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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난( 애 3:1-18 )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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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난( 애 3:1-18 )

주하인 2009. 7. 5. 09:17

제 3 장 ( Chapter 3, Lamentations )

 

어둠 속에 있었지만

주님의 소리를 들었었습니다.

 

어둠 속에 있었지만 

난 

두팔을 들었습니다.

 

어둠 속에 있었지만

꽃을 피워냈습니다.

 

주님의 힘으로

적지만

아름다운 꽃을 피워냈습니다.

 

오직 주님의 뜻으로

생기를 피워냈습니다.

 

주여 감사합니다.

늘 주님 만을 바라는

당신의 풀꽃이길 원합니다.

 

 


1.  여호와의 노하신 매로 인하여 고난 당한 자는 내로다
   (현대어성경하나님께 벌받는다는 것, 그분께 매맞는다는 것, 그것이 무엇인지 나는 아는 사람이라오.

     NIV       :  I am the man who has seen affliction by the rod of his wrath. )

  '내'라는 예레미야의 입장이 어제까지는 3자적 입장에서

오늘은 갑자기 고난 받는 이스라엘 백성 당사자의 입장 처럼 묘사가 되어 있다.

이상하다.

그래서 현대어 성경과 NIV를 찾아 보니 각각 '아는' 과 'seen'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개역한글의 해석이 뉘앙스가 1인칭 적인데 반해

실은 그동안 문장의 흐름과 두 성경의 해석을 보면 '안다'는 3자적 입장이 맞다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민족이 겪는 고통을 자신도 알수 밖에 없다는

찢어지는 공감의 말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한 추정을 뒷받침하는 것이

'여호와의 노하신 매'로 시작하고 

18절에서는 '여호와께 대한 내 소망' 이라는 말로 끝마치는 것이 그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을 잊지 않는 자의 고백이라는 이야기다.

 어제까지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난은

그들의 주님을 잊어버린 오래된 잘못에 그 원인이 있다.

그러기에 예레미야 자신이 여호와를 떠난 자들 속에 속하여

1인칭의 '나, 내'라는 표현을 쓴다는 것은 말이 맞지 않는다.

 그렇다면 오늘 이후에 계속되는 이 엄~한 고난의 묘사는

그도 겪었었었던 심정적 고난에 대한 것일 수 밖에 없고

현재 그는 그 상황을 벗어나 있는 자로서의 그것을 이야기 하는 것일 수 밖에 없으며

선지자로서 당연하겠지만

그는 중보자로서의 터지는 사랑의 안타까운 가슴을 절규하는 것일 수 밖에 없다.

 


 
2.  나를 이끌어 흑암에 행하고 광명에 행치 않게 하셨으며 

 나.

나도 지금 이렇게 고난 중에 있지 않다.

솔직히 요사이는 늘... 내 블로그에 고백하다시피

주님과 함께 하는 자로서의 평안 가운데 거함을 솔깃이 느끼고 있는 상태이다.

그것이 어떤 축복인가를 이제야 겨우 눈치채어

그 기쁨을 안절 부절 못하고 전하고 싶어하는 상태다.

이것은 내 의지랑은 아무 상관없다.

단지 내 심성에 터져 나오는 감정적 용솟음이다.  

 그것은 다시 말하면

나는 어두운 시절을 몸서리 치게 느끼고 있다는 이야기다.

  역기능 가정에서 부정적인 사고를 가지고

많은 논리적 안되는 이유 속에서 자신을 묶어 왔던..

그러면서 나름으로 정의라고 생각되는 규제 속에서

자신의 삶을 꽁꽁 묶어와

이것도 저것도 못하는 성질 괴팍한 괴짜.

이것이 지금 돌아보면 스스로의 과거의 나에 대한  스스로의 평가다.

  그 시절.

나의 기분을 평가하라면 이렇다.

'더럽다.'

'어둡고 찝찝하다. '........다.

늘 속상하고 무언가 욕구 불만에 차 있고

가슴은 터질 것 같고 머리는 아프고

날은 밝아도 내 속은 어두웠고

별로 부러운 것도 없고

동기들의 행동이 온통 우습고 가련하고

선하게 다가오는 자들을 경계의 눈초리로 쳐다보고

성공에 대한 아무런 의미를 두지 못해

열심히 사는 자들에 대하여 마음 속으로 경멸하고 ...............


