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촛점( 욥13:3-10) 본문
제 13 장 ( Chapter 13, Job )
큰 나무 아래 분꽃.
나무에 촛점을 맞춘 사진
꽃에 촛점을 맞춘 사진.
느낌이 다르고
사진 분위기도 다르다.
꽃은 흔들려
촛점을 잡기 힘들었다.
나무에 촛점을 맞추고 찍은
위 사진은
훨씬 안정감이 있어 보인다.
하나님께
내 모든 촛점을 맞추고 살 수 있길 원한다.
나도...
3. 참으로 나는 전능자에게 말씀하려 하며 하나님과 변론하려 하노라
오늘
내
고백이길 원합니다.
'참으로'
'나는'
'전능자에게 '
'말씀하려 하며'
'하나님과'
'변론하려 하노라'
4. 너희는 거짓말을 지어내는 자요 다 쓸데 없는 의원이니라
5. 너희가 잠잠하고 잠잠하기를 원하노라 이것이 너희의 지혜일 것이니라
영혼을 흔들려는
세상의 가치는 떠나라.
잠잠하고 잠잠하라.
이것이
내가 마땅히 가져야 할 지혜이다.
사는 게 나에게는
왜 이리 힘이 드는지..
뭐 하나도 뚜렷이 결정 내리는 것이 없다.
눈에 뻔히 보이는 돈들도
생각이 많이 돌며
주춤하다가 시간을 놓쳐 손해를 - 다행이도 주님이 상대적 손해만 보게 하신다. 안타까우신가보다.. ^^;;- 보기도 한다.
예전에는 덜 그랬지만
요즈음에는
주님께서 좋아하실까... 하는 생각이 하나 더 추가되어
내 속에서
한번 생각하면 '콱'하고 해치우길 좋아하는
강한 육성과 충돌하면
아주 머리가 복잡해진다.
그러면
나도 모르게 생각을 멈추고
가만히 시간을 보내게 되버린다.
어느땐 그게 마음의 답답함과
머리가 아프기도
속상하고 울화가 터지기도 했었다.
바보같다.
말씀을 묵상하는 시간이 길어지며
나름대로 말씀에 적용하여
원리를 주님 안에서 찾는 기회가 늘어나며
많은 부분 '평정'을 찾게 되었고
오히려 홀가분한 느낌을 유지하는 시간이
이제는
점차 늘어가지만
아직도 '멍'할 때가 종종 있다.
나의 이 바보 같은 성향은
두 생각 - 예수님 생각과 인본주의적 (비 예수님적 ) 생각-의 충돌에 의한 것으로
내 세상에서의 삶을
꼬옥 쉽지 만은 않게 했다.
예수님 믿기 전은 '도덕적과 비도덕적 생각' 이었지만...
어쨌든
말씀 앞에 서는 시간의 길어짐은
이러한 현상 들의 존재를 인지하게 하고
말씀 안에서 자유를 누리는 경험을 증가 시킴은
천국의 삶에 대한 기대를 높이게 되었다.
오늘
욥의 부르짖음이 좋다.
"참으로 나는 전능자에게 말씀하려 하며 하나님과 변론하려 하노라 "
그래야지.
주님 만 바라보고
주님에게 만 변론해야 한다.
주님의 생각만 느끼고
주님의 것이라 생각하면
세상의 손해가 아무리 괴로워도 그래야 한다.
쉽지는 않아도..
하지만
그 말을 하는 욥의 상황이
지금 편안하지를 않다.
그는
불 고난의 와중에 있다.
그러면서
어이없는 친구들의 갑작스러운 공격에 당황하며
정신적인 혼란 속에 있다.
그 와중에서
그는 그동안 의인으로 살동안의
평안한 환경 중에
하나님 말씀을 들으면서 살아왔지만
심한 고통 중에
세상의 소리 - 친구들의 소리로 대표되는 -가 충돌해 오기 시작하며
그리도
깊이 지켜왔던 그의 영성과 인격이
흔들리는 듯한 초조감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그로 하여금
두 생각의 충돌로 인한 '갈등'을 느끼게 하고
그것은
신앙깊은 그로 하여금
소리 지르고 선언하게 만들어간다.
그것은
흔들리려는 자신을 부여잡으려는 몸부림이긴 하지만
이러한 놀라운 깨달음과 의지는
결국
하나님이 허락하신 고난의 과정이 끝나고
하나님께서 욥의 손을 들어주시는
기본 바탕이 된다.
