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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주인의 눈으로(막14:12~21) 본문

신약 QT

집 주인의 눈으로(막14:12~21)

주하인 2007. 3. 30. 09:35

2007-03-30 마가복음 (Mark) 14:12~14:21


 

12. 무교절의 첫날 곧 유월절 양 잡는 날에 제자들이 예수께 여짜오되 우리가 어디로 가서 선생님으로

     유월절을 잡수시게 예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하매  
13. 예수께서 제자 중에 둘을 보내시며 가라사대 성내로 들어가라 그리하면 물 한 동이를 가지고가는

     사람을 만나리니 를 따라가서  
14. 어디든지 그의 들어가는 그 집 주인에게 이르되 선생님의 말씀이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먹을 나의 객실이 어디 있느뇨 하시더라 하라  
15. 그리하면 자리를 베풀고 예비된 큰 다락방을 보이리니 거기서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라 하신대  
18.  다 앉아 먹을 때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한 사람 곧나와

     함께 먹는 자가 나를 팔리라 하신대  
19. 저희가 근심하여 하나씩 하나씩 여짜오되 내니이까  

 

 ( 만남은 헤어짐을 전제로 하는 것...)

 

  오늘 장면을 보면 마치 약속이 되어 있었던 듯하게 일이 진행되는 것을 볼 수 있다.

해설에도 물동이 들고 가는게 여자가 아니고 남자임을 들어 그렇다고 단정적으로 되어 있다.

굵게 표시한 부분 - 묵상하다가 눈에 들어오는 부분을 난 그렇게 표시한다.- 을 들어보아도 착 드는 느낌이 서로 약속이 되어 있는, 그래서 주님께서 오늘의 마지막 ceremomy가 슬픈 이별을 약속하는 비장한 모임일 듯한 느낌을 금할 수 없게 된다. 

 

 하지만, 현대의 지금 많은 교회에서 시도되는 것과 유사하게 각종 프로그램과 이벤트로 사람을 모으고

그 가운데서 감성을 자극하여 예수님 영접할 기회를 늘리려는 다소 인본 주의적 방법 같이 - 나쁘다는 얘기는 아니다.   아쉽다는 얘기다.- 주님도 그러한 방법의 예식을 통하여 당신의 뜻을 전하려 했다고 성경을 우리의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 자체가 웬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얘기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상 사람과는 다르다.

그 분은 영적인 분이시고, 신비로운 분이시다.

그 분은 무한하신 능력의 소유자이시고

우리 각 개인을 다루시는 방법도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개성을 가지시고 다루시는 분이시다.

내가 여기까지 온 것도 기적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의 만남도 주님의 초월적 능력의 일부분이라고 생각하는 게 너무도 자연스럽다.

이론적으로 보아도 상의된 만남으로 보는 것은 맹점(盲点)이 많다.

 

 우선 이렇다.

예수님은 계속 제자들과 붙어 다니셨다.

떨어질 때는 기도하러 산속에 계실 때 뿐이었다.

그러기에 제자들 몰래 이벤트를 만들기 위해 비밀 첩자(?)를 물동이 든 남자에게 보냈을 가능성은 너무도 낮다.

(상황에 맞지 않는 행동은 코미디 같다 ~~)

 

설령 그래도 그 시간에 맞추어 정확히 만나기에는 그 당시의 시계가 정확했을까?ㅎㅎ

그리고 만나려고 해도 하필이면 접선하는 상대가 물동이든 남자일까?

시대에 맞지 않는 캐릭터를 하나 설정해서 그 시간에 정확히 만나게 하는 것은 첩보영화 시나리오라고 해도 너무 코메디같다.

 

 약속된 이벤트로 추정하는 데는 '나의 객실'이라는 표현이 강하게 작용한 듯 싶다.

마치 호텔 로비에 들어가서 '체크인'하고 안내 받는 듯한 필링.

그러나, 이것이 약속된 모습이 아니라고 생각하는게 은혜의 부분이다.

 아마도 그 주인에게 꿈에 어쩌면 이런 계시가 나왔을 줄 모른다.

휘황찬란한 빛에 둘러쌓인 신비한 분이 꿈에 나타나서

' 얘야.

 유월절 첫날에 너에게 귀인이 몇 올 것이다.

 너는 그들을 최대한 정숙하게 접대해야 한다.

 그분은 세상이 감당할 수 있는 분이 아니다.

 그들이 올 때 너에게 이럴 것이다.

 '나의 객실을 다오'

 그러면 너는 가장 넓은 다락방을 주어야 한다.

 열 세명이 넉넉히 앉을 방 말이다.

  ...............................  '

 참으로 희한한 느낌으로 있던 그날.

그들이 어김없이 나타나 '나의 객실'을 달라고 하시는 분의 심부름으로 왔음을 밝히자

전율을 금치 못하고 있는 그 주인은

서슴없이 '그의 객실'을 내어 주었을 것이다.

