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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한 외로움은 오직 예수님으로 만이..(왕상2:13-25)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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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한 외로움은 오직 예수님으로 만이..(왕상2:13-25)

주하인 2006. 4. 6. 11:13

 

 

(열왕기상2:13-2:25) 

( 웬지 좀 미련해 보이지요? ㅎㅎ   )

 

 아도니야가 참 미련한 사람이다.

아니 평범한 촌부와 같은 심성을 가진 사람이기도 하다.

단순하게 세상을 보는 것 같고 생각을 별로 안하는 사람이다.

그냥 일차적인 감정에 머물러서 사는 사람 같다.

왕으로서의 자질 및 소양이 부족하다.

 

 바로 얼마 전 왕 될 꿈에 부풀어 잔치를 벌이다가 순식간에 역전되어 죽을 목숨 부지하기 위하여 주님 전에 들어가 '제단의 뿔'을 붙들고 애걸복걸하던 지가 얼마 되지 않았더니, 이제는 목숨이 유지되는 것이 확실해지자 다시 새로운 마음이 든 것같다.

 

 

 

13 대답하되 화평한 목적이니이다

 

 솔로몬의 모친 밧세바를 찾아와 하는 얘기다.

진심일 것이다.

이제 더 이상의 분란은 없다.

 화평한 이유다.

 최소한 그의 현재 감정 상...

이것은 진실이다.

 

 

 

 

15 이 왕위는 내 것이었고 ~ 여호와께로 말미암음이니이다

( 요리 미련 떠는 애들이 가끔 있어요..    어릴 때 주하인이라고.ㅎ.ㅎㅎ)

 

 현재의 상황의 반전은 '여호와'로 인함임을 인정한다.

나름대로 감정정리도 했다.

 

문제는 하나님을 진심으로 경외하거나 그 분의 말씀을 순종함이 기쁨임을 알아서가 아닌데 있다.

그는 여호와 하나님을 자신의 감정의 변화를 합리화 하는 수준에 이용하는데서 그친 것이다.

 

 그 증거가 '이 왕위는 내 것이었고'라는 어리석은 발언에 있다.

 

물론 이 이야기는 주님을 모르고 , 현재 상황을 고려에 넣지 않으면 진실이긴 하다.

그러나,

모든 말에는 시기와 때가 있다 .

할 얘기가 있고 못할 얘기가 있다.

그러나, 그는 버젓이 사자 굴 속에 들어와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이건 아도니야의 인간성에 대하여 아주 명백히 드러내 보여준다.

그는 미련이 많은 자다.

나름대로 포기는 하나 언제든지 다시 욕심이 일어날 소지가 다분한 자다.

이성적이라기보다는 감성 만이 발달한 자이다.

 

 

 

 

 

16 이제 내가 한 가지 소원을 당신에게 구하오니 내 얼굴을 괄시하지 마옵소서

17  저로 수넴 여자 아비삭을 내게 주어 아내를 삼게 하소서

 

 참으로 기묘하다.

 

어찌 이 상황에서 이런 요구가 가능하다는 말인가?

상식적인 차원에서 이해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아도니야의 잠시 살펴본 인간성 문제.

그리고 지독한 상황 반전에 의한 정신적 충격

아버지의 부재 증후군에 의한 역기능 가정 소산...이란 점을 감안 하면 어느정도 이해가 가능하다.

 

 자주 성경을 통해,

특별히 구약과 신약의 예수님 행적을 통해 느끼는 것이지만 성경은 살아있다.

어쩌면 이렇게 사람들의 심사가 적나라하게 들어나는가?

마치 사극을 보는 것 같고

시트콤을 보는 것 같이 재밌기도 하다.

사람들의 심사가 너무 절묘하게 묘사되고 있지 않은가?

 

 수넴여자를 요구하는 데서 추정되는 아도니야의 심사는 이렇다.

 

( 짙어가는 가을 하늘에 혼자라는 건 너무 외롭지요? )

 

 

 짙은 두려움이 서서히 겉히고 현실을 돌아볼 여유가 생기자 그는 너무 외로웠다.

그리도 떠들석 하던 무대의 환호가 사라지자 허탈해서 견디지 못하는 '스타'의 과거 행적 되새기다가 '대마초'에 빠져드는 그 외로움 처럼...

 그는 뭔가 필요했다.

만일 이때, 정말 자애로운 아버지가 스르르~하고 주위에 나타나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끌어 안아 주며 '얘야 ! 많이 힘들지?   이런 과정이 네 인생에 많은 힘이 될 것이다. '라는 위로의 말과 함께 많은 울음을 울도록 허락 했으면 아마도 달라졌을 것이다.

 그는 훨씬 더 성장한 인격으로 커졌을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한마디도 질책하지도 관심 갖지도 않으며 그를 방치 했다.

