸에 힘이 하나도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일어나지 않고 싶지만

오늘 묵상은

시기 적절하게 다시 힘을 주십니다.

주여.

그러나,

아직도 깊은 자기 연민의 해결과

그 어떤 사람이 나에게 나타나질 않았습니다.

어려울 듯도 싶네요.

도우소서.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하겠지만

우리 주님

당신의 인도하심대로

따를 수 있기를 소원하오니

주여

힘을 주옵소서.

늘 그랬듯이

내 얼굴을 지켜주시고

내 심령을 지키시고

내 당신에 대한 순수한 기쁨을

놓치지 않도록 인도하소서.

 

예수님의 이름 받들어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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