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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제가 그렇습니다.(왕상2:26-35)

주하인 2006. 4. 7. 10:13

(열왕기상2:26-2:35) 

 

 

26  아비아달에게~ 다윗 앞에서 주 여호와의 궤를 메었고 또 내 부친이 모든 환난을 받을 때에

    너도 환난을 받았은즉  

( 원숭이도 떨어지고 펭귄도 실족하고.. ㅎㅎ)

 

 

 아비아달은 최소한 죽지는 않았다.

이유는 죽을 죄이긴 하지만 '주님 하나님' 앞에 눈이 고정된 자이다.

그는 여호와의 궤를 맨 자이다.

그리고 생사고락을 다윗과 함께 할 정도로 의리가 있다.

 

 그렇다.

죽을 죄를 짓더라도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는 구원 받는다.

진심으로 옳게 행동했던 기본 마음 자세가 되어 있으면 비록 '실수'나 '패착'에 의한 죄는 구원 받을 수 있다.

비단 하나님과의 관계가 아니어도...

 

 단,  벌 문제는 주님이 알아서 하실 것이다.

 

 

 

 

 

32 여호와께서 요압의 피를 그 머리로 돌려보내실 것은 저가 자기보다 의롭고 선한 두 사람을

    쳤음이니

 

 요압은 달랐다.

그는 비록 '선민'이었지만 중심이 하나님에게 있었다는 구절이 없다.

최소한 그의 맹장 시절에도 신실했던 구석은 별로 표현이 없다.

단지 용맹스럽고 충성스러운 자.

 

 그리고 무엇보다 그는 자신의 '의'로 자기보다 의롭고 선한 사람 둘을 죽였던게 문제다.

 

주님께 회개도 없고

실수가 아닌 본인의 선택에 의한 죄.

 

 

 오늘 묵상은 '죄'와 그에 대한 구원

 

 

그리고 상벌 문제에 대하여 어딘지 모를 중심점을 주시는 듯하다.

 

 

 예수님께 고정되면 어떠한 죄라도 구원받고 사함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상급은 좀 다를 수 있다.

겉으로는 기독교 인이라도 예수님을 진심으로 영접치 않으면 구원에 문제가 있을 수도 있다...라고 하면 지나친 비약인가?

 

 

( 전혀 신학적인 논쟁을 제공하기 위한 것은 아니니 잘 조율된 의견을 리플 해주시면 참조하겠습

  니다.    )

 

 

 

 

 

 

34  저가 거친 땅에 있는 자기의 집에 매장되니라

 요압이라면 얼마나 대단한 권세가 였던가?

젊었을 시 그라면 날아가는 새도 말한마디에 떨어뜨릴 당당함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젊음이 영원히 갈 것처럼, 절대로 늙어서 죽지 않을 것처럼 권세에 욕심을 냈다. 

그는 다윗이 늙어가자 자신의 권세를 유지하기 위한 얄팍한 , 그러나 너무도 세상적으로 보면 합리적이고 영리한 철새 정치인의 모습을 유지하며 아도니야의 편에서 겉으로는 아도니야 만세를 외쳤겠지만 실제로는 자신을 위한 승배의 잔을 나누고 있었다.

 이게 세상이다.

권력의 맛을 들이면

돈이 손에 들어오면

다른 출세의 길이 눈에 보이면

그때는 세상 만 보인다.

더더구나 그 진도가 흐트러짐이 없이 자신의 판단대로 잘 이루어져왔던 사람이라면 더더구나 그 사람의 의식 속에 하나님이 들어 앉을 자리는 없어지고 만다.

 요압은 유다 사람이다.

그러나, 세상에 눈이 고정되어 하나님께 여쭐 생각조차 않는 자는 이렇다.

 

어떤가?

 

 순식간에 뒤집힌 전세.

당황하여 뛰어든 제단.

어찌할 바 모르고 붙들고 늘어진 제단의 뿔

나오라는 소리에도 그 자리에서 죽겠다는 비이성적 몸부림.

결국 사망

 

 주님의 바람이 불면 인간 야생화는 곧 메말라 버린다.

