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청년의 영혼을 가진(시 110:1-7) 본문
제 110 장 ( Chapter 110, Psalm )
이른 아침
서둘러서 길을가다
구석에서 피어나는
새벽이슬을
난 보았다
온 우주를 흐르시는 하나님의 영이
그 풀 숲의 생기를 기뻐하여 만들어 내신
맑디 맑은 그 결정체
나는 문득 깨달았다
수십년 전 지나간 그때가
청년기의 마지막이 아니란 걸
사모하여 올리는 두손
기쁨으로 찬송 부르는 내 입술
주님 사모하는
내 불타는 사랑의 감성이 있는
바로 지금이
내 영혼의
새로운 청년기임을
감사하고 귀하신
내 주님이
새벽이슬 같은 청년으로
날 영원히 부르실 것이
느껴지는 이 아침이다
3.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
새벽이슬.
영롱한 새벽이슬.
신선한 새벽공기와 더불어
온천지를 덮는 적당한 정도의 습기가 응결되어 이루어지는
천지의 조화를 엮으시는 성령하나님의 운행시간 표 중
가장 이른 시간에 이루어지는 대지의 눈물.
감동의 눈물.
청년
한창 새로운 희망으로 새 생기를 펼쳐내려는
인생의 절정기의 시작.
주의 청년.
주님을 경외하는 자들이
인생의 목표를 주님 안에서 발견하고
그들의 삶의 방향을
그들의 주어진 달란트에 맞추어 힘껏 시작해 나가려는 단계.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
그들이 이땅에 많아지길 소원해야 한다.
세상의 먼지로 응결되지 않은
태초와 비슷한 하나님의 영,
주님의 정기로 이루어지는 맑은 , 새벽이슬 같은
주의 사랑하는 청년들.
그들이 많아져
세상이 자꾸만 더러워져가는 만큼
비례하여 주님을 사랑하는
주님이 사랑하시는 새벽청년들이 이 세상에
더욱 늘어나길 기도해야 겠다.
그들이 세상의 혼탁으로 더러워지지 않고
더욱 하나님 앞에 정결화되어 나가길 기도해야 겠다.
해가 뜨면 사라지는 이슬 같이
하나님의 영광 앞에 자신을 불사르는
그들이 되길 기도해야겠다.
내 자식들,
특별히 그 행군 대열에 깊이 낄 수 있길 기도한다.
나.
청년의 흔적이라고는 남아 있지 않은 나이다.
그러나, 주님을 영접한 시간 부터 따지면 청년의 나이다 .^^;
늘 말씀이 나를 위해 주시는 것임을 감안할 때
'새벽이슬 같은 마음을 가지라.
새벽이슬 같은 영혼을 가지라.
청년의 영혼을 가진 주하인아.' 라 시는 것 같다.
정말 산다는 데 나이가 무슨 제한이 될까.
불신의 시절, 늘 실패자의 마음으로 체념하고 살았던
그래서 나이보다 훨 더 나이든 자의 영혼으로 살았던 내가
주님을 영접하고
말씀을 깊이 체험하면서
인생의 의미가 뚜렷해지고
고난이 꼭 고난 만이 아님을 깨달아가면서
내 육체에는 에너지가 더욱 넘치고
나.. 조금 창피한 고백이 될 수 있지만
아직 나이가 그리 들었다고 스스로 느끼질 않고 있다.
그러나, 가끔은 내 본색이라고 비아냥 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할 때,
즉 과거의 흔적이 날 사로잡으려 할 때
갑자기 , 팍.. 하고 꺼지는 듯 한 느낌이 들며
아침에 일어나기가 힘이 들고
온몸에 힘이 한톨 안남아 있는 듯하기도 하다. ㅜ.ㅜ;;
가만히 가만히 날 들여다 보니
그 이유를 깨달아 간다.
어느 때 내가 청년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던가?
' 실망할 때'다.
실망은 주로 어떠한 때던가?
'남의 비난'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남이 비판하는 것으로 생각되는 때'다.
아니, 본질적으로 보면 '내가 스스로 비난' 할 때다.
어쩌면 그것은 한국이란 특별한 유교적 의식이 남아 있는 공간에서
성장의 과정에서 남아 있는 찌기 일 수 도 있지만
'남의 시선'을 신경 쓰는 것은
내 삶의 주권을 타인에게 넘기는 것이 아니겠는가?
오랜 삶의 결과로 인하여 현재가 형성이 되어 있다.
그 현재의 삶은 주님의 말씀 안의 '그 언약' 내지 '약속'에 비추어
어느때 부족한 듯하고 잘못 되어 있는 것 같은 초조함이 올 때가 있다.
그런데 어쩌면 그것은
오랜 오랜 과거의 여파가 이루어 놓은 결과 일 수 있는 데
현재의 나는 그 과거 - 타인의 판단에 민감했던 - 의 결과물로 흔들린다는 것이
어쩌면 논리적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옥죄임이 너무도 강해 한번씩 '새벽이슬'에 먼지가 오염되어 가는 것 같이
생기는 잃어버리게 되는 듯하다.
나.
주님의 철저한 구원과 언약 속에 있는 자다.
이제 내가 신경 쓸 것은
우리가 인식하든 안하든
온 우주를 흐르는 운해의 원리 가운데 있어
새벽이 되면 맑은 이슬을 맺어내는
어찌 부인할 수 없는 그 엄청난 하나님 만 신경 쓰면 되지 않는가?
이제 내 판단의 기준을
그 분의 말씀과 성령의 운행에 맞추면 되지 않는가?
그게 주님이 진정으로 원하시는
주의 청년의 자세가 아니던가?
이제 그리되길 원한다.
매사에 흔들리고 세상의 눈치를 보는 '오염된' 모습이 아니고
오직 주님이 말씀하시고 바라시고 인도하시는 대로
나의 영의 주파수를 맞추어 사는
청년의 태도를 견지해야 한다.
그게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로서 사는 것'이고
그게 ' 죽은 자 같으나 살아 있는 자요'
그게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는 자'이고
'가난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케 하고 모든 것을 가진 자'로서
살아가는 '청년'의 모습이다.
그렇다.
나 오늘 이리 살아야 한다.
'주의 청년'들을 위하여 중보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나도 '청년'같고 '새벽이슬' 같은 자로
새로 나의 정체를 인식하고 살아가야 한다.
귀하신 주님.
감사합니다.
오늘...
시작이 노년의 근육처럼 풀어져 힘없이 시작했습니다.
이제 주님의 말씀 가운데
다시 새벽을 보게 되고
다시 청년의 힘을 얻게 됩니다.
감사합니다.
제 자식들을 기억하시고
이 땅의 정말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이 사랑하시는 청년들을 기억하소서.
그들의 아픔과 갈등을 이해하시고 기억하시고 축복하소서.
가장 선한 길로
이슬 보다 영롱한 주님의 뜻을 이루어 내게 하소서.
삶이 힘이 있게 하시고
그들의 끝도 힘이 있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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