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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의 발톱을 훔쳐보며(계22:6-21)

주하인 2006. 8. 31. 12:51

 (요한계시록22:6-22:21) 

 

 

8 이것들을 보고 들은 자는 나 요한이니 내가 듣고 볼 때에 이 일을 내게 보이던 천사의

  발 앞에 경배하려고 엎드렸더니

 

  천사의 발 앞에 무릎 꿇은 요한은 무엇을 보았을까?

정신이 없으면 보는 것도 전혀 못본 것 같을 것이지만

아마도 나중에 생각하면 천사의 발끝을 기억할 것이다.

( 설마.. !!!!  )

 

 

 그 발끝이 어찌 보였을까?

아마도 중세라는 것을 감안하면 긴 도포 같은 옷 아래로 발이 보이지는 않지 않았을까?

그 발아래 보이는 발끝은 어떤 형태이었을까?

혹시 새처럼 발굽으로 되어 있었을까?

그렇다면 발끝이 발톱이 나와서 검었을까?

상상외로 황금빛 발톱이었을까?

 그 발톱은 두렵다기 보다 온유했을 바 아름답다..라는 느낌일 터..

아니면

발이 사람 발이었을까?

사람 발이라면 신발일까?

   ( 천사가 ??? )

 

운동화일까?

게다일까?

쓰레바일까?

구두일까?

구두라면 검은색일까?

흰색 빽구두였을까?

맨발일까?

맨발이었으면 발가락은 몇개이었을까?

다섯개라면 엄지가 컸을까?

아니면 나처럼 둘째 발가락이 길었을까?

( 강아지는 귀여워도 발끝에는 병균이 득실 득실 합니다. )

 

발가락 사이에 때는 없었을까?

없었다면 잘 씻어서일까?

ㅎㅎ

 

장난기 어린 상상을 내려놓고

예수님 발과 비교하여 어땠을까?

 계 1:15)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주님은 사람과 다르다.

그래도 천사니.. 조금은 위의 상상이 가능하지 않는가?

 

하여튼 성경을 읽어가면서 장면을 상상하는 것은 묵상의 또다른 축복일 텐데...

그러면서 일반 상상과는 다른 것이

상상하면서 그러하리라 합당한듯한 장면에서는 이해하지 못할 뜨거운 감격이 인다는 것이다.

 지금...괜스리... 뜬끔없이...전신에 따스한 기운이 돌면서 눈물이 핑돌듯하다.

마치 싸우나 들어갈 때 몸이 풀어지는 듯한 나른함이 온다.

.....

 

이러한 상상하는 도중

참으로 기쁜 느낌이 든다.

마치 싸우나 들어갈 때 몸이 풀어지는 듯한..

 

천사가 어떤 모습이던

요한은 천사를 보면서 '예수님'을 느끼고 있다.

16절  나 예수는 이라는 표현을 천사가 하는 것이 신기하지 않은가?

 

이게 물질계에서 사는 우리가 영계의 신비한 일을 이해하기 어려운 것 중의 하나이다.

틀림없이 천사인데 그 입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나오고 있다.

 

이해가 안되면서 이해되는 것이 영계의 일이다.

 

 우리는 물질의 증거를 항상 보려고 하고 있다.

그러기에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대신에 황소를 섬기려는 우를 범하고 있지 않은가?

그것은 우리의 영혼 부분에 원죄로 인하여 결핍을 입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교회에서 주님의 일 대신에

눈에 보이는 실적을 위해 열심히 뛰거나

십자가의 보혈과 그 크신 예수님의 사랑을 흠모하고 닮아가기 위해 열정을 보이기 보다는

그 십자가에서 보이셨던 성경에 나온 예수님의 기적의 흔적을 사모하기만 열심이다.

 

그래서

십자가를 보면서 자식의 출세, 합격, 자신의 영달을 비는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오늘 요한 사도께서 눈으로 보이는 천사의 발을 보고 있다.

이제 그 발끝을 통하여 보여졌던 그 영적인 전율의 광경을 잊지 못하여 천사의 발끝을 형태로 만들어 놓는 우상은 범하지 않아야 겠다.

 

 

 

 

13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

14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

16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거하게 하였노라 

( 가능하다면 내 마음도 이리 빨았으면...)

 

 이제 영원의 시초이자 끝이신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천사 앞에 무릎 꿇고

비록 예수님의 흔적과 그 분의 영광을 간접적으로 보았지만

그 전율의 흔적을 간직함으로 끝나지 않고

무릎 꿇어 두 무릎에 묻고

머리 조아리느라 온 몸에 묻었던 재들을 털어내야 한다.