   
8.  내가 부르짖어 도움을 구하나 내 기도를 물리치시며 
 그러다 주님을 만나고 나서

생각의 기조가 반은 순간적으로 뒤바뀌어 버렸었다.

첫사랑의 시간 동안 너무 기뻐서 떠 다니면서

내 속에 한줄기 빛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주님의 강권적인 그 성령의 충만한 시간이 지나고

난 단시 현실 속으로 들어와 내 속의 어두운 부분과 부딪히기 시작했다.

 이전의 어두운 기조로 돌아가 버리면 

갈등과 어두움과 좌절과 원망과 질시가 날 사로 잡고

온 전신이 무력함으로 짖눌리는 듯했다.

 주님의 뜻으로 내 속에 빛이 강하게 비출 때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그 속은 희망으로 변하였었다.

 그 두 현상이 내 속에서 왔다 갔다 하면서

점차로 어두움은 씻겨 나가면서

말씀 앞에 묵상으로 서게 되면서 부터

내 영혼의 흐름은 맑아지게 되었다.

 하지만 지금도 질 때가 자주 있다.

그럴  때 난 몸부림을 친다.

주여.. 도우소서.

이게 주님이 나에 대하여 원하시는 뜻은 아니실 줄 압니다....라고.

그 때의 답답함은 위에 잘 묘사가 되어 있다.

내가 부르짖어 도움을 구하나 내 기도를 물리치시고

난 아직 예레미야님처럼 깊은 신심이 있는 사람이 아니다.

연단을 잘 이겨낼 수록 그 허락하신 고난도 깊어지는 법이다.

그 분은 기도를 물리치심을 알 정도로 

현재화 실제화 된 주님을 만나는 분이다.

난, 그냥 느낌으로 이해할 수 있을 정도다.

그러면서 , 주님이 응답하지 않으시고

주님이 내 영혼의 지성소에서 날 강권적으로 붙드시는

그리고 말씀으로 인도하시는 평강이 이제 더 이상 없다면

난 과연 어찌 살아야 할까... 생각하면 소름이 끼친다.

 어느 목사님이 이리 설교 하셨다.

'성령이 말씀하시는 것을 민감히 듣기 위해 죄를 짓지 않는다.'

맞다.

표현은 다르지만 그 분은 '예수께서 구하나 그 기도를 듣지 않으실까 ' 걱정하신 것이다.


  
 
14.  나는 내 모든 백성에게 조롱거리 곧 종일토록 그들의 노랫거리가 되었도다 
  아주 소수라 생각한다.

그러나 목회자나 장로..집사 들의 짓는 의도적 실수가 들려온다.

기도 만하면 되지.. 라는 생각은

그들이 앞서 나가고 주님은 뒤서게 한다는 게 기본 개념이라서 그렇다.

 프로그램을 열심히 만들고 뒤에서 기도한다.

역시 그렇지 않은가?

주님은 뒤서는 분이 아니시다.

기도하고 같이 나가는 분이다.

이 들의 기도는 들려질 것인가.. 걱정 될 때가 없지 않다.

나는 안그런가?

이런 듯 신실한 듯

블로그에서 불을 뿜듯 글을 써 내려가지만

가끔, 아니 자주

내 성품에 정말 재미있는 - 특별히 새로운 것에 어떤 때는 정신없이 빠진다. -것이라면

내 할일을 뒤로 미루고 거기에 빠져 있기를 몇날 며칠한다.

 솔직히 여행 가기 전에 나름으로는 최소한의 기도 모습을 갖추기는 했지만

밤낮을 며칠 덜 자며 그 일에 정신을 빼앗겼었다.

 

 이것은

종일토록 세상의 놀림거리가 되는 이유 중의 하나다.

 주님이 듣지 않는 기도에

들으실 거라 착각하고

하염없이 되풀이 하는 헛소리가 과연 '기도'인가?

 내 기도가 들려짐을 알고 기뻐하고

기도의 응답을 가슴 떨며 기대하고

주님의 응답의 평안을 놀라고 감탄하며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정말 올바른 인생의 여정 아닐까?

