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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3 시절(막14:22~31) 본문

신약 QT

고3 시절(막14:22~31)

주하인 2007. 3. 31. 09:14

2007-03-31 마가복음 (Mark) 14:22~14:31

 

22.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받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23.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니 다 이를 마시매  
24. 가라사대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25.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하나님 나라에서 새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26. 이에 저희가 찬미하고 감람산으로 나가니라
27.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이는 기록된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28.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29. 베드로가 여짜오되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렇지 않겠나이다
30.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이 밤 닭이 두번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
31. 베드로가 힘있게 말하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하니라
 다락방 만찬이 한참 진행 중(먹을 때)에 예수님께서 떡을 받으시고 감사기도 하신 후 특별한 말씀을 하신다.

 " 받으라. 이것이 내 몸이다"

 사람들은 이상한 말씀을 하시는 데도 별 반응이 없다.

아마도 식사하며 하는 교제 시간이라서 마음이 들떠서 인듯 싶다.

다시 잔을 받으시고 사례하신다음

" 많은 사람 때문에 흘리는 내 피다.

  이것은 언약의 피다.

 진실로 말하는데 하나님 나라에서 새로 마실 때까지는 다신 마시지 않겠다."

이런 유명한 장면을 연상하며 항상 이상한 느낌을 얻는다.

 

 주님은 심란한 말씀을 하시는데 어찌되어서 제자들은 심드렁한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무반응이다.

그 증거가 26절 ' 이에 저희가 찬미하고'라고 되어 있지 않은가?

찬송을 노래한다라고 영어 성경에 되어 있다.

좀 숙연하고

습관적으로 나마 어른에 대하여 존경하고..라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그냥 분위기가 자연스럽고 교제를 마친 후 찬양 부르고 일어서는 그런 모습이다.

 

 예수님의 말씀이 외면 당하는 느낌이다.

그것은 두 가지 중 하나이다.

예수님의 말씀이 너무 고차원 적이라서 그 많은 비유에 또하나 비유가 겹쳐졌기에 무식한 자들의 특성이 그렇듯 못 알아듯고 사람좋은 웃음으로 교제를 해나간 탓일 가능성이 많고,

또하나는 정말 자신 들에게 버거운 말씀을 의도적으로 못들은 척 하는 가능성이다.

 원인이 무엇이든 주님의 말씀은 무시된 듯 묻혀 버리고 - 그 무서운 얘기가, 그 어려울 혼란의 시기에 주님은 더욱 외로우셨을 것이다.  - 감람산을 향하여 간다.

 

 가시는 노중에서도 주님은 계속 말씀하신다.

" 너희는 날 다 배반할 것이다.

  난 죽었다 다시 살아날 것이다."

(고양이도 불끈 주먹은 쥘 수 있네요. ㅎㅎ)

 

 

 그제야 자기들과 관여가 된 말에 제자들이 반응을 보인다.

철저하게 이기주의 같은 느낌이 든다.

'아니요.   난 안그럴 것입니다.'

특별히 베드로는 강한 말로서 '힘있게 말하되'

" 내가 죽을 지언정 주님과 함께 죽겠습니다 "

아마도 이 때의 표정은 이랬을 것 같다.

한 손을 들어서 주먹을 불끈쥐며 다짐을 했을 것이다.

눈은 최대한 크게 올렸을 것이다.

눈꼬리를 올리고 입은 굳게 다물었을 것이다.

그러면서 순간 자신의 이미지를 상상했을 것이다.

지구를 지키는 독수리 오형제의 대장 !ㅎㅎ

그러자 감동하는 제자들의 똑같은 대답 .

아마 그들은 오랫만의 듬직한 회식과 감미로운 찬양 후에 리더인 형님 베드로의 멋진 모습을 보며

스스로 감동을 하고 있었을 줄 모른다.

자신들의 답이 멋진 남자들의 당연히 해야할 의리의 사수라고 막연히 생각하며 예수님의 말씀을 깊이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이없는 반응 아닌가?

주님께서는 계속적으로 곧 있을 일에 대하여 신중한 이야기를 하시는데 이들의 반응은 단순하다 못해 너무도 유치하다.