 

 우리의 세상은 얼마나 더러운가?

눈을 뜨고 돌아가는 일을 보면 가끔은 역겹다는 생각이 들어서 견딜수 없을 때가 있다.

 

어찌

과거에 저러한 것들에 눈을 돌리고

어찌 그것을 위하여 몸부림 쳤으며

어찌 그거 때문에 밤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던 때가 있던가... 하고 후회할 때도 있다.

아직 그러하면서도 완전히 버리지 못하는 자신이 답답할 때도 있다.

( 멋있는 것 같지만 더러우면 빨아야 한다. ㅎㅎ )

 

 이제 두루마기를 빨아야 할 다.

 

세상의 썩어질 것을 우리 영혼의 두루마기에서 털어내야 할 때이다.

가만히 앉아 더 달라고 울며 불며 몸부림 칠 때가 아니다.

이 정도면 되었지 ..하는 자위를 하며 세상에 더 나가 때를 뭍칠 때는 절대로 아니다.

 

주님의 보여주신 십자가 그 사랑의 발끝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이때에

그 발끝의 기억의 입에서 나오시는 나 예수를(16절) 잊지말라라는 이 묵상의 절규를 듣고

돌아서야 한다.

 

 주님 예수께서 그토록 바라시는 것이

그 분을 믿고 세상에 주님의 이름을 들어내는 것과 만국 끝까지 그 분의 이름을 증거하는 것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 살면서 그 분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 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보이시고 싶으신

것이다.

 

 聖化.

 

 

 

 

17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또 한번의 영계의 특징이 나온다.

갑자기 성령과 예수가 한 몸처럼 등장하여 말씀하신다.

 

 '오라

 듣는 자 오라.

 목마른 자 오라

 원하는 자 오라.

 그러면

 생명수를 한없이 줄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생명수에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무엇이 뭔지도 모른 다는 것이다.

 

이 계시록이 씌여진 이유가 이것이다.

그 분은 종말에 대하여 말씀하시며

그 분의 이 간절함을 알기를 원하신다.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신다.

그래서 끝까지 데리고 계시고 싶어하신다.

그 과정이 너무 쉽다.

알기만 하면...

이해하기만 하면..

그래서

그 분의 바램과 우리의 바램이 일치되는 한 개의 바램으로 통일만 된다면... 

 

 

 

 

20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그 분은

진실로 오실 것이다.

속히 오실 것이다.

올 때 믿으면 생명수요

믿지 않으면 파멸이다.

 

우리의 할 바는 너무나 뚜렷하다.

 

'아멘

 주님 ~~!!

 예수님 !!

 오십시오"

 

 

 

적용

 

1. 난 천사의 발톱을 형상화 시킨 것은 없는 가 돌아본다.

 

2. 진심으로 주님 예수님을 사랑하는가? 반문한다.

 

3. 그 분의 십자가가 뜨거운 보혈로 느껴지는 가?

 

4. 십자가에서 고생하신 그 분의 고통을 묵상한다.

 

 

기도

 

주님

감사합니다.

너무도 감사하신 거 너무도 당연하지만

이렇게 끝까지

우리 주님이 우리를 위해 되풀이 하시는 그 사랑에 감격합니다.

 

세상의 마지막에

새로운 천년왕국을 만드시면서도

아직도 깨이지 않고

미몽에서 헤매는 이 주모를 향하여

빨리 정신차리라.

그리하면 생명수와 함께 천국의 삶을 약속하겠다.

빨리 아멘해라..

빨리 주 예수여 오소서...하고 고백하라고 하시는 그 사랑과

그 안타까움의 절절함에 감사드리나이다.

귀하신 주님.

주님의 발끝 만 봐도 넘어가는

사도 요한 의 절절함을 느끼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님

당신 오실 그날에 까지

이 절절함이 제 절절함으로 되게 하시고

그 절절함이

그냥 묻어져 가고 우상처럼 남아가는 절절함으로 굳어져 버리지 않고

주님의 그 사랑과 그 절절한 희생을 닮아가고

그 사랑의 흔적이

우리 영혼에 하나의 틀로 남아

내 주위와 내 자신을 위해

선한 행태로 나타날 수 있도록 하여 주소서.

감사하신 하나님

귀하신 예수님의 이름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우리가 기대하는 정도가 우리가 행동하는 정도를 결정한다.

- 안드레 고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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