 이러한 추정은 예수님이 예루살렘 입성 때 나귀 달라고 하신 그 사건과도 비슷하게 진행이 되지 않는가?

더구나, 예수님은 서두에도 언급하였고 너무도 당연하게 신이시다.

그분에게 이러한 일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다.

 

 또, 미리 말했듯이 물동이를 든 남자를 만나게 한 것이 하나님의 간섭에 의한 만남인 것은 논리 전개했지만 그 남자 역시 참으로 재미있는 상상이 가능하다.

 예수님을 만나기 위한 '공처가'이던가

아니면 그날 따라 유난히도 물동이를 들고 물을 뜨고 싶은 충동이 마음속에 일어나서 견디지 못하고 뛰쳐 일어나 제자들이 나타날 즈음에 물을 뜨러 가게 되었을 지도 모른다.

아마 그렇다면 그는 객잔에서 나무를 패는 일을 하다가 갑자기 무언가 잊었던 것이 생각난 것처럼 불현듯 물동이 생각이 났을 것이다.

그리고 나서는 갈등이 시작이 되었을 것이다.

'아냐, 이건 남자가 할 일이 아니잖아? 

 사람들이 내 모습 보면 뭐라 하겠어?

 아... 그렇지만 견딜 수 없이 물 뜨러 가고 싶다.

 물이라도 떠다 놓으면 아내가 날 귀하다 하지 않을까?

 그래도 딴 사람들 하지 않는 거 하면 왕따 당하지 않을까?

 아냐

 깨인 자 앞선자라 할지도 몰라............................................................

 에라~~

 물동이 어딨어~~ 그냥 나가 면 되지 뭐 ~'

하면서  급히 뭐에 쫓긴 듯 강력한 Drive 걸려서 물동이를 지고 나갔을 줄 모른다.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쫓김에 의해

제자들이 나타나 자신을 쫓아오는 그 시점까지 물을 지고 허겁지겁 들고 들어올 때까지 그 쫓김이 그를 몰고 갔을 줄도 모른다.

그리고는 물을 내려 놓고서야 자신이 무슨 일을 했는지 왜 그런지 모르고 어리둥절 했을 지도 모른다.

 

어찌 되었던 간에 이런 우연과 구분되지 못하고

어딘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을 통하여

드물지만 주님께서 역사에 직접 간섭하시는 그 순간일 수도 있다.

오늘은 특별히 예수님 십자가 달리시기 전 마지막 유월절 만찬이 베풀어져야할 귀한 시간이 아닌가?

(그냥 두면 이건 의자이지만 예수님이 앉으셨더면 보물이 된다.)

 

 

이 귀중한 사건이

집 주인이나 물동이를 진 남자가 비록 12제자에게 포함되어 있지는 않지만 의미있는 시간이 되려면

그 자신에게 벌어진 이러한 사건 , 즉 집 주인에게 예수님을 자신의 집 다락방에 모신 사건과 물동이 남자는 자신을 통하여 예수님을 인도하게 된 매개체가 된 이 사건은 예수님의 존재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얼마나 엄청난 일이 될 것인가? 

상상을 하다보니 주막주인의 눈 앞에서 열두제자 데리고 엘리베이터 타시는 예수님을 발칙하게도 연상하게 되었습니다.

(비록 장난스러운 상상이엇지만

 스치고 지나는 느낌은 범상치 않았습니다.

 주님의 풍기시는 카리스마는 대단했습니다.

 은혜 그자체였습니다.

 주님은 날 안보시는 듯 했지만 난 알 수 있었습니다.

 주님을 가슴으로 기뻐하면 돌아보실 것 같은 그 느낌을 요.

 그 분은 나의 믿음과 갈구에 따라 더 깊은 사랑을 퍼부을 것 같았습니다.

 아니 그런 씨스템이 오토매틱이 된 것 같습니다. )

 

그것은 인류사에 획을 긋는 '십자가' 사건을 위해 인류사에 정말 자제하시며 간섭을 하지 않으시던 그 하나님께서 직접 간섭하시는 몇 안되는 일 중의 하나가 아닌가?

그렇다면 그 간섭하시는 간섭에 간섭을 당하는 자의 입장이 예수님을 믿는 자라면 그 시간이야 말로 주님과 자신 만의 '카이로스'시간이고  그 중에서도 엄청난 시간임을 알 수가 있을 것이다.

 

그 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감사하고 자신이 그리 쓰였음을 느낀다면 두 사람 - 한사람인가? - 의 이 사건 이후의 삶의 행태가 완전히 바뀌었을 것이다.

 상상을 해본다.

나에게 직접 예수께서 나타나셔서 내 집에서 밥을 드시는 것을 목격할 수 있다면 나에게 어떤 변화가 있을것인가?