그리고는 죽었다.

누구도  아도니야를 진심으로 끌어안아줄 사람이 없었다.

오직 '반대자' 아니면 '무관심'한 사람들 뿐이었다.

 

 만일 이때, 아도니야가 예수님을 알았었더라면......

그 분의 품안에서 녹여났을텐데..

 

 

 

( 외로워..)

 

어쨌든

그는 혼자 이 외로움을 삭이려 무진 노력을 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그러다가

뼈가 삭아들어가는 그 진한 외로움을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허전함을 안아줄 그 누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게..

마귀의 장난인지

그의 머리 속을 순간 스치고 지나가는 아름답고 어머니 같은 형상의 여인의 영상이 있었다.

 

 수넴여인 아비삭

 

갑자기 가슴 속에 불어닥친 그 열풍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이건 분명히 정상적인 바램이 아님이 분명함에도 그는 견디지 못했다.

안절 부절

왔다갔다.

 

그러다가..

그의 뇌리에는 '밧세바'의 아름답고 풍상을 겪은 단아함이 한가닥 희망으로 순간 스치고 지나가게 되었을 것이며 마치 구세주를 만난 것처럼 기쁨에 겨웠을 것이다.

 

 그러면서 갖은 나름대로의 미사여구 및 행동 방식에 대하여 생각하게 되었고 , 가능성 있는 생각으로 판단이 되자 견디지 못하고 밧세바를 찾아가게 되었을 것이다.

 

 만일, 기왕에 제단의 뿔을 붙든 김에  하나님 앞에 조금 더 엎드려  그 감정의 홍수를 바치고 검증을 받았더라면 이런 불행한 행사를 하지는 않았을텐데...

 그래서 솔로몬의 진노를 사 목숨을 빼앗길 불상사는 없었을 텐데..

 

(너무 외로워..)

 

 그는 이미 명기한 상처에 의해 너무 감정에 고착되어서 지배를 받았다.

감정은 온통 의 긴장을 유발했고

그 긴장은 생각을 외골 수로 몰아갔으며

결국 잘못된 밧세바 찾아가기 행동을 야기시켰다.

 

이 네가지가 동시에 일어난 것이다.

 

잘못된 현상

 

그러나...

만일 '생각'을 고쳐 먹었더라면

다른 결과가 왔을 것이다.

 생각은 '여호와께 의뢰하여 볼까?' 이다.

그 결과로

주님께서는 '평강'의 느낌을 주었을 것이고

의 나른한 기쁨을 틀림없이 가져올 것이고

이것은 좀다른 행동을 긍정적으로 하게 했을 것이다.

 

 

 이게 차이다.

 

 

항상 우리 앞에는 문제가 있다.

고통이 필연적인 삶이다.

그때마다 우리에겐 아도니야의 예 같은 '선택'이 우리 앞에 놓여지게 된다.

만일

우리 주님 예수님을 의지하고 그 분을 선택하면

훨씬 좋은 결과가 오게 된다.

비록 당장 눈 앞에 손해가 있을 것 같고 아도니야의 상태처럼 죽을 것 같은 강박상황이 있더라도

잠시만 내려놓고 주님 앞, 그 분의 십자가 앞에 내려 놓고 쉬면

자연스레이

주님께서 해결의 바퀴를 돌리시게 될 것이다.

최소한

문제로 부터 치여 목숨을 잃을 것 같은 고통으로 부터는 멀어지게 될 것이다.

 

 

 

적용

 

1. 지나친 감정은 피한다.

 

2. 한발 뒤로 물러서서 주님을 묵상한다.

 

3. 주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따른다.

 

4. 바꿀 수 없으면  받아 들인다.

 

5. 예수님이 계심을 감사함으로 감사한다.

 

 

 

기도

 

주님

아도니야의 감정적 파탄 상태의 행동에 대하여 보고 있습니다.

 

이게 비단 그 만의 문제이겠습니까?

우리가 인식을 못하지만

우리의 일상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어리석은 행동의 바탕에는

저러한 감정적인 선택의 결과가 있지 않습니까?

그 저변에는 우리의 성장적 배경이 원인이 되고 있지 않은지요?

 

너무도 익숙하지만

파탄을 보면서

더 이상의 어리석음을 되풀이 하지 않도록 경계하시는 주님의 뜻을 읽습니다.

그렇습니다.

혼란을 막아주심을 감사합니다.

 

성령님께서 도우실 줄 압니다.

선한 방향으로 인도하소서.

주님 앞에 모든 걸 내려 놓으니

너무도 감사하신 주님.

이끌어 주시고 도우소서.

저의 삶을 우리 주님이 보시기에 선한 방향으로 이끄소서.

 

예수님의 이름 받들어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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