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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녀 딸을 향한 눈물 한방울(애2:1-10)

주하인 2009. 7. 3. 12:28

 

주님 만이 G.jpg

제 2 장 ( Chapter 2, Lamentations )

 

처녀 처럼 수줍은 풀이

내 진료실 창틀에서

맑은 하늘의 양광을 맞으며

어느새 이렇게 자라났다.

 

이들은 알까?

주님이 모든 것을 섭리하셨음을?

^^*

 

 


1.  슬프다 주께서 어찌 그리 진노하사 처녀 시온을 구름으로 덮으셨는고 이스라엘의 아름다운 것을 하늘

    에서 땅에 던지셨음이여 진노하신 날에 그 발등상을 기억지 아니하셨도다  
2.  주께서 야곱의 모든 거처를 삼키시고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셨음이여 노하사 처녀 유다의 견고한 성을

    헐어 땅에 엎으시고 나라와 방백으로 욕되게 하셨도다 
4.  원수 같이 활을 당기고 대적처럼 오른손을 들고 서서 눈에 아름다운 모든 자를 살륙하셨음이여 처녀

   시온의 장막에 노를 불처럼 쏟으셨도다  
5.  주께서 원수 같이 되어 이스라엘을 삼키셨음이여 모든 궁을 삼키셨고 견고한 성들을 훼파하사 처녀

     유다에 근심과 애통을 더하셨도다 
8.  여호와께서 처녀 시온의 성을 헐기로 결심하시고 줄을 띠고 훼파함에서 손을 거두지 아니하사 성과

    곽으로 통곡하게 하셨으매 저희가 함께 쇠하였도다  
10.  처녀 시온의 장로들이 땅에 앉아 잠잠하고 티끌을 머리에 무릅쓰고 굵은 베를 허리에 둘렀음이여

      예루살렘 처녀들은 머리를 땅에 숙였도다
  처녀.

 딸(개역 개정)

daughter (NIV)

 

 순진하고 다정한 어감이 아닌가?

오늘 묵상 구절에서 딸 (처녀)의 언급이 7번이나 되어 있다.

비록 10절의 예루살렘 '처녀'와 앞의 처녀 유다, 처녀 시온과는 다른 의미일지라도...

그럼에도 이러한 정감어린 호칭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진노는 무섭게 나온다.

그 중에서 4절을 묵상하다 보면 '하나님'으로 대표되는

활쏘고, 오른 손을 들어 서 살륙하고 계신 모진 분의 뒤에 서서

그 장면을 보면 섬뜩하기 그지 없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나 딸이란 언급이 6-7차례나 되어 있다는 말인가?
진노는 하시지만.

그 분의 가슴 속에 안타까움이 그대로 표현 되는 것은 아닌가?
내 자식.

많이 혼내고 키워서 그리 좋은 아버지로서 자신은 없지만

혼낼 때 기본 마음은 '사랑'이었다.

표현 방법이 잘못되어서 이지...

지금은 안다.

내가 얼마나 그들을 내 자식으로 사랑했었고 사랑하고 있는 지.

잘 하기를 바랬지만  그랬지 못했을 때.......

주님은 물론 나와는 다르시다.

그 혼내심의 빈도나 혼내심의 방법이나 그 강도면에서

이 상처덩어리 주모와는 너무도 다르심을 안다.

그럼에도 오늘 묵상 구절구절에 나오는 기본 정서는

'굉장한 징계'와 '두려움'이다.

 하지만, 그 분의 그 가슴속

내 가슴속의 사랑을 천배 만배 확대 시켜 짐작해본 그 분의 마음은

안타까움이시다.

 사랑을 하시기에 어쩔 수 없이 돌이키지 않고는 되지 않을 자식에게

최후의 처방을 할 수 밖에 없는 그 사랑이 보인다.

그게 '처녀', 딸... 표현이시다.

 그런의미에서 4절의 돌아 서서 활을 당기는 그 분의 뒷모습을 상상해 본다.

그러한 그 분의 등뒤에 서려 있는 것은 '눈물'일 것처럼 느껴진다.

손을 들어 치지만..

그것은 수술의 환부를 제해내는 그런 결단이고

그 손에 아파 소리지르는 자식의 상처부위를 보면서도 억지로 참는 것이다.

 등뒤에 서서 , 활을 겨누는 분의 모습을 묵상하면서

그 등뒤로 스며나오는 그 분의 그 아픔이 느껴진다.

잠시 화살을 겨누고는 뜸을 들이신다.

그 분은 한숨을 쉬신다. 

'휴.. '

그러면서 화살 시위를 놓고 만다.

아마, 앞은 보여지지 않지만

살 시위를 놓을 때마다

눈물 한 방울 씩 떨어져 내리지 않았을까 싶다.

 

 주님의 진노.

무섭다.

그분은 '사랑'이라고 만 알고 있다.

그 진노와는 양립하기 어려운 느낌으로 성경에 표해져 있다.

그럼에도 이렇게 잔인하게 보일 정도의 진노는 웬일이신가?

 죄 탓이다.

우리의 죄 탓이다.

우리의 죄가 주님나라에 합당하지 못할 정도로 커져 있을 때다.

