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질그릇이 보배그릇으로 바뀔 때( 고후4:7-15 ) 본문
제 4 장 ( Chapter 4, 2 Corinthians )
아침에 빛나는 햇빛
더없이 맑은 푸른하늘.
거기에 담기니
보잘 것 없는 들 꽃.
흉물스러운 아파트.
그들이
더욱 좋아 보인다.
그렇다.
질그릇 같은 내가
주님을 담으니
보배 담은 질그릇으로
보일 것이다.
^^*
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
내 가 속해 있는 소수의 기독교인.
나는 질그릇이다.
주님은 보배시다.
주님은 심히 크신 능력의 보배이시다.
나는 질그릇으로 형편없는 자이지만
주님을 담고 있기에 보배그릇이다.
'알게하려' 주님이 다시 한번 말씀하신다.
난 질그릇이지만 보배그릇이다.
난 보배 질그릇이다.
그것을 이제야 다시금 알려 주신다.
8.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9.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보배그릇이지만 질그릇으로 만 생각하고 있을 때는
나는 우겨쌈을 당할 수 밖에 없다.
이제는 아니 주님이 싸이지 않게 하신다.
답답한 일을 당할 수 밖에 없다.
이제는 주님이 낙심지 않게 하신다.
핍박을 당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주님이 버린 바 되지 아니하게 하신다.
거꾸러 뜨림을 당할 수 밖에 없다.
그래도 주님이 망하지 아니하게 하신다.
10.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이러한 모든 현상은
'우리가 보배를 짊어진 ' 보배그릇임을 깨닫기 시작함 부터 시작한다.
예수님 믿어도 질그릇임은 변하지 않을 지 모른다.
그러나 예수님이 내 보배로 내 속에 계심을 깨닫는 순간 부터
예수님의 생명은
내 몸에도 위력을 나타내기 시작하신다.
나의 육신은 약하고 깨어지기 쉽고 투박한 존재임이 변화는 없지만
남들은 나를 그리 보지 않게 된다.
내가 나를 질그릇임으로 인식하고 있지만
그 질그릇이 보배를 담고 있는 질그릇임을 인식하고 깨닫는 순간
더 이상 질그릇은 질그릇이 아니다.
보배 그릇으로 변하게 된다.
이러한 자아상의 변화는
나보다 남이 먼저 알아 차린다.
그러기에 그러한 나를 보고 더이상 질그릇이라 생각하는 자가 없어진다.
난 '보배그릇'이다.
그게 나타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생명'을 사모해야 한다.
11.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그게 살아 있는 자다.
나는 살아 있는 자다.
살아 있음은 숨쉬고 움직이는 것 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식물도 살아 있다.
그들은 움직이지는 않지만 생명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생기를 내 뿜기 때문이다.
생명을 내 뿜는 것은 '조화'와는 다름으로 금방 알 수 있다.
형태는 똑같아도 그들은 아름답다.
그것은 생명 탓이다.
생명은 조물주이신 하나님의 만드신 목적을 충실히 수행하려는 의지에서 나온다.
난 살아 있다.
내가 생기를 내뿜음은 예수를 위하여 삶에 있다.
예수를 위하여 삶은 '죽음에 넘기움'을 감수함에 있다.
우리는 반드시 죽을 수 밖에 없다.
그러함이 우리들의 운명이다.
죽을 수 밖에 없음은 생명의 중단 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살아가는 동안 겪을 수 밖에 없는 고통은 필연이라는 것이다.
더구나 산자로서 '죽음에 넘기움'이라는 의미는
산 자 즉 선택받은 소수 들은 '조금은 더 고통'이 심할 것이라는 의미다.
그것은 다시 말하면 '예수의 십자가'의 고통을 말하느 것이다.
그것을 ' 예수를 위하여' 감내한다는
우리의 운명을 받아들이는 순간
고통은 다시 죽음에 관계가 없어진다는 뜻이다.
위에서 나오는 것처럼
우리 산 자들은 '우겨쌈을 당할 수 '밖에 없지만 싸이지 아니하는 것이고
............ 이다.
즉,
나는 '산 자' 임을 명심하고
'산 자'라는 것은 예수님을 위하여 사는 자이고
예수의 생명이 우리 안에 담겨 있는 자고
그러기에 '고난'을 기쁨으로
예수님을 위하여 받아들인다는 것을 명심하는 자이다.
그러한 자들은
당연히도 '예수님의 생명', '성령'께서
자연스럽게도 고난을 이기게 하시고
우리 몸에 '생명'이 나타나게 하여 주시는 것이다.
늘 그렇지만 예수님은 '역설'이시다.
