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수건을 벗고 주를 뵐 때야(고후 3:12 -18) 본문
제 3 장 ( Chapter 3, 2 Corinthians )
등불을 비추니
갈대가 아름답다.
이렇듯
갈대가 아름다울 때가
가끔 있다.
바람 부는 강변에서
청명한 가을 날
바람에 흔들릴 때...
그렇지 않으면
그냥 어떤 땐
흔하디 흔한 풀에
지나지 않게 보이기도 한다.
저 갈대가
내 눈에
한결같이 아름답게 보일 때를
간절히 기대한다. ^^*
12.
우리가 이같은 소망이 있으므로 담대히 말하노니
나는 소망이 있다.
'영생'의 소망.
하지만 영생을 살아가기 위한 전제 조건이 있다.
더 이상 죽지 못하고 영원히 살아가야 만 할 때는
영원을 지속할 어떠한 안정된 감정적 지속의 상태가 유지 되어야 한다.
그래야 지루하지 않지...
'평온'
' 평강'
' 기쁨'
' 열렬한 열정'
' 눈물 날 듯 감동의 상태'....................
그러한 모든 바탕에 공통점으로 필요한 것은
'흔들리지 않음'과 사랑'의 마음이 아닐까?
사랑이란
'나' 만을 고려해서는 사랑이 아닌 '이기주의' 일 뿐이고
'유치'한 마음의 다름이 아니고
그것은 반드시 '조건'에 흔들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가들을 보라.
쉽게 울고 웃고 한다.
젊은 청춘 남녀를 보라.
쉽게 만나고 헤어진다.
이런 폭팔적이고 자주 흔들림으로 영생을 산다면
그것은 싫다.
짧은 인생 사는 것도
나는 그리 달갑지 않다.
오래 살고 싶은 생각이 없는데
영생을 또 지금 이전, 혹은 지금의 흔들리는 순간의 감각으로 산다면
'싫다' 다.
주님은 그러한 얇은 영생, 영원한 생명을 말씀하시지 않았을 것이시다.
최소한 십자가를 택해서 나를 살리신 분이시라면....^^*
' 흔들리지 않는 온유하고 고요한 사랑. '
친구 같은 아내.
잔잔한 마음.
옆 자리에 있기만 해도 좋은 친구...
아주 적기는 하지만 이러한 사람들에게서 있을 때 예상되는
잔잔한 편하고 기쁜 감정들이
'영생'을 살아가야햘 우리들이 지속하여야 만 하는 '감정'의 조건들이다.
난 그리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변함없는' 이란 형용사가 전제가 되어야 한다.
'변함없는 '사랑'
'긍휼의 마음.'
그것은 '타인'을 고려할 때만 생기는 것이다.
타인에 대한 변함없는 배려심을 가질 수 있는 '나'는
그제서야 '천국'이 내 영혼에 이루어져 간다.
자랑스럽고 사랑스럽고 편하고 귀하고...
그게 천국을 살아가는 마음의 실체다.
이것이 내 소망이다.
담대히 말할 수 있어져 간다.
'난 긍휼한 마음, 긍휼한 사랑'을 원한다.
'주님 나에게 그러한 마음으로 영생을 살 수 있도록 해주세요.'
13.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로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치 못하게 하려고 수건veil을 그 얼굴에 쓴 것같이 아니하노라
수건.
베일( veil )
눈과 눈 사이를 가로 막는 어떤 장벽.
스크린.
색 안경.
햇살을 받아 반사한 색깔이 눈을 통해 대뇌에 들어가기 전
한번 걸러져 변형시키는 도구.
이 안경이 , 수건이, 베일이 ..영혼의 눈 앞에 가리워져 있으면
속을 알 수 없게 하고
판단과 감정을 왜곡시키게 되는...
14.
그러나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라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15.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오히려 그 마음을 덮었도다
그러기에 수건을 마음 속에 지니고 있으면 '완고'해질 수 밖에 없다.
무엇이든 자신의 뜻대로 변형시키니..
그 완고는 외부적으로 나타나는 특성 만을 말할 뿐 아니다.
그가 인식하든 하지 못하든
자신에게 향하는 왜곡은 더욱 심하다.
그것은 본인이나 주위에 심한 고통을 가져온다.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않은 모든 자들은
스스로나 남에게나 완고한 해악을 끼칠 수 밖에 없는 운명이다.
그게 수건의 본질이다.