도저히 썩어 들어가 도려낼 수 밖에 없는 환부를 지녔을 때

어쩔 수 없이 주님은 손을 드실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환부가 그리 되기 전 손을 쓰시라고?

 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자유의지와 반하는 이야기다.

 

 진노는 아주 아주 오래 참으신 후에 발하시는 주님의 특성이시다.

 

진노가 사랑으로 받아질 때는...

10절에 나오듯이

이스라엘의 처녀 들과 장로들이 고개 숙이고 회개할 때다.

주님의 사랑의 진노는 우리의 늦게나마 하는 회개를 전제로 한다.

 6번의 처녀, 딸 언급은

마지막 절 처녀와 장로의 깊은 회개가 없으면 있을 수 없다.

 주님은 회개하는 자를 기뻐하신다.

 

  어제 '해피 전도'로 요새 유명한 김한욱 목사님 교회에 다니는 친구의 요청으로

아무 생각없이 그래...라 했다가 어제 찾아간 성결대 대강당에는

 '목사님 들'만 1100여명이 모이셨다.

대 성황이다.

 아이구..

오금이 떨려오고 마음이 조려온다.

그래..

그래도 나름대로 기도도 했고

마음에 주님 만을 보고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차라

생각 보다는 그리 떨리지는 않았다.

늘, 주님 앞에 만 서려는 노력을 늦추지 않으면 체험케 하던 경험이시다.

찬양 두곡.

'주님 만이 '와 '항해자'

앵콜 곡으로 준비해간 '기적의 하나님'

 많은 갈채가 나온다.

 두곡 째 부르고 나니 시간이 없어서인지 김목사님께서 진행을 이어서 하시길래

돌아 나왔다.

무대 뒤 대기실 로 나오니 많은 사람들이 '정말 잘했다'라면서 위로하신다.

 

 묘한 마음이다.

가만히 분석을 해 보았다.

충분한 갈채를 받았고 큰 무대에 서보았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러나 웬일인가?

 조금 있다가 깨달았다.

두가 지 마음이 내게서 싸우고 있었다.

하나는 '사람들의 갈채'가 더 있었으면 하는 자아고

또 하나는 '주님의 영광'을 좀 더 드러내지 못했음에 대한 아쉬움...

 그러나, 이전 보다는 훨씬 내 자아가 줄어 들어 있기는 하나

이 오래되고 진득한 죄악은 아직도 날 많이 갉아 먹고 있다.

사람들의 칭찬에 과도히 뜨고

사람 들의 무반응에 필요 이상으로 좌절...

그래.

그럼에도 다행이다.

이런 무대 뒤의 후유증 - 대부분의 예능인 들이 겪는-이 이해는 간다.

그러나 주님 찬양을 하면서도 알면서도 올라오는

이 허전함은 경계할 일이다.

조금 조금 허용하다 보면

어느새 주님의 이름으로 내 영광을 구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어

오늘 묵상에서보는 딸 - 딸이란 애정어린 표현을 못받는 자는 버린 자다.. 그게 두렵다 - 의 입장이 될까

늘 경계하고 살아야 한다.

 오늘의 딸은 애증의 대상이다.

버리기에는 너무 아까운..

가슴아픔을 주님께 한번 더 드려서야 하는가?

사랑 받는 자는 사랑 받는 자로 취해야 할 태도가 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대로 날 맞추어 가는 것.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지 않는 것은 피하는 것,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

혹시 있을 미련한 일에 대하여 기억나게 간구하고

그 기억난 죄를 주님 앞에서 늘 회개하려는 태도.

그것만이 주님 오실 그날에

주님의 아픈 눈물을

그 분 그 귀한 분의 눈에서 흐르지 않게 하는 유일한 길이다.

 

난, 아들이긴 하지만

난 그 분의 사랑 받는 처녀 딸이고 싶다.

그 처녀 딸로서 주님의 가슴에 못질 하지 않는

순수한 처녀 딸이길 원한다.

 

 

 

적용

 

1. 주님의 슬픔을 가져오지 않는 자가 된다.

 행동을 조신하게 한다.

 가장하더라도 남을위해 나를 낮춘다.

 

2. 회개한다.

 주님이 원하시지 않을 것은 내 판단에 맞지 않는 듯해도 그냥 버린다.

 회개한다.

 

3. 성경 일곱장 읽자.

 그것이 날 구하는 유일한 끈이다.

 

 

기도

 

주님.

매일매일 주님 앞에서 죄 덩어리 올시다.

이런 나를 당신의 자손으로 삼아 주시고

사랑의 채찍을 대시면서도

딸아.,딸아.. 딸아... 하시는 그 눈물을 봅니다.

얼마나 가슴이 아프십니까?

저도 그런 불의한 자가 되어 주님 가슴에눈물 한방울 더 가하게 하는 자 되지 않도록

강력하게 잡으소서.

말씀으로 허락하신 이 깨달음

주여 성령으로 이끄셔서 이기는 하루가 되게 하소서.

회개하게하소서.

어제 아들의 고백처럼

예레미야 애가 가 슬픔이 아니고 희망이길 원합니다.

오늘 마지막 구절의 예루살렘 처녀처럼 어서어서 회개하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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