이해할 수 없지만 이해가 된다.
그 역설의 중심에 우리가 있다.
우리가 할 일은
우리가 질그릇 임을 이해하고 깨닫고
그 질그릇이 고난을 위한 도구이지만
예수님을 위하여 받아 들이겠다는 결심을 하는 순간
주님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거하시게 되고
그 생명으로 인하여
우리는 더 이상은 '질그릇'이 아닌 보배 그릇으로 바뀌는
그 이해할 수 없는 역설의 중심에 서 있는 것이다.
다시 풀로 돌아간다.
그 풀들은 초라하다.
바람 만 불어도 이리 저리 심하게 움직인다.
초췌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아름답다.
생기를 뿜는다.
그 생기는 그들이 풀임을 고민하지 않고
있는 그 자리에서
청명한 하늘 만을 보고
햇빛을 받음 만을 기뻐하기에 나오는 것이다.
우리의 보배가 그 분 예수님이시다.
그렇게 그 자리에 서 있어야 만 한다.
적용
1. '알게하려 함'이라는 구절이 눈에 띈다.
깨닫게 하려 하심.
유명하고 좋아하는 구절이라서
'질그릇' 의 뜻은 알지만 삶에 들어가서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스스로의 투박함을 미워하는 부분이 없지 않다.
그럴 때 아프다.
그럴 때 주님의 말씀도 멀리 느껴진다.
이제, 알게 하려 하심에 눈이 머문다.
내 부족한 부분을 사랑하고 받아 들인다.
내 사랑할 이유와 당위성은 '내'가 주님의 보배그릇이기 때문이다.
난 주님을 담으려는 노력을 많이 함은 확실히 안다.
난 주님을 사랑한다.
진정 그 하나는 자랑스럽다.
그런 나는 '보배그릇'의 자격이 충분하다.
그러기에 난 내 질그릇의 표면을 완전히 사랑해야 한다.
2. '나는 항상 산 자'이다.
나는 살아 있는 자임을 명심한다.
풀과 꽃, 하늘의 푸른 생명력을 가진 자다.
생명력은 있는 그대로 흔들리지 않는 자다.
예수님을 위하여 사는 자다.
예수님을 위함은 '고난'을 받아 들이는 자다.
죽음에 넘기움을 받아 들이는 자다.
죽음에 넘기움을 받아들여 예수의 생명력이 영혼에 자리 잡으시도록 하는 자다.
외운다.
11절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3. 산 자가 되기 위하여 '항상' 인내한다.
억울한 일 한번 참는다.
참음은 예수의 생명이 내 죽을 육체에 나타나는 기회임을 명심한다.
죽음 같은 고난은
특히 우리 같은 '산 자'에게는 필연이다.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영혼에 담기기 위하여서는 인내가 필요하다.
성질 부리지 말자. !!
4. 성경 일곱 장 읽는다.
기도
주님
토요일입니다.
어제는 당직이 너무 힘들어서 12시간 죽음 같은 잠을 잤습니다.
그래도 감사한 것은
몸이 피곤하면 무조건적 반응처럼 짜증이 터져나오던
옛 습관이 조금은 사그러 듬을 스스로 느꼈습니다.
주님을 생각함이 조금은 습관이 된 듯합니다
그래서 조용한 목소리로 많은 환우 들에게 대했고
눈이 감김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하여 인내했습니다.
수술도 잘 끝났습니다.
주님
이제 질그릇인 저의 스스로의 모습에 대하여 다시 한번 돌아봅니다.
이제는 상당히 보배 그릇 처럼 보입니다 만
아직도 어느 순간에 도달하면 내가 깨지기 쉬운 투박한 질그릇처럼 느껴져
스스로 속상할 때가 없지 않아 있습니다.
그 부분.
이제 알려 주려 하심을 압니다.
주여 .
제 뜻대로 되지 않는 것.
주님의 뜻대로 하소서.
주님 특별히 오늘 말씀의 메시지가
고난은 질그릇이 보배그릇으로 바뀌는 데 필연적 도구이고
그 도구를 적극적으로 받아 들이는 것이
예수의 생명을 받아 들이는 자며
그러한 내가 '살아 있는 '
그것도 항상 살아 있는 것임을 말씀하시려 하시는 줄 압니다.
주여.
계속 알려 주소서.
주여
계속 깨닫게 하시고
주여
힘들 때 너무 힘들지 않게 하여 주시고
주여
망할 것만 같은 두려움이 있음에도
절대로 쓰러지지 않을 확신을 주소서.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제 안에서 용솟음치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받들어
이 귀한 토요일에 감사드리며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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