구약의 율법은 왜곡 시킬 위험성이 다분하다.
왜냐하면 아무리 좋은 이야기라도 자신의 성격, 환경, ......에 의하여 틀어져 버릴 수 밖에 없지 않는가?
그게 수건이다.
그게 이차 지각 체계다.
윈죄 이후 인간은 '수건'을 쓸 수 밖에 없다.
그 수건을 벗기고 있는 그대로 볼수 있는 기회는
'그리스도 예수 '밖에 없다.
그 분 안에 거하는 것 밖에 할 수 없다.
16.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
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마음을 가리는 색안경 , 이 수건을 벗어야만
자유로움이 있다.
그 자유로움으로 '영생'을 살아야할 운명이 우리 믿는 자의 것이다.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것은 지옥이 아니던가?
영원토록 '행복'하게 사는 것 만이 '영생'이 의미가 있지 않던가?
그 방법론이 '수건'을 벗고나서 나오는 긍휼의 감정을 회복하는 것이다.
긍휼을 회복하는 것은 '수건'을 벗는 것이다.
긍휼함이란 '타인'을 배려하는 사랑의 감정이다.
그것이야 말로 '어린 아이'나 격렬한 청년들의 육체적 끌림에 의한
즉 '나'의 감정에 치중한 애정행위와는 다른
온전한 사랑의 감정으로 영원을 사는 것이다.
그것을 '자유함'이라 표현하고 계신다.
18.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영생은 자유함으로 사는 영원한 삶이다.
그 자유함으로 주의 영광을 바라보며 사는 것이다.
'주님을 생각 만 해도 이토록 좋은 것을
주님을 뵙고 살 수 있다면
그 얼마나 좋을까?
가슴이 터져 버려 내 영혼이 제 모습을 유지할 수 있을라나..ㅎㅎㅎ
' 긍휼한 사랑의 눈물어릴 듯한 자유함 + 터질듯 유지되는 감동의 지속'
이것이야 말로 수건을 벗고 사는 영생의 감정의 실체가 아닌가?
그 소망이 소록소록 커져 긴다.
아내가 '장인어른 추도 예배'에 다녀오느라 시골에 갔다가 새벽에 올라왔다.
장모님을 모시고 형제들끼리 운전을 해서 내려갔다가
휴가철이라 심각한 고속도로 정체를 피해 새벽에 들어 왔다.
얼굴이 말랐다.
내려가서 과식을 했더란다.
원래 위장이 탈이 잘나던 사람이 '몇 차례 ' 토했다 한다.
아내가 하는 말.
' 형 전화 받았었어요?'
자다깬 나는 '무슨?' 이라 물어 보았다
고향에 계신 모친께서 많이 피곤해 하신 다 하며
내려가는 차편에 있는 아내에게 '형수'가 전화 했단다.
그러면서 고향에 오라고 했단다.
사정을 이야기 하고 이틀 후 심하게 아픈 아내에게
전화를 한 형수가 '검사'를 했는데 이상이 없다며
한번 오라고 했다한다.
나에게 형님은 전화한번 없으셨다.
자다가 깨서 이야기를 듣는 순간 '속'이 뒤틀린다.
'난 의사다.
불편하시고 힘드시면 형이 직접 나에게 전화를 해서 상의를 하던지
검사를 당신이 시켜 드리시고 결과를 나에게 말씀하시고
대안을 상의 하지 ... 꼭.. 무슨 큰일 생긴듯한 분위기 조성하며
죄 진 사람 불러 내리 듯이......'
한편으로 '부모님 아프신데 알지 못하고 있는 죄인' 의식이 날 사로 잡으려 한다.
복잡한 마음이 올라오며
그래도 선한 생각을 하라는 주님의 마음이 부담이 온다.
그렇다.
난 이렇듯 복잡한 '수건'을 많이 쓰고 있었다.
역기능의 소산은 참으로 길기도 하다.
많은 부분 이해하고 받아 들이고 있었지만
몸이 피곤하고 다양한 이유로 인해서
마음이 풀리니 내 속의 죄악적 '수건'은 여지없이
내 영혼을 가린다.
그 생각은 '화'로 바뀌려 하고..
참 복잡하다.
순간이지만 그런 마음은 내 속을 지옥으로 바꾸려 한다.
아침에 이럴 때는 꼭 늦잠을 자고야 만다.
머리가 복잡해지고....