마치 어린아이 같은 모습들..

 이 어이없는 멋진 자가 당착은 곧 있을 큰 환란에 여지없이 무너지지만 베드로의 그 우직하고 미련하며 단순한 특성이 그대로 나타나 실소를 금치 못하면서도 그의 생각이 어딘지 누군가를 많이 닮아 있는 듯하여 한편으로 정감이 가기도 한다.

그러면서 사람의 말을 깊이 이해하지 못하고 던지는 말에 상대이신 예수께서는 - 그분이 평범한 사람이라고 상상해보면 ...참으로 안되었다- 얼마나 답답했을까 생각하니 안타깝기 그지없다.

 

 

 

 참으로 난 성경을 읽어가면서 살아 있는 글이란 생각을 한다.

많은 점을 관찰 할 수 있다.

 

그 하나가 '예수님의 역할 모델'이시다.

그 분을 통하여 내가 앞으로 해 나갈 삶의 태도를 많이 배운다.

특별히 오늘 주님은 나에게 이런 걸 보이신다.

 나눌 수 있는 선한 영향은 나누어 가르치라.

그리고 그 반응에 구애 받지 마라.

끝까지 온유한 태도를 유지하라.

그들을 불쌍히 긍휼히 여기라.

 

 또 하나는 그 속에 흐르는 감정의 움직임이다.

위에 썼지만 어리석은 , 상황에 맞지 않는 이야기를 통하여 그 들 속에 있는 감정을 살짝 짐작해 보았다.

 만일 예수님께 나를 대입시켜 내가 그자리에 있다고 생각하면 난 많이 당혹스러웠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감정이 오늘 날의 평범한 사람들, 평범한 상황에 있을 수 있는 보편적인 것을 볼 때

그때에 그들이 누리고 있는 문화보다 우리의 삶이 훨씬 더 많은 것을 누리고 세련되고 복잡한 것을 생각할 수 있음에도 결국 사람은 그게 그것인 감정의 흐름을 느끼면서 재밌다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다.

 2000년 전에 지구 반대편에 나보다 훨씬 못살던 자의 하는 짓이 나랑 많이 차이가 없다.

이것은 생각할 겨를이 몇가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은 누구나 단점이 있다.

물질이 사람에게 풍요는 가져다 주었어도 지혜는 가져다 주지 못했다.

많이 알고 본다는 것이 진실을 볼 수 있게 한다는 것은 아니다.

성경에 나온대로 세상에 지혜있는 자가 없다고 하신 말씀이 이해가 간다.

성경은 살아 있다.

성경은 한마디 한마디가 다 지혜를 꿰뚫고 있다.

진리인 성경을 중심으로 세상을 판단하고 삶의 방법을 배우면 그것은 옳다.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니 .. 성경은 나를 자유롭게 할 것이고 그것은 성화를 의미한다.

 

 관계를 통한 진리를 보게 하신다.

베드로가 주님의 말씀을 단호하게 잘라 응답할 때 그 자신은 절대로 거짓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대로 그것은 거짓이 되었다.

그게 베드로가 거짓말 장이라서 일까?

그는 나름대로 그 상황에서 최선의 선택을 한 대답을 하였다.

그 후 벌어지는 일은 인간으로서 예측하기 힘든 상황의 반전을 가져온다.

그래서 반대되는 행동을 하게 된 것이다.

 난 어떤가?

내 속을 가만히 들여다 보니 지금까지 난 내가 부족하다고 입으로는 고백해왔으나 실제로는 내가 잘 나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물론 일 부분 그렇다.

내 상황에서는 잘 나가고 있다.

그러나, 정말 잘나가고 있는가?

내 앞의 상황을 예상하지 못하고 현실에만 대하여 맞추어 최선을 다하는 것은 최선을 다하는 것 맞다.

칭찬 받을 일이다.

더구나 베드로의 우직함은 칭찬 받을 일이다.

충성심도...

나도 그럴 수 있다.

아직은 내 속에서 머물고 있고 세상을 향해 선한 영향을 마구 베풀지는 못해도 그럴 수는 있다.