 믿음의 대 변화와 전율... 이런 것을 떠나서라도

예수 사마께서 드신 곳이라고 명패를 붙혀놓고

'세상에 이런 일이'라는 프로그램에 전화를 해서 취재 부탁하고

드나드는 사람들에게 입장료 천원씩 만 받아도 되는 그야말로 대단한 일이 되지 않겠는가?ㅎㅎㅎ

 

각설하고

이 카이로스의 시간을 맞기 위하여 난 집주인 처럼 늘 예비하고 사는 삶을 살고 있는가?

주님께서 우리가 상상치 못할 시간에 쓰시려고 나에게 어떠한 명령을 해 오실 때에 그 집 주인처럼 금방 순종할 마음은 있는가?

실제로 '예비된 다락방'을 예비하고 있는가?

내 삶은 그냥 뜬구름 잡고 흉내만 내는 실속없는 자는 아니지 않는가?

주님이 오실 때 내 서있는 카운터 앞을 지나는 그 분을 알 수 있는 마음의 여지는 있던가?

그리고 그 분이 다락방에서 식사할 때 최선을 다하여 떨리는 마음으로 음식을 접대할 수 있는가?

그 분이 회의를 하실 때 문 닫고 밖에 서 있는 내 모습은 어떤가?

계속 그 방을 올려다 보고 있을까?

세상 손님을 받으려고 세상에 한눈을 팔게 될까?

그분이 나가신 후 남은 자리에 그 분의 숟가락과 접시는 쳐다보는 마음은 또 어떨까?

그냥 스치고 지나가며 없어지는 손님의 기억일까?

아니면 그 분을 영원히 기억하고 날마다 때마다 예수님의 오셨던 그 감격의 순간을 잊지 못하고 사모하고 있는자가 될까?

남들에게 예수님의 열두제자와 오셨던 이야기를 감동으로 전하며 그들에게 선한 영향을 끼칠 수 있을까?

내 객실이 예수님의 객실이 될 수 있도록 마음은 열려 있는가?

일상에서 어떠한 노력을 하고 있는가?

 그분이 내 안에서 내가 그 안에서 먹기 위하여 그 분을 진심으로 감사하고 받아 들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난 그런가?

언제나 난 깨어 있을 수 있나?

주님이 제자를 보내어 물어왔듯이 거지를 가장한 자들이 나에게 물을 때도 눈을 크게 뜨고 언제까지 지켜볼 수 있을까?

 물동이 들고 나가는 사람같이 어이없어도 주님의 말씀을 들으려면 어떠한 자기 부인도 가능할 수 있을까?

...........................

 

 주님은 완전하시다.

전혀 우리의 예상과는 상관없이 우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분은 당신의 완전한 계획 속에 우리를 들어 앉히시고 역할을 감당하게 하신다.

얼마나 세심하신지 얼마나 사랑이 많으신지 모르시는 분이시다.

하나도 그분의 시간에 어긋남이 없다.

약속이 되어 있지 않지만

그 시간에 나귀를 준비하고 기다리는 자가 되어 있고

각본은 없지만 코믹한 남자가 물동이 들고 들어가며

가서 달라고 하면 기다렸다는 듯이 방을 줄 사람이 기다리고 있고

그렇게도 권유하지만 십자가 사건에 한치도 오차가 없이 참여하는 '유다' 열쇠가 있지 않은가?

그 분은 '다 앉아 먹을 때'까지 전혀 배반에 대한 말씀을 하지 않으신다.

이름도 거론치 않으시고 ..

이렇게 배려하시고 이렇게 완벽하신 분이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니까?'라고 묻는 신앙 태도는 갖추어 졌는가?

늘 반성하고 회개할 부분이다.

 

 

 

적용

 

1. 오늘 스치고 지나실 분들에게 최선을 다한다.

 

2. 최대한 공손한 태도로 대하겠다.

 

3. 성경을 읽겠다.

 

4. 누구라도 대접할 기회가 되면 최선을 다하여 남들을 모시겠다.

 

5. 물동이 멜 일이 생기면 매겠다.

   희한한 일이라도 오늘은 혹시 있으면 순종한다.

  그리고 주님의 일인지 깊이 묵상한다. ㅎㅎ

 

 

기도

 

 주님.

오늘은 물동이 메는 남자와 집주인의 입장이 되보았습니다.

그들의 일상에서 스치고 지나갈 수 밖에 없는 일이

주님을 인식하기만 하면 '카이로스'의 시간이 되는 그런 것입니다.

이제 주여.

당신께서 허락하신 그 귀한 시간을

헛된 나의 교만이나

급한 성격으로 인하여 스치고 지나지 않게 하소서.

늘 깨어 있어 주님을 느끼길 원합니다.

내 전 삶이 변할 수 있는 카이로스의 시간이 될 수 있도록 늘 주님을 생각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예수님 도우소서.

성령님 도우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마가 다락방이라고 전제하지 않은 상태에서의 묵상입니다.

   하루하루 개인적으로 주시는 묵상이시기에 가능합니다.

   신학적 논쟁은 사절.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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