주님이 기뻐하시는 동행의 기도가 아닐까?

 

 주하인.

오늘은 주일이다.

비록 당직이라서 병원에서 예배를 들여야할 입장이지만

오늘 하루는 더 조심해야하지 않을까?

 

 
18.  스스로 이르기를 나의 힘과 여호와께 대한 내 소망이 끊어졌다 하였도다
  주님이 들어주시지 않는 무응답의 시간이야 말로

가장 무서운 시간이시다.

돈은 많아서 무엇하는가?

자식은 좋은 대학 들어가서 무엇하는가?

명예가 넘치면 또 무엇하는가?

찬양을 했다고 갈채가 많이 쏟아지면 그것은 또 무슨 의미가 있는가?
 나이들어 육신이 쇠하여

전혀 영혼의 굳은 살로 인하여

그 찬사와 번성을 누려도 느낌이 없을 시기거나

주님이 싫어하실 번성이라면 그 무슨의미가 있는가?

주님이 날 모르신다 하실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섬뜩하지 않은가?

 무서움 중에서

이제 가장 무서운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날 모른다 하실 듯한 것이다.

아무리 빌거나 기도하고

아무리 눈을 감고 묵상을 하려 해도

아무리 말씀을 들여다 보아도

주님께서 어디에도 느껴지지 않고

주님의 응답이 없는 상태야 말로

어두움 중에서도 가장 어두움이고

두려움 중에서도 가장 두려움 아니던가?

 오늘 묵상의 기자는 여호와께 대한 내 소망이 끊어졌다 라고 쓰고 있다.

앞의 모든 표현을 압축한 표현이다.

이 상태가 가장 무서운 것이다.

 난 옛 부정의 시간,

소망없는 원망의 시간으로 다시 돌아갈 까 무섭다.

주님이 답이 없는 삶은

아무리 누리고 즐기려 애를 써도

죽어가는 신경세포의 감각만 키우는 역할을 하다가

결국 시간의 흐름 속에 그마져 늙어 버리면

영혼과 육체의 괴리가 일어나

아무런 감흥도 일어나지 못하면

시간과 세상 속에 그냥 늙어 버리는 육신 속에 갇혀버리는

'방기된 고아'의 영혼이 되어 버리고 만다.

그것이야 말로

지금 세상의 모든 불신자들이 걸어가고 있는 결말이며

그것이야 말로

살아 있지만 죽은 자의 모습이요

그것이야 말로

이 땅의 지옥 아니던가?

 믿는 자라고 다 안전한가?

어차피 이 세상은 사단이 지배하는 원리가 득실 거리는 세상이다.

주님의 말씀에 단 하루라도 의도적으로나 알면서도 떨어져 있게 된다면

여지없이 원죄있는 영혼의 구멍을 통하여  사단은 작업을 하게 된다.

 시간이 지나고 어느새 돌아보면

하나님의 소리를 들을 귀가 없게 된다.

그때쯤 그들, 불신자들의 절규와 똑같은 소릴 내게 될 것이다.

비록 그들은 원인 모르고 절규하지만

이들 주님을 떠난 기독교인들은 여호와께 대한 내 소망이 끊어졌다 라고 외치게 될 것이다.

그러기 전에

주님 앞에 겸허해야 한다.

지금이라도

오늘 안식일 만이라도 주님의 뜻 앞에 귀를 기울여야한다.

 

 

기도

감사하신 하나님

귀하신 하나님

소망없을 듯

슬프기만 할 듯한 애가에서

소망을 보고 비전을 봅니다.

돌이켜 결심을 봅니다.

주여.

오늘 묵상처럼

주님 을 모르는

주님의 응답이 없는 상태가

결국 지옥의 그것임을 알수 있습니다.

상황과 아무런 상관없이

주님의 말씀 앞에 겸허하면

그때부터 그곳이 바로 천국의 시작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주여 감사합니다.

예레미야님의 그 가슴아픈 이유를 배우게 하소서.

세상의 불쌍한 종족을 위하여 가슴 아파하게 하소서.

전 안되고

전 그런 자격조차 없는 자임을 잘 알기에

이리 기도합니다.

도우소서.

오늘 주일입니다.

주의 날입니다.

주여 홀로 영광 받으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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