아무리 싱그럽고 향기로운 꽃을 피워내도 뜨거운 주님의 손길 하나면 끝이다.

 

결국 그가 , 아니 우리 모두가 갈 곳은 땅이 아닌가?

그러나, 요압은 그것보다 더 비참하다.

자기의 땅.

그것도 사막에 있는 자신의 땅이다.

 

 한글 표현이 더 절묘하다.

거친 땅에 있는 자기의 집

 

얼마나 허무한가?

 

그렇다.

인생이란 이런 것이다.

역사를 봐도...

주위를 봐도..

미래를 예측해도.

성경 속에서도...

 

인간들은 눈이 막혀 있다.

다 똑같다.

우리의 육신이 결국 갈 곳은 땅인데 왜 이리 수천년의 역사를 두고 똑같은 짓을 되풀이 하고 있다는 말인가?

 

마치 이 땅의 삶이 전부인 것 처럼

땅이 꺼지는 한숨

주님을 향한 원망

질투

허탈한 소리

욕심

비교

경쟁

.........

 

 

요압도 하나도 다름없는 자이다.

 

역시 드라마 얘기 해야할 것 처럼.. .드라마 같다.

 

화무 십일홍( 花無十日紅 )

권무 십년( 權無十年 )

 

유명한 얘기 아닌가?

 

인생 무상( 人生無常 )

삶의 회의

 

 

그러나...

우리는 다르다.

 

날마다

주님 말씀을 묵상한다.

그리고

이땅을 넘어서는 소망이 있다.

그들이 알지 못하는 기쁨이 있다.

가난하지만 부요하다.

흔들리지만 평안하다.

 

우리는 주님 예수님을 아는 자들이다.

주님 예수님을 사모하는 자들이다.

 

아주 복된 자들이다.

 

 

 

적용

 

1. 주님 예수님께 또 감사하자

   십자가의 고통을 묵상하고

   그로 인한 가벼운 우리의 고통의 행운을 감사하자

 

 

2. 삶을 돌아보자

 

3. 욕심을 끊자

 

4. 비교를 끊자.

 

5. 요압의 이 땅의 삶은 결국 먼지였음을 다시 한번 상기하자.

 

 

 

 

기도

 

 

주님

또 한번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제가 행운아라고요.

아침에

괜히 가슴이 허전하고 빈듯햇습니다.

실은 지금도 안타깝습니다.

 

왜 냐구요?

알면서도 제 가슴을 쥐어 뜻는 세상의 비교 탓입니다.

그것의 유한성과

바람 속의 먼지 같음을 너무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놓지 못하고 있는 이 미련이 안타까워서 입니다.

 

주님

제가 그렇습니다.

제가 그리 바보입니다.

언제나 되어야

우리 주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내 마음을 맡기고

우리 주님이 주시는 그 평안을

우리 영혼 가득히 받아들이고 하나가 될 수가 있을까요?

 

주님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성화의 그 원리에 따라

정말 깊은 영성으로 제 영혼이 맑아질 수 있을까요?

 

도우소서.

흔들릴 때 붙드시고

불안할 때 평안 주시고

삐져나오려는 욕심을 누르시고

질시로 눈이 찢어지려 할 때 어루만지소서.

 

역사 속의 그 어리석음을 또 다시 저에게서

특별히 주님의 사랑을 이처럼 가까이서 누리는

저에게서 다시한번 세상에 표출코 싶지 않습니다.

 

주여

주님이 말씀하시는 그 심령의 천국을

저에게 이루소서.

날마다 저에게 임하게 하소서.

전요

혼자로서는 아무것도 할 수 가 없습니다.

주 안에서 발견되기 위해서는 율법적 의가 아니고

오직 주님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의로 뿐이라고 하신 것.

그 말씀을 강력히 믿고 의지하오니

주여 절 말씀하실 때 의롭다 하시고

늘 깨끗게 하시고

세상의 허탄한 것으로 오염되지 않도록 도우소서.

주님 곁에 갈 때 까지 말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순종은 모든 문을 열수 있는 만능 열쇠다.

- 조지 맥도널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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