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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단과 영생 (롬 2:1-18 )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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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단과 영생 (롬 2:1-18 )

주하인 2010. 7. 3. 12:33

제 2 장 ( Chapter 2, Romans )

 

판단은 이럴 때만 하는 것이지요 ^^*

정당한 판정자에 의한

누구도 침범하지 못할

판정 !

 


1.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판단.

판단은 남에 대한 판단도 있지만

자신에 대한 판단도 있을 수 있다.

그게 무엇이든 옳지 않다.

오늘 로마서 구절 뿐 아니라 성경에는 곳곳에 나온다.

'너희나 다른 자들에게 판단 받는 것이 나에게는 아무것도 아니니

 나도 나를 판단치 않는다'고도 나온다.

 

 이 판단.

자신이 주인이 되어 세상을 정죄하고 자신을 정죄함은

얼마나 타인 뿐 아니라 자신에게 상처가 되고 아픈지 모른다.

이 말로 주는 아픔은

때로는 칼로 찌르는 것보다 더한 아픔이 되어

상처 받은 자들의 고통이 평생을 그 사람을 지배하여

그 인생을 불행하게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사단은 말을 통해 들어온다.

저주의 말,

아픔의 말,

어두운 말... 

 
  
  
5.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오늘 묵상 중에는

이 판단의 말,

판단의 생각 들을 심히 경계하신다.

판단이란 단어가 수 차례나 되풀이 하며

그 판단을 회개치 않고 멈추지 않는 자들에 대하여

주님께서 오실 그날에

그들을 판단해서 그들에게 진노를 내리실 것이라 하신다.

 그렇다.

판단 하는 것은 당장은 아닐지라도

그것은 주님으로 인하여 '진노'를 발하시게 하는

나쁜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 판단은 어떠한 사람들이 잘하는 가?

일단 아픔을 겪은 사람들이다.

생각이 많은 사람들이다.

어렸을 적 부터 좌절을 겪은 자들이 그렇다.

마땅히 받아야할 '사랑의 탱크'가 비어 있기에 그렇다.

 

 며칠전 환우가 아이를 데리고 내원하였다.

조금 지적으로 부족한 분.

며칠전 원치 않는 시술을 개인병원에서 받고

지속적으로 배가 아프다고 호소하며 오셨던 분으로

아이는 돌이 채 안된 아이였는데

아이는 너무 이쁘게 생겼다.

그런데 그 아이가 울지를 않는다.

눈을 마주치면 방긋 방긋 웃는데

그 웃음이 너무 이쁘게 느껴지면서

나로 하여금 이해할 수 없는 불쌍함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웃음이 슬픔으로 느껴지는 아이는 처음이다.

내 영혼 한구석에서 슬픔 같은 것이 밀려와 환우와 대화하다 말고

아이를 뺏아 안아 내 무릎에 받아 들었다.

아이는 계속 내 눈을 쳐다보며 방긋 방긋 웃기만 하는 데

절대로 울지를 않는다.

 그리 보아서 그런가?

환자 분은 지적으로 떨어지기에 아이는

자신이 받을 사랑의 분량을 '나'를 통하여 채우려는 듯

계속 눈을 맞추고 나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면서 방긋거리는 것이다.

진료를 하고도 한참이나 아기를 안고

그 환우 분이 내과적 질환은 없는 지 협진을 유도하고서도

한참을 들여다 보았다 .

가슴이 이상하게 아팠다.

잠시 나마 난 그 아이가 받지 못했을 '사랑'의 탱크를 채워주고 싶은 욕구 이었을지 모른다.

 

 그렇다.

사람은 누구나 채워져야 할 사랑의 저장고가 있다.

그 저장고를 채워줄 역할을 하는 것이 가까운 의미있는 타인이다.

부모, 형제, 스승, 친구도 그 하나다.

이 저장고를 채우지 못한 자들,

혹여 진실의 사랑을 채우지 못하고 거짓대상에서 갈구하는 자들은

중독이나 외로움에 유사한 다른 대상으로 채우려 한다.

약물, 술, 섹스.......

그리고 그들의 가슴에는 '자신을 비하'하거나 '타인에 대한 손가락질'로

자신의 비어있는 가슴을 안정화 시키려 한다.

자신을 낮춤으로 비어있는 부분을 줄이려거나

타인을 낮추어 자신의 비어 있는 부분이 상대적으로 덜 한 것처럼 느끼려는 것이다.

 이게 '판단'이라는 표현으로 나오는 것이다.

 

판단을 잘하는 자들은

바꾸어 말하면 '교만'한 자이기도 하며 동시에 '열등감'이 심한 자들이다.

둘 모두 극과 극이지만 서로 통한다.

사랑이 부족한 자들이다.

이 부족함은 늘 채우려 한다.

채우려 하면 할 수록 그 공허는 더욱 커져 가게 된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 수록 커진 부분은 더욱 비어지게 된다.

나이 든다는 것은 더욱 필요가 많아진다는 것이고

필요가 많은 반면 채워짐은 한계가 있고

육신적으로 심리적으로 약해져 가기에 비어져 가는 속도는 더욱 커져 간다.

그러기에 그 들 판단하는 자들에게는

평화가 있을 수 없다.

그들의 결국은 우울증 내지 극단의 선택을 하기도 한다.

 최근의 유명 연예인들의 자살은

판단의 극단적 결과 중 하나가 아닐까?

 
  
 
7.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당연히 판단을 멈추어야 한다.

안되는 데 어찌 멈추는가?

사랑의 빈 것을 채워야 한다.

어떻게 채우는가?

세상은 달라고만 하지 새롭게 채울 수가 없다.