다시 말하면
욥이 옳은 것이다.
오늘
'하나님과만 말하고 하나님께만 고하려는'
그의 태도는
우리 모두가 지녀야하는 태도이라는 것이다.
또
그것은 다시 말하면
누구나 자연스레이 지닐 수 있는 신앙의 태도가 아니라는 이야기도 된다.
선택 받은 소수 만이 지닐 수 있는
하나님의 칭찬을 받을 수 있는 자들 만이
깨닫고 그의 영혼의 원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어제의 묵상에 '자자자' 이야기를 했지만
그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잡아다니는 세상의 원리 - 손해 볼지도 모른다. 억울하다. 하나님도 너를 .... -에
저항할 이유도 못 느끼고
자연스레이
주님의 원리를 선택하고 기다릴 수 있는
깨달은 자이냐 .. 라는 것이다.
주님을 의식하여
세상의 손해나 고통을 감수할 수 있을 수 있냐는 게 문제다.
난 돌아본다.
아직도 손해 볼까봐 불안하긴 하다.
걱정도 된다.
답답하려 한다.
머리가 아프려 하고
속상하려 하기도 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있다.
그럼에도
주님의 말씀을 쫓으면 '평안하고 기쁠 것'이라는 기대감이 커진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불안과 답답함의 시간은 점차로 짧아지고 강도도 준다는 사실이다.
오늘 주님이
나에게 주시는 레마의 말씀은
참으로 나는 전능자에게 말씀하려 하며 하나님과 변론하려 하노라 이다.
의지하고 프고
위로를 받고 싶은
세상 보다는
느린 것 같고
안계신 듯하지만
진리이신 하나님 만을 의지하고
대화하고
말씀드리는 삶을 살라는 것이다.
적용
1. 주님은 살아계신 것이 맞다.
그 분은 적절하게 말씀을 주신다.
그 분은 위안을 주신다.
그 분과 만 대화하고
그 분께만 아뢰어야 한다.
2. 성경 여섯 장 읽겠다.
말씀으로 내 영혼의 원리를 삼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꼭 말씀으로 바로 서야 한다.
3. 참으로 나는 전능자에게 말씀하려 하며 하나님과 변론하려 하노라
백번 읽고 외우겠다.
4. 포기할 것은 포기한다.
돈은 주시면 받는 다.
쫓는 것은 피한다.
무리한 이익은 추구하지 않겠다.
5. 어떤 일이든 주님이 허락하신 것임을 믿는다.
당황할 것도 기뻐할 것도 없다.
6. 세상아 잠잠하라.
내속아. .잠잠하길 기도하라.
기도
주님
감사합니다.
우선
욥기에서도 묵상을 진행할 수 있게 해주시어서 감사드립니다.
어둡지만
그 안에서도 희망이 보이는 것이
마치 제 불신과정을 거쳐
상처가 치유되고
주님의 말씀이 뚜렷이 보이는
변화의 과정을 보이는 것 같아서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욥의 그 대단한 고백을 통하여
나의 나아갈 방향을 보이시는 것 같아서도 감사드립니다.
놀라운
고백을
저리도 어려운 상태에서
해냄과
절묘한 조연들의 '조롱거리'처럼 보이는
스스로의 영웅입담이
살아 있는 듯,
세상에서 지금도 횡행하고 있는
가치없는 수많은 자들의 입담처럼 느껴져
또 감사합니다.
살아있는 성경이 느껴지니 말입니다.
수천년 사람들의 감성도
지금과 하나도 다름없고
세월이 지나가도 변화없는
그 인성의 '조악함'들이
얼마나 우수운지요.
결국
우리가 나아갈 바는
하나님의 앞일 수 밖에 없는 당위성을
오늘 묵상을 통해
다시한번 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주님
저
아직도 멀었음을 압니다.
머리 속으로만 알고
현실에 부딪치면
여지없이 무너지고야 마는
'어리석은 자' 올시다.
주님 힘을 주소서.
상황에 상관없는 평안함을 주시고
늘 주님만 보게 하소서.
홀로 비어 있는 듯
찾는 사람 없는 이 방처럼
아무도 '주님'찾음이 진실이지 않은 것처럼
주님을 찾는 것이 어리석은 상황인 것처럼
세상이 그리 비웃어도
주님 만을 보게 하소서.
주님 만을 참으로 바라 보게 하시고
주님 께만 말씀을 드리게 하시고
주님으로만 기뻐하게 하소서.
주님
도우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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