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존재의 이유 (욥12:4-10) 본문

구약 QT

존재의 이유 (욥12:4-10)

주하인 2008. 9. 22. 10:35

제 12 장 ( Chapter 12, Job )

 

주여

비록

가리워져 있는 듯

미약한 자이어도

그 푸른 하늘을 올려다 보고

한없이 넓어질 수 있는

영혼의 평강을 허락하소서.

 

 

 

 

 


4.  하나님께 불러 아뢰어 들으심을 입은 가 이웃에게 웃음 받는 자가 되었으니 의롭고 순전한 자가

    조롱거리가 되었구나


 

 '하나님의 불러 들으심을 입은 자.'

 '의롭고 순전한 자.'

 

   그게 '나'다..라고

욥은 분명히 인식을 하고 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웃음 받고, 조롱 거리가 되어 있는 사실이

혼란 스러운 것이다.

 

 

6.  강도의 장막은 형통하고 하나님을 진노케 하는 자가 평안하니 하나님이 그 손에 후히 주심이니라 

 보라.

강도는 잘살고

하나님을 진노케 하는 자는 평안하다고 한다.

 어딘가 모르게

비아냥 대는 느낌이 없지 않다.

 

 

9.  이것들 중에 어느 것이 여호와의 손이 이를 행하신 줄을 알지 못하랴  
 
 보라.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뜻인 줄

땅도 알고 고기도 안다고 하면서

세상의 어느 것도

 하나님의 손이 행하신 줄 다 알고 있을 것이라고

이야기 하지 않는가?

 알지는 알지만

그의 고통이 심하고

친구들의 변론이 '조롱거리'로 들릴 정도로

혼란스러우니

이리 흔들리는 것이다.

 

 

 

 오늘 역시

욥의 고통이 다가와서

어두운 분위기라

무엇을 주시려는 가

시작부터 답답하였다.

그러나,

두가지 말씀을 주시려는 것 같으시다.

 

하나는

'조롱거리'로 보이는

친구들의 나름대로의 '선의'다.

 괴로움을 겪고 있는 자에게

가장 좋은 선물은 공감과 위안이다

섣부른 지도는

또하나의 짐을 얹어 줄 뿐이다.

의인 욥도

고통 스러운데 친구들이 가르치니

오해를 한다.

얼마나 싫은지 '조롱'한다고 표현하지 않은가?
내 선의가 남에게

조롱으로 보이는 경우는

나에게는 없는가?
소발이나 엘리바스같은 자들은

자기들이 조롱하는 자로 여김을 받는지 생각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을 '선인'으로 생각하고

선인의 의무를 다하고

하나님 앞에 올바로 서 있다고 착각할 뿐이다.

언제나 되어야

늘 남 앞에서 '침묵'하고

그들이 원할 때  '공감'의 말을 해 줄 수 있고

기다리는

그 침묵의 시간 동안

그 들을 향해 '긍휼'한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
언제나 되어야........

  가만히 보면

그러한 긍휼한 기다림은

'자기 자신의 입장에 대한

올바른 자기 인식'이 있는 자야 가능할 듯하다.

늘 초조함과

무언가 해야할 듯한

안절 부절함에 있는 자들 -실은 현대인의 대 부분이 그러하겠지만...- 은

그 침묵의 시간이 끔찍한 시간이고

자신이 드러나지 못해 안절 부절 못하는 시간이 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오늘 배워야 할

또 하나는

그러한 격랑과 격한 상황 중에서도

욥이 자신을 잃지 않으려는 몸부림과

그의 바탕인 '하나님 안에서의 자기 인식'이다.

 

 아침에

폐경기에 있으신

환자 분이 2달전에 출혈이 있으셔서

자궁내막 소파술로 치료 받은 후

다시 출혈이 있으셔서 오셨다.

 토요일 받아가신 간단한 소염제로

출혈은 멈추었지만 

걱정이 많이 된다고

수심이 가득하시다.

그 분께서 다른 치료를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하시고

여쭈어 보신다.

난 설명하였다.

'검사 상 다른 이상은 없다. 

 하지만 님의 연세가

이제 폐경 주위이시고

그것은 다시 말하면

서서히 잔고장이 날 만큼 쓴 기계와 비슷하다.

