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착한 큰아들 믿음(롬2:17-29) 본문
제 2 장 ( Chapter 2, Romans )
山舍의 지붕
계룡산의 하늘
잡신 들의 소굴
어찌 보면
기독교 인이
터부시해야할 위험한 것들
배제해야 할 나른한 여유 들
멀리해야 할 그리운 한가로움 들이기도 하며
그것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그 속으로 들어가는
다원주의적 대타협은
더욱 더 위험하고 반드시 버려야 할 것이 틀림없지만
하나님의 하늘과
주님 만드신 대 자연을
굳게 바라볼 수 있는 믿음만 있다면
어찌 저런
불신자들의 만들어 놓음과
사단의 어지러움이 문제가 될 수 있으랴
이면적 유대인
영적인 유대인
성숙한 신앙인으로
율법과 방종 사이에서
자유로운 평강의 신앙인이 될 수 있길
간절히 바래본다
17. 유대인이라 칭하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난 영적 유대인이 맞는가?
진실한 영적 유대인던가?
24.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
혹시 나로 인하여
하나님의 이름이 세상 사람들에게 모독 받고 있지 않던가?
기독교가 아니고 X독교라는 소리가 나 때문에 나오는 것은 아니던가?
정말 그런가?
29.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이면적 유대인.
내면적으로도 성화되어가는 영적 유대인.
겉으로만 그럴 듯하며 속으로는 굳어 있는 바리새적인 유대인이 아니고
진정으로 영적으로 성숙한 유대인이 맞던가?
당직이다, 세미나다, 친구 모친의 생신을 이유로 한 모임이다 하며 연속 3회를 빠지니
'시온 성가대 ' 연습에 나가기가 쑥스럽고 신경이 쓰인다.
더구나 아내는 성가대에 들어 있지 않으니 신앙 생활을 따로 따로 하는 것 같이
물과 기름 같은 느낌도 들고 하였던 차다.
오늘은 아내의 시험기간이라서 예배드리고 급히 장소를 옮겨야 하는데
태워다 달란다.
금요일까지 잠도 못자고
어제는 응급수술이 하나 또 있어 토요일이지만 늦게 퇴근 하니
매주 토요일 7시까지 나가는 연습이 힘이 듦을 느낀다.
그러다 보니 여러 이유로 인하여
연습을 나가지 않고 급기야는 '성가대'를 더 서야 하는 흔들림 에 서 있다.
처음 성가대 들어갈 때도 이러한 사정을 이야기 하고도
입단하는 조건으로 허락받고 들어 갔지만
눈치가 보이는 것이 사실이고 나로 인하여 성가대의 분위기가 깨지는 것은 아닌지
미안하고 힘들었다.
예배 드리러 느즈막히 들어가 이층에 앉았다.
내려다 보면 성가대 석을 정면으로 바라보게 되어 있다.
어디 앉아도 마찬가지다.
성가대원들이 하나 둘씩 들어오며 착석을 한다.
그들을 보며 난 묘한 기분에 사로 잡혔다.
'베이스' 쪽 사람들이 이전의 2/3도 안된다.
난 저들 중 조금은 텃세하는 듯한 분위기의 몇 사람에 대하여
나도 모르는 반감을 가지고 있었던 게 사실이다.
까짓거 하나님 일하는 데 인간의 결점들이야 ... 하며 억지로 누르고는 있었지만
줄어드는 베이스의 인원들이 그들의 융화하지 못하는 행동이 일말의 책임이 있지 않는가 하는
묘한 쾌감이 그것이다.
'아차 했다.'
사단은 늘 그럴듯한 이유로 묘한 쾌감을 동반하며 다가온다.
그러다가 그것을 미움으로 바꾼다.
나.
하나님을 믿는 자다.
하나님을 위한 성가대라면 '레위지파'의 역할을 하고
예배를 시작하는 가장 앞에선 영적 전위대가 아니던가?
묵상으로 마음 다지면서 나는 '내 없는 성가대'의 허위를 짓뜯기에 바쁘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는 전혀 생각하지도 않고 있는 것이다.
금새 '사단'의 정체를 깨달았고
난 마음에서 급히 말씀을 '선택'함으로
그들을 내 영혼에서 조금 띄워 놓았다.
시온 성가대가 주님의 영광이 되게 해달라고 짧게 기도했다.
마음이 가라앉고 주님의 평강이 날 찾아오는 듯하다.
기쁘려 한다.
예배가 시작되고 민수기의 '발람 선지자'에 대한
명쾌하고 유쾌한 목사님의 설교가 진행이 된다.
'발람 선지자가 당나귀의 질타까지 받을 정도의 어리석은 선지자 처럼 들리지만
실상을 들여다 보라.
어디 그가 죄를 크게 저지른게 있단 말인가?
실수는 했지만 그는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하지 않았다.
오히려 모압왕의 부탁에도 불구하고 세번이나 축복했다.
그런데 왜.. 성경의 곳곳에 다섯 번씩이나 그의 이름이 신구약을 통틀어 나오는가?
그것은 그가 '선지자'라는 자격으로 그런 미련한 짓을 한 것이고
그것은 대학생 아들이 부모님 자리 비운 사이에 유치원 중학생 동생들 챙기지 않고
컴퓨터 하는 미련한 짓이랑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유치원 동생을 혼내겠는가?
대학생인 형을 혼내지 않겠는가?
구원은 누구에게나 동일하다
그러나 , 상급이 다른 이유가 그것이다'
맞다.
이면적 유대인.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일.
똑같은 일을 해도 어떤 자는 혼을 크게 나고
그 사람으로 인해 하나님이 욕을 더 먹게 되니
그는 더 큰 혼이 나게 될 수 밖에 없다.