부지런히 뛰어나와 진료를 마치고 한가한 틈을 타서
힘을 모아 - 말씀을 읽는 것은 습관이 되어도 힘이 들다.
사단이 방해하는 것을 이럴 때 느낀다.
그것은 역으로 주님의 살아계심을 반증하는 결과이기도 하다.
두려워 하는 사단의 방해 아니던가?ㅎ - 말씀을 읽었다.
잠시 묵상 먼저 하고 하는 것을 잊었다.
다시 힘을 내어 기도하고 말씀을 읽었다.
'수건' 이란 단어만 그득이 눈에 들어온다.
수건은 무엇인가?
인간 누구에게나 가지고 있는
자기만의 '안경'이 아니던가?
그 안경은 '환경'에 의해 조성되고
자신의 성격적 특질에 의하여 변화되고
시간의 더해짐으로 인해서 굳어 버려서 만들어진
눈을 가리는 물체다.
그 눈을 가리는 '수건'의 안경을 통해서
모든 사건이나 사물이 한번 비틀어져 인식되게 되어 있다.
그 비틀어진 것을 말씀으로 체질 하여 거르지 않으면
영혼 깊숙이 '죄악'을 키워가는 양분으로 채워져 간다.
시간이 한참 지나면 돌아올 수 없는
그 만의 자동 제어 씨스템이 되어 가버린다.
그것을 외부적으로 '성격'이라 한다.
위에 쓴 내 씨스템을 남들은 좋게 표현해서 '불같은 성격'이라 하기도 하고
원래대로 말하면 '지랄 맞은 ㅎㅎ' 성격이라 표현한다.
이 마음 가지고는
영원을 산다는 것은 '지옥'이다.
영생이 영원히 죽지 않는 단 것 만은 아니다.
반드시 수건을 벗고
이땅을 사는 동안
내 영혼을
왜곡되지 않은 순수한 눈을 가진
흰색의 영혼으로 탈 바꿈할 노력을 해야 한다.
그 노력은 '주님' 예수님을 전제하지 않고는 무의미 하다.
도덕적 노력은 또다른 수건을 만들 뿐이다.
공자, 부처, 모하멧.........모두 무거운 수건을 줄 뿐이다.
지옥을 향해 더 빨리 갈..
내적인 평안 대신 '마취제'를 선물하는.........
온전히 주님 예수님 만 바라보아야 한다.
수건의 존재를 인식하고
왜곡된 판단을 끔찍히 여기고
내 노력을 내려 놓고
주님 앞에 가져가
십자가 아래에 내려 놓아야 한다.
그리고 고백해야 한다.
주님 날 도우소서.
오늘 긍휼한 마음을 주소서.. 라고.
적용
1. 회개하리라.
잘못된 선택을 .
2. 기다린다.
주님이 어머니 문제 잘 해결하시도록.
3. 선한 말을 하리라.
전화 오면..
4. 중보 기도한다.
나이가 들어갈 수록 아프다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을 위해..
5. 성경 일곱 장 읽겠다.
6. 주님의 전능하심을 믿는다.
찬양한다.
주님 만이 진리임을 다시한번 깨닫게 되어 감사하다.
주님 안에서 거하길 간절히 기도한다.
기도
주님이시여
용서하소서.
주님이 그토록 효를 말씀하시었지만
전 아직은 그리 가깝지는 않는 듯 싶습니다.
주여 절 도우시고 그런 마음마져 인도하소서.
방해하는 모든 역기능의 수건들을 벗기소서.
주님 만이 하실 수있습니다.
주님 안에서 떠나지 않도록 잡으소서.
말씀 안에서 거하게 하시고
말씀의 부담을 적용하게 하시고
말씀으로 얻어지는 결과물을 오늘 또 향유하게 하소서.
모든게 제 마음대로 되지 않사오니
주여 당신의 인도로
주님 성령의 어루만지심으로
제 심령의 심비에 편지를 쓰소서.
'주하인아.
넌 내가 사랑한다.
내 안에 거하라.
그리고 수건을 벗어라...
내가 도우마.. '하고요.
주님
감사합니다.
거룩하시고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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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현듯
이 찬양이 입에 오른다.
'구주를 생각만 해도 '
구주를 생각만해도 내맘이 좋거든
주얼굴 뵈올 때에야 얼마나 좋으랴
사랑의 구주 예수여 내기쁨 되시고
이제와 또한 영원히 영광이 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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