 

그러나

베드로가 결과론 적으로 보면 - 장경동 목사님 말씀대로 '통으로 보면' -잘못이다.

큰 오류를 범했다.

예수께서 그 특유의 온유와 평강으로 다시 회복시키지 않으셨다면 그는 인간 말종의 역할 밖에 못했을 인물인 것처럼 나도 또한 그렇지 않다고 어찌 얘기할 수 있는가?

 

 이 차이가 무엇인가?

현재까지는 옳다.

( 난 누군가?    이제는 어렵더라도 악은 과감히 뿌리쳐야할 때다.  꽝 ~~ ㅎ )

 

그것은 초등학교 학생들이 6학년 까지는 큰 스트레스와 경쟁이 없이 놀이 비슷하게 학교를 다니어도 모범생 소리를 들을 수 있고 , 중학교 때는 고등학교와는 또다른 어린 행위를 해도 이해가 되어도 고 3이 되면 입시생으로서 눈빛이 달라지지 않으면 곤란한 학생이 되는 것과 유사한 모습이 아닐까?

고3 시절을 지나면 대학시절의 청춘을 꽃피울 수 있다.

 예수님도 성경에서 비유할 때 꼭  A와 B로 나누어서 예를 드셨다.

그 분은 치료도 하시고 공감도 하시고 설명도 하시고 가르치시기도 하셨지만 결국은 '성화'되기를 바라시는 목적이 강하시다.

세상의 연합과 평화와 화평을 위해서 오셨지만 결국은 '십자가'를 같이 지는 게 그 분의 우리를 부르신 뜻이라고 하셨다.

 축복도 주지만 고난도 주신다.

고난은 더 큰 축복의 필수 불가결한 조건이라 하신다.  

 

결국, 한마디로 오늘의 내용을 압축하면 이럴 듯하다.

'네가 쉽고 편안하고 축복의 예수님을 누리고 왔고 그것을 주님께서 허락하셔 오셨지만

 이제 때가 되었다.

 십자가를 지라.

 그리고 나를 따르라.'

 

 

 

적용

 

1. 온유하라.

  

2. 아버지 학교에 의무적으로 가지 마라.

   그들의 아픔을 공유하라.

   같이 안타까워 하라.

    그들을 중보하는 마음으로 가라.

   내 찬양을 통해 가슴에 씨가 뿌려지길 기도하라.

 

3. 고난의 십자가를 묵상하라.

    월요일 부터 있을 새벽기도 전교인 참여에 동참한다.    

 

4. 겸허하라.

   난 언제라도 주님을 배반할 가능성이 있는 자 임을 인정하라.

 

5. 내 하는 일에 좀더 겸허하라.

   주님이 바라시는 것은 인내하고 겸손하고 기뻐하길 바라신다. 더..

 

 

기도

 

주님이시여

감사합니다.

흐르는 공통된 감정을 이해할 눈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에도 끝까지 인내하시고 온유하게 보시는 주를 느끼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그 안에서 내 상처가 녹아내리고

세상에서 주님을 안 것이 가장 행복함을 알 수 있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주님은 절대로 날 배반치 않으실 것이시고

주님은 그럼에도 날 사랑하실 것을 알게 해주셔서 그럼을 감사합니다.

이제 주님.

세상에 눈에 보이고 편하고 귀해 보이는 행동만을 사랑하고 있었던 것을 깨닫게 해주심을 감사드립니다.

힘들어 보이고

어색해 보이고

언짢아 보이고

좋아 보이지 않을 것이 그러하지 않을 수도 있음을 알게 해주셔도 감사합니다.

모든 것.

주님의 말씀대로 살수 있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혹여 저도 모르게 옛사람의 버릇을 되풀이 하고 있음을 발견해도

우리 주께서는 끝없이 날 용서하고 용인하실 것을 이해하고 맘 속에 받아들이기를 원합니다

주여 .

주님이 진짜로 좋고 감사하여서 주님을 쫓을 수 있기를 원합니다.

예수님 오늘 하루도 지켜주시길 원합니다.

예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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