그것은 다시 말하면

자주 조이고 손보고 기름을 쳐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을 '왜 자꾸이리 고장나지'하고

속상해한다는 것은

기계가 처음 상태랑 똑같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과 비슷하다.

이제 하실 일이 있다.

받아 들여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럴 때 마다 기름칠을 하러 다니시면 되는 것이다.

처음 산 기계처럼 똑같아야 한다고 속상해 만 하고

그냥 두면

그 기계는 곧 멈추어 버리지 않겠는가?

그 속상함은 또 심리적 답답함으로 오게 되고

심리적 원인이 오래 되면

영적인 문제도 가져 오게 된다

이게 전인의 원리다'

하였더니 맞다고 하시면서

얼굴이 확 펴지신다.

그러면서

당신이 좋은 약보다 훨씬 좋은 것을 깨달았다고

나가면서도 간호사에게

또한번 말씀하고 가신다.

그 분은 믿는 분이시다.

그래서 신앙에 대하여 깊은 얘기도 할 수가 있었다.

좀 여유로운 아침이다.

 

 난 부끄러움이 많은 편이다.

아닌 듯 하지만

내 속에는 깊은 부끄러움이 있다.

그것은

혼나고 자란 탓이라서

자신감이 없는 탓이다.

그래서 가능하면

앞으로 안나서려 하는 편이다.

교회에서 찬양은

주님께서 주신 달란트이고

워낙 찬양에 대한 기쁨이 큰 편이라서 이지만

그것 역시 지금처럼 여유를 찾기에

지난 2년 동안 마음고생이 많았다.

그리고

실은 내 속의 욕심은

이 부끄러움과 실패에 대한 당혹감이 크지만 않다면

훨씬 큰 무대를 바랐을 것이 틀림없다.

 그런 내가

가끔은 마음에 맞지 않는

부족한 신앙인 - 내 어리석은 판단이다.... 회개할 일..^^;;;- 들이 벌이시는

어리석은 반응 들을 보면

속이 울컥할 때가 있다.

 그게 내 삶을 참 답답하게 한다.

주님 앞에 내려 놓고

해결 받는 과정을 밟기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내 속에 이러한 부끄러움과 알지 모르는 걸림이 없었으면

얼마나 삶이 편했을까 싶다.

 욥이

하나님의 뜻이면 어떤 것이라도 가능하다고

마치 대단한 영성가처럼 이야기 하지만

한편으로

강도같은 자들은 편하고

자신처럼 온전한 삶을 추구하였던 자가 고생하는 것이

말이되냐는 항변이 숨어 있는

오늘 묵상구절을 읽으면서

그의 자신에 대한 '자신감'이 흔들림을 읽을 수가 있고

그것은

동방의 의인

동방의 부자 소리 들어가며

마음에 느껴지는 대로

많은 선행을 베풀면서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하시고

자신은 정말 '온전한 의인'임을 의심하지 않고 살던 때와 비교하여

굉장한 흔들림이 있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혼란 스러운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이러한 혼란.

자신이 어떠한 상황에서도

누구라는 것을 확실히 알지 못하면

그 삶은 당혹스러운 삶이 되고야 마는 것이다.

다행이도

욥은

마지막까지

그의 존재의 의미가 '하나님 앞에서 의인'임을 잊지 않고 있다.

믿음의 시간이 지나가면서

이러한

스스로의 '의인'의식이 어찌보면

건방진 교만이 아닐 까 생각했던 것이

실은 그렇지 않을수도 있음을 알게 되어간다.

 주님과 나만의 관계 속에서

주님이 현실감있게 다가오셔서

그를 사랑하고 있고

그를 기뻐하고 있음을 느끼게 해주면

그게 그를 '의롭다'하게 느끼게 해주고

그것은

주님 안에서 점차로 자유로움을 가져오게 되는 것이다.

세상의 누구의 소리나 질타와 상관없이

그와 주님 만이 알 수 있는

하나님의 선택 받은 자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자

성령님의 인치심을 받은 자로서의

당당한 자기 인식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자는

주님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게 되는 것이다.

 사랑을 받고

사랑을 받는 자임을 알게 된 자는

그 사랑하는 자를 위해서 모든 것을 하게 된다.