목사님이 군목시절이시던 20년전
새로 부임한 중령을 환영하는 회식자리에서
군단장이 술을 권하는데 '집사'임을 이유로 거절하더란다.
온 부대 장교의 간담이 서늘할 일이다.
상명하복.
군대의 계율상 그러할 수 없는 일들을 다른 집사 장교들 , 심지어 장로 장교들까지
타협하고 거부하지 못하던 일을 그는 단호히 거절하더란 것이다.
두번 권유에도 하지 않자 군단장이 세번째는 명령으로 술을 먹이려 했다.
그러자 .'명령이니 받겠습니다' 면서 받아들은 술잔을
그는 머리위에 붓고 사단장에게도 술을 달라하자
분위기는 급냉되고 일찍 회식을 끝났다한다.
그 분위기는 그 만큼 살벌하고...
그 후 .......수년 후에 들은 그 분의 소식은
다른 모든 중령들은 진급에서 떨어졌지만 그 분만 진급하셨다 하며
군단장의 이야기가 ' 하나님께 저리 충성하는 장교는 전쟁에 임해서
상관의 명령에도 물불 안가리고 순종할 사람이다'라는 것이었다.
맞다.
하나님의 일에 충성하지 못하는 자가 어찌 사람일에는 그러겠는가?
그 분 군단장님도 대단하신 분이시지만
하나님 앞에 올바르게 행동하여 이름을 더럽히지 않으려는
그 분 중령님의 행동은 너무나 감동스럽다.
그러나, 모두 다 그럴수 있는가?
모두 기독교인임을 주장하며 사회에서 막상할 일을 하지 않고
교회 일에만 매달리는 사람들로 인하여 욕을 먹는 경우도 많지 않던가?
어디까지 '선'을 그어서 어떤 행동을 하는 것이
진실로 '이면적 유대인의 현명한 행동' 일까?
너무 심하게 율법을 준수하는 것은 바리새인적 기독교인의 위험성이 있는데
자유와 율법을 어디까지 선으로 지을 수 있을 것인가?
참으로 쉽지는 않은 이야기이긴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게 주님의 뜻하고 어긋나는 것은 하면 안되는 일이다.
술먹는 것.
죄는 아니다.
하지만 술을 즐기는 것은 죄다.
술을 먹는 것.
주님의 이름을 전파하기 위한 이유로 뱀같은 지혜로 적응할 수 있지만
믿는 자로서 절제 못할 술은 안된다.
하지만 모든 자에게 동일한 것은 아니다.
신앙의 연륜이 쌓일 수록 조금은 더 모범이 되어야 한다.
주님의 뜻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한다.
사도 바울도 디모데를 할례 시킨 전례가 있다.
로마인인 세상적 신분을 드러낸 경우도 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늘 생각하던 자이기에 가능하다.
'하나님의 뜻'은 어떻게 아는가?
말씀을 묵상함이 그래서 중요하다.
매일같이 묵상하고 성경을 읽어야 한다.
'큐티'라는 이름을 난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큐티라고 하면 말씀을 읽고 서로 나누는 그룹활동 정도로 이해되는게 정말 싫다.
우리는 매일 말씀 묵상을 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의 내면이 밝아지고 성찰이 된다.
어두움이 쫓겨나가고 그 자리에 성령이 새살을 차오르게 하신다.
나.
아침에 묵상구절을 읽기라도 하고 나갔다.
그러니 내 속의 구렁이처럼 웅그리고 있던 '시온성가대'에 대한
묘한 부정적 생각들을 들여다 볼 수 있고 깨달을 수 있었다.
물론 온전히 회복되지 못했다.
개중 아직 속이 편해보이지 않는 분들이 몇 있다.
그래도 미워하지 않는다.
버거울 뿐이지.
그럼에도 진실로 주님의 이면적 유대인이 되려면
난 그 부분 마져 온전히 주님의 빛 가운데서 말려야 할 것이다.
나.
그게 가능하리라 생각한다.
곧.........
주님의 말씀이 있으시기에.................
기도
주님
이면적 유대인
내면과 외면이 일치된 통합적 기독교인.
당신 하나님께서 진실로 사랑할 만한 자격이 있는 착한 큰아들 기독교인이 되기 위해
저 오늘도 이리 간구합니다.
주님.
오래된 내 생각의 왜곡들은
괜한 어두움의 생각들로 사로잡히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묘한 쾌감.
어두운 느낌.
주님의 교회에서도 이러고 있습니다.
고백합니다.
저를 용서하시고
주님의 뜻 안에서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만을 맺을 수 있게 하여 주세요.
그래서 영적으로 성숙한 당신의 자녀로 거듭 성화되게 하여 주소서.
미운사람 없게 하시고
사랑이 넘치게 하시고
나를 탐탁해 하지 않는 자들이 혹 있더라도 주님의 이름으로 받아들이게 하시고
그런 나를 스스로 대견케 생각게 하시고
주님의 기쁨을 누리게 하소서.
주님의 사랑과
당신의 평화 만이
내 사는 유일한 에너지의 원천이자 이유가 되게 하소서.
주님의 뜻 가운데 나를 열어 놓습니다.
주여
오실 때 칭찬 받을 자 되게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받들어 감사하며 기도하였습니다.
아멘
'신약 QT'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주님의 탓에( 롬 3:21- 31) (0) | 2010.07.06 |
---|---|
원리 가운데 흐르게 하소서 (롬3:1-20 ) (0) | 2010.07.05 |
판단과 영생 (롬 2:1-18 ) (0) | 2010.07.03 |
진리가 막히지 않기 위해 ( 롬1:18-32 ) (0) | 2010.07.02 |
예수그리스도의 것 세상의 것 (롬 1:1-17) (0) | 2010.07.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