 

 이런 것이다.

사랑의 빈 탱크를 채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의 사랑' 뿐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체험해야 한다.

그게 머리속의 생각처럼 보이는가?

아니다.

그 분은 사신 분이시다.

그 분은 사랑의 아버지시다.

말씀을 묵상하고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주님의 말씀이시니 준행하려는 결심이다.

주님의 평강이 우리를 채우시고

그 평강이 좋아 점차로 인내하게 되는 것이다.

주님의 어루만지심이 사모되어 참게 되는 것이다.

 

참고 선을 행한다 한다.

선을 행한다는 것은 행실을 바꾼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위에서 고백한 대로 그 사랑을 체험한 자들은

기쁨으로 자신도 모르게 그 분의 말씀하신대로 따르게 된다.

단지 우리가 해야 할 것은

그 분의 사랑의 기쁨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과

조금 더 준행하려는 결심뿐이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다.

주님을 위해서다.

그 분은 나에게 사랑을 주시는 귀한 분이시기에

그 분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하여 하나님의 사람으로 서 이름을 걸고 조심하는 것이다.

행여 습관적으로 판단을 해왔던 자들이라면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자신도 모르게 조금씩 조금씩 조심하게 되는 것이다.

 

오늘 ,

판단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나, 주하인

오늘 무슨 판단할 일이 주어질지 모르지만

주님은 미리 나에게 조심하실 것을 권고하시는 것이고

깨우쳐 주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국은 '영생'이라 하신다.

 

 영원히 산다는 것.

영생.

언제부터인가 이 단어에 대하여 희망이 소록소록 솟아남을 느끼면서도

그 정체가 짐작이 잘 안갔다.

만일, 내가 이 지구 위에 사는 대로

영원히 죽지않고 끝까지 이어진다면 그것이야 말로 소름끼치는 일이 아닌가 싶기도해서다.

천국이 이처럼 고뇌스럽고 외롭고 자책이 되는 나라라면....................이구.......

 그것을 아시는지

지난 주일 예배에 '목사님께서 설교를 하실 때 '영생'에 대하여

극명하게 정리 해주셨다.

'고민이 없고

 지금 이 땅의 갈등이 없고

 영원히 예수님 근처에서 사는 것.'

그러면서 천국 뿐 아니라 이 땅에 살면서도 가능한 삶.'이라고......

그렇다고 가슴이 팍 쳐지는 것을 느꼈다.

그것을 난 이해하지 않으려 했다.

내 고민이 없는 적이 없이 살아왔기에

고민이나 갈등이 없는 상황에 대하여 상상을 못해 왔을 뿐이다.

그러나 , 예수님의 성령이 내 안에 임하시면 느끼는 그 놀라운 임재의 평안함이

영원히 존재한다면 그것이 영생이 아니겠는가?

 

판단,

악한 생각들.

자신을 낮추고 타인을 헤집는 것.

그래서 악한 쾌감을 소유하려는 개념.

 

이것이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과 같이 살면서

과연 합당한 감정이고 생각이던가?
아니다.

전혀 안그렇다.

그러기에 나는 판단을 멈추어야 한다.

판단을 많이 멈추었다.

제동도 걸수 있다.

 나도 모르게 올라오는 어이없는 자들에 대한 미운 생각들을

많이 정지시켰다.

그것은 기도로 그랬다.

말씀 가운데 올려 드리니 주님이 알아서 감퇴 시켰다.

그들 앞에서 더욱 자연스레이 행동했다.

아무 일도 없는 것 처럼...

그런 내 자신을 이중적으로 보지 않고 사랑스럽게 보는 눈이 늘어났다.

다만, 아직 내 자신, 그런 노력을 해야지만 되어간다.

이제 더욱 더 습관적으로 자연스럽게 자동적으로 그리되면

그것이 영생에 들어갈 준비가 되어진 증거일 것이다.

 판단을 멈춤은

'잠26:2) 까닭 없는 저주는 참새의 떠도는 것과 제비의 날아가는 것같이 이르지 아니 하느니라 ' 같은

말씀들이 더 이해가 되는 까닭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보다 더

기도하고 말씀 묵상할 때마다 느껴져오는

아이를 안고 쳐다보는 내 눈길 같은

아니

그보다 훨씬 크고 강력한 하나님의 사랑의 눈길이 이해가 되어감이다.

날 쳐다보시는 그 사랑의 눈 말이다.

 

감사하다.

오늘 하루 .

묵상을 통해 놀랍고 경이로운 깨달음은 없을 지라도

오늘 내가 붙들고 살아가야할 '판단' 에 대하여 다시금 깨닫게 하여 주심이다.

 

 

기도

 

주님

귀하신 주님

자꾸만 걸려오는 부분들.

내 삶을 통하여 습관적으로 되풀이 되며 훈련해왔던 부분들입니다.

그것으로 그리 큰 실수는 자제할 수 있었고

실패는 적었지만

그로 인하여 내 속에 쌓아진 죄악은 오히려 얼마나 컸던지요?

그것은 내 삶의 과정이 그리 쉽지 않았던 이유이기도 함을

주님께서 불쌍히 여기셔서

이제 저로 깨닫게 해 주신 이유이기도 하다 생각됩니다.

사랑합니다. 주여

절 사랑하셔서 십자가에 까지 당신을 못박으신

주님의 사랑에는 어찌 견주겠습니까만

닮아가려 노력하겠습니다.

당신의 사랑으로 만든 제 이웃들을

더욱 넓은 사랑의 시선으로 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제 안에서 판단을 버리려 노력하겠스니다.

주님이 그러시니 그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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