주님의 사랑을 느끼고

주님의 사랑안에서 충만하여

주님 안에서 자유를 느끼는 자는

즉,

주님으로 자기 인식이 확실하게 되어 있는 자는

흔들림이 없게 되는 것이다.

 

 아침의 환자로 오신 폐경 전후의 부인은

눈빛이 맑으셨다.

 예수님을 진심으로 기뻐하는 분이셨고

자손들이

둘 모두 신학을 하신다고 하시는 분이시고

힘드신다고

부군께서 '새벽예배'를 다니신다고 하신다.

물론

기도의 시간이 길다고

모두 선한 기독교인이라는

일차원적인 구분은 아니다.

그 분은

하나님 안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하고

그 분으로 기쁨을 알아가고 있는 분이시란 것이다.

그런 분에게

하나님 안에서

흐르는 세월 속에서

내려놓고

받아 들여야 할 자신에 대하여

슬그머니 말씀드리니

'쾅'하는 기쁨으로

눈빛이 번쩍하고 깨달으시며

정말 기뻐하시며 가셨다.

내려놓고

받아들이고...

이런 현상은

세상에 매달린 불신자나 자신을 비운다는 우상의 종교를 믿는 자들에게는

이해가 어려운 일이다.

 

 최소한 나에게

주님을 믿어가며

정말 좋은 것은

이것이다.

 

'세상 어느 것으로도 줄 수가 없는

 불가능한

 내 정체성의 흔들림 없는 기준점...!'

 

' 내 살아가야할  인생 후반의  구체적이고 확실한  목표점'

 

이것이다.

 

그분은

'욥'에게 그러하시고

수많은

진심으로 주님을 사랑하던  자들에게

확실히 목숨을 걸만한 가치로서 존재하시는 분이시다.

 

나에게도 그러하시다.

 

행운아다.

 

 

적용

 

1. 기뻐한다.

  내 부끄러움은 얼마남지 않았다.

 나이가 들어도 괜찮다.

 영원 안에서 안식할 내 운명의 시간을

 이 땅에서 하나하나 다시 익혀 갈 것이다.

 그리고는 , 천국에 갈 것이다.

 

2.  주님께 감사의 기도를 한다.

 기도원 가겠다.

 오랫동안 안갔다.

 

3.  성경 여섯 장 읽겠다.

 

4. 회개한다.

 아직도 난 화를 잘 낸다.

 회개할 일이다.

 그것도 자기인식이 부족해서 이다.

 주님 안에서 내가 어떤 사람이란 것을 확실히 하자.

 

5. 욥도 고통스럽다.

 예수님도 고통을 받으셨다.

 고통이 올 때 '가만히 있겠다.

 

6. 조롱거리에 대한 느낌은 느낌일 뿐이다.

 부끄러움도 마음의 장난일 뿐이다.

 주님 안에서 자유롭기를 원한다.

 

7. 남이 고통 받을 때는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진다.

 주님 주소서.

 비판 보다는 '긍휼한 마음' 먼저 주소서.

 

 

 

 

기도

 

주님

감사합니다.

주여

내 존재의 이유이심이기에 감사드립니다.

부끄럽고

주님 앞에 드릴 것이 하나도 없음에도

의로울 자라는 인식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기뻐하는 자라는 말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확신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님

회개합니다.

주님의 사랑에 비해

너무도 느린깨달음을 용서하시고

순간마다

옛 구습으로 눌려 있음을 용서 하소서.

도우소서.

혼자 되지 않습니다.

저로 인하여 부담을 가진 자들이 있으면

그들을 위로하시고

긍휼히 여기소서.

저도 그리하시고

제 아이들도 도우시고

제 가족을 도우시고

제 엄니 교회 끝까지 잘 나가시도록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구약 QT'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주님 앞에서의 절규(絶叫)( 욥13:22-28 )   (0) 2008.09.25
촛점( 욥13:3-10)   (0) 2008.09.24
맞긴 맞지만 (욥11:11-17 )   (0) 2008.09.20
주님 앞에서만 (욥 10:12-18 )   (0) 2008.09.19
수치심 ( 욥 9:28-34 )  (0) 2008.09.17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