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맞긴 맞지만 (욥11:11-17 ) 본문
제 11 장 ( Chapter 11, Job )
추석의
우리 고향 감리교회
불신자이던
우리 엄니
그 전날 저녁
가족 부흥회 처럼 찬양을 하니
마음이 열려서
일요일 아침 교회에 나오셨다.
주차장에 세워 놓고 내려가던
교회의 전경이
왜 이리 아름답던지..
아마도 ,
억지로 정죄하고 겁주지 않고
기다리다가
하나님 기쁨으로 충만한 찬양을 하니
마음이 열려서 나오신
엄니 탓인가부다.
오래 기다렸지만
결국은 해냈다...!
코스모스가
내 마음을 알듯이 하늘 거린다.
11. 하나님은 허망한 사람을 아시나니 악한 일은 상관치 않으시는 듯하나 다 보시느니라
맞다.
12. 허망한 사람은 지각이 없나니 그 출생함이 들나귀 새끼 같으니라
맞어
13. 만일 네가 마음을 바로 정하고 주를 향하여 손을 들 때에
14. 네 손에 죄악이 있거든 멀리 버리라 불의로 네 장막에 거하지 못하게 하라
15. 그리하면 네가 정녕 흠 없는 얼굴을 들게 되고 굳게 서서 두려움이 없으리니
16. 곧 네 환난을 잊을 것이라 네가 추억할지라도 물이 흘러감 같을 것이며
17. 네 생명의 날이 대낮보다 밝으리니 어두움이 있다 할지라도 아침과 같이 될 것이요
맞네..
'소발' - 해필이면..ㅎㅎ 닭발도 아니고..- 께서
구구 절절히 말씀하신다.
그 말씀의 언어구조가
얼마나 매끄러운지
맞다
맞네
맞어.. 할 수 밖에 없다.
가만히 그의 얼굴만을 쳐다보며
그 분의 말씀 만 들어서는
주님의 뜻에 어긋나지 않는 것 같다.
하지만
한걸음 뒤로 물러나
전체 그림을 보면
그는
심하게 힘들어 하는 '욥'에게
일장 연설을 이리도 매끄럽게 하고 있다.
안타깝다.
마치
세살 배기 어린 아이에게
'사서오경'이 어떻고
'논어' '맹자'가 어떠니 하고 강의하는
그런 분위기 아닌가?
자신은 열렬히 얘기하지만
들어줄 상황이 아닌 자 들에게..
한편의 코미디 같다.
상황이 중요하다.
상대의 처지가 중요하다.
오늘
소발이 말하는 소리가
원칙적으로 아무리 옳아도
그는 상대를 잘못 선택해서
일장연설을 하고 있다.
거기에는
그를 위한 '사랑'의 배려보다는
자신의 지식을 내세우고 싶어
열변을 토하고 있는 것 뿐이다.
따스함 보다는
차거운 정죄만 있을 뿐이다.
그 매끄러운 언사를
꿀발러 놓은 듯한 혀를 굴리며
유창하게 내려놓고 있는
그 마음에는
얼마나 큰 자기 만족이 있겠는가?
자기 만족은 '죄'다.
남을 위하고
하나님을 위한다는 명분에서 하지만
깊숙이 들여다 보면
소발은
자기 만족에서
주님 앞에 나서는 것이고
욥의 아픔을 전혀 공감해주지 못하는
냉랭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랑제로의 사람일 뿐이다.
무엇을 느끼는가?
나도
아는 체를 많이 하는 편이다.
누구에게 가르치고 싶어한다.
상황을 불문하고
내 가진 능력을 자랑하고 싶어하는 욕구가 많은 듯하다.
소발이
보이는 그런 심사가
내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는 듯하다.
특별히 그의 언사의 흐름이
매끄러운 것이
욥의 어려움과는 별개의 감정으로 느껴져
더욱 대비가 된다.
상대의 영적 육적 상황과
그의 성장을 보며
현명하게 대처해야 한다.
일률적으로 적용하여 가르치려는 것은
율법으로 빠지기 쉽상이고
자신의 자아가 드러나오는 통로일 뿐이다.
그러기에
가능하면 '말을 적게하는게 좋다'
말이 많으면 실수를 한다.
침묵은 금이다.
특히 고난을 겪는 자들은
위로를 하고 공감을 해 주어야 한다.
그것이
사랑의 실천이며
자신의 욕구를 부인하고 가라앉히는
예수님 닮아가는 길이 가까워 진다.
긍휼함과
인자함과
차분함은
그래서 일맥상통하는 분위기 이다.
적용
1. 말을 적게 한다.
2. 누구를 지도하려는 욕심을 버린다.
3. 위로하고 공감해주는 자가 된다.
4. 가르쳐야 할 때가 있다.
가르침은 주님의 뜻이기도 하다.
영적으로 위태한 자
지도하면 좋아질 자를 구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
5. 성경 여섯 장 읽겠다.
6. 자신을 낮춘다.
수도없이 되뇌여도
환경에만 들어가면 자꾸만 높아지는 교만함을 가르치소서.
기도
주님
감사합니다.
토요일입니다.
지나오던 개울물이 말라서
안타까워 하던 마음도 아시고
이리 충분한 가을 비를 뿌려주시니 감사합니다.
하지만
이 비로 더 추운 분이 있으시면 위로 하소서.
아버지
오늘 소발의 변론을 들어가면서
너무도 매끄럽고
자기 확신에 찬 소리를 들어가며
일 순 거부할 수 없으면서도
당혹스러운 묘한 감정을 금할 길이 없었습니다.
어떤 이들에게 가져다가 맞추면
정확할 것을
오늘 말씀은 왜인지 답답했었습니다.
그 이유가
욥의 형편을 고려하지 않은
소발의 냉정한 어투와 마음 탓인듯합니다.
그것은
사랑을 앞서는 공의 ..의 그것 아닌가 합니다.
주님
당신의 뜻대로 살되
당신의 본질이신 사랑을 잊지 않게 하소서 .
그 경계에서
지혜를 잊지 않게 하소서.
주여
맞긴 맞지만
그렇다고 맞지도 않은
이 어리석은 들 똑똑이 소발을 닮지 않게 하소서.
가능하면
말을 줄이게 하시고
자신을 드러나지 않도록 낮추게 하시고
겸허히 만드소서.
그 안에서
사람에 향한 타는 듯한 사랑의 열정을 허락하시고
주님의 말씀을 권고하는
강력한 용기와 의무감도 허락하소서.
말씀대로 살길 원합니다.
그리되지 못하는
이 정욕적 성질을 낮추식고
겸허히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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