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무슨 일에도 주님 ( 왕상1:40-53 ) 본문

구약 QT

무슨 일에도 주님 ( 왕상1:40-53 )

주하인 2010. 9. 4. 09:48

제 1 장 ( Chapter 1, 1 Kings )

 

 


 
 
41.  아도니야와 저와 함께 한 손들이 먹기를 마칠 때에 다 들은지라 요압이 양각 소리를 듣고 가로되

     성중에서 소리가 어찌하여 요란하뇨 
 하나님 백성의 소리에 불신자들은 떨어야 한다.

  
  
 
45.  제사장 사독과 선지자 나단이 기혼에서 기름을 부어 왕을 삼고 무리가 그곳에서 올라오며

     즐거워하므로 성중이 진동하였나니 당신들에게 들린 소리가 이것이라 
그러기 위해서는 '기름 부음'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그로 인하여 절절히 즐거워해야 한다.

즐거워 질 수 밖에 없음을 나도 알고 남도 안다.

그 즐거움이 얼마나 즐거운 지 세상이 진동하고

그 즐거움이 세상에 퍼져야 한다.

불신자들이 알아야 한다.

그들이 '교회 '다니고 '예수님 ' 잘 믿는 자들의 축복이 어떤 지 알아야 한다.

겨우 돈이나 명예의 축복이라면

불신자들도 한다.

그들이 더 잘 먹고 잘 사는 경우도 있다.

그것이 '지옥'의 길이라는 것이 다르긴 하지만.. 
 

 
 
48.  이르시기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여호와께서 오늘날 내 위에 앉을 자를

     주사 나로 목도하게 하셨도다 하셨나이다 하니 
  다윗이 이런다.

' 여호와 하나님을 찬송하자.

오늘 날

내 위에 앉을 자를 주셨다.
그것을 드디어 보게 하셨다.'

 

 나이가 들어도 은퇴 못하는 경영자들이 많다.

삼성가의 고 LBC님도 다시 복귀하셨던 경력이 있으시고

돌아가신 H가의 JJY님도 그러셨고

수많은 역사 속의 황제들과 왕들이 섭정을 하려 했었고

병원가의 유명한 리더들도 오랫동안 권좌에서 물러나지 않은 이야기를

주위에서 보고 있기도 하다.

무엇이 문제던가?

 다윗의 상황을 보면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육신 안에 갇혀 고립되어가는 '자아'.

외로움이다.

그 외로움을 이기지 못하여 더 큰 관심과 칭송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들은 그 외로움과 허전한 허탈함 만큼

더 외부적으로 자신의 존재를 표현할 필요성에 갈급해 하고 있다.

'존재감'

 

그러기에 다윗의 이 장면이 감동스럽다.

그는 하나님과의 동행으로 풍성한 영적 충만함에 있다.

그러기에 그는 '후인'을 세움에

하나님께 감사하며 감격하고 있다.

그 감격이 자신이 인위적으로 날짜 잡고 대관식하며

물려 주고서는 우는 울음이면

어쩌면 또다른 자신의 나타내고자 하는 의욕에 의할 것이라 추정할 수 있지만

이분 다윗은 기다리고 기다리며 흐름을 알아챘다.

아도니야의 반역은 그분, 다윗,. 영성이 뛰어나신 분에게는

당혹할 일이 아니고

이제 솔로몬을 왕위에 세울 하나님의 뜻이 도래했음을 알았던 것이다.

그런 그에게서 '지혜가 흘러나온다.

그리고는 그에게 더 이상 '세상의 왕위'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자연스레이 솔로몬을 추대하고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응하여

이제 곧 소천할 날을 기쁘게 맞이하는 것이다.

얼마나 멋진가?

얼마나 대단한가?

그의 수많은 대단한 일 중에서도

아무렇지 않을 듯한 이 흐름 속의 기뻐함이 더 대단해 보인다.

가장 인간의 기초적인 본성, 늙음에 대한 두려움,

외로움에 대한 두려움

과시 욕구

통제의 욕구를 벗어 버릴 수 있는 그 자연스러움이

정말 대단한 능력이 아니던가?

'성을 지키는 것 보다 마음을 지키는 것이 더 대단하다'고 성경 어디엔가 나온다.

그는 지키는 수준을 넘어서

하나님의 뜻에 흐르는 자다.

 

 리처드 포스터의 '단순한 삶' 에 대하여 읽었다.

그게 그것이다.

하나님의 뜻에 절대 순종하여 만들어지는 '단순함' .

미련한 단순과는 차원이 다른

복합적이지만 단순한

오직 하나님의 뜻 하나로 단순해지는

역설적인 그 삶.

그게 다윗에게서 보인다.  
  
 
50.  아도니야도 솔로몬을 두려워하여 일어나 가서 제단 뿔을 잡으니 
 '제단 뿔'을 잡다.

잘못한 자가 하나님의 제단에 가서 죽도록 주님을 붙드니

솔로몬으로 부터 죄 용서를 받았다.

 죽도록 그래야 한다.

 

열심히 묵상을 하다가

환우 분이 상담을 요청하러 오는 데 가족 모두가 우루루 들어오신다.

상담하러 오신게 이전에 다 설명한 것이다.

설명한 거 또 설명해도 또 되풀이 묻는다.

짜증이 올라온다.

' 아...이전에 다 설명했는데.....

 악성 아녜요.. '

그래도 퍼지지 않느냐 또 묻는다.

짜증난다.

점차 내 목소리가 높아진다.

그리고 그들이 갔다.

왜 화가 나려 하는가?

무엇이 문제이길래 늘 온유해야할 내가 '되풀이'되는 질문에 짜증이 나는가?
짐작이 가는 바 있다.

짜증 올라오고 나면 '죄스럽다'.

 묵상을 진행하다가 저러다니..

가만히 다시 들여다 보았다.

'제단 뿔' 잡는 아도니야가 보인다.

미련스럽고 욕심많은 자 지만

'제단 뿔'을 웅크려 잡는 그의 모습이 왜인지 잘 했다는 생각이 든다.

 주님을 붙들어야 한다.

미련스럽게 붙들어야 한다.

아도니야가 미련한 자고,

나도 스스로 보기에 미련하게 '과거의 악몽'을 되풀이 현실에 투영시켜

짜증을 부리는 '미련한 자'라 스스로 느껴지지만

제단 뿔을 붙들면 용서가 된다.

 무슨 일에도 주님이다.

어떤 일에도 주님이 시작점이 되어야 한다.

다윗은 주님이 축복의 시작이고

아도니야는 주님이 용서의 시작이다.

 나.

다시금 제단 뿔을 더 잡아야 한다.

하나님을 붙들고 놓치 말고 부둥켜 안아야 한다.

 


  주님.

귀하신 주님.

내 하나님이시여.

회개합니다.

믿는 자로서 주님의 향기 드러낸 적 별로 없는 오늘 반나절이 지나갑니다.

주여.

성령으로 기름 부음 받은 저 인지 잊지 않게 하소서.

그래서 주님 향기 드러내

주위의 불신자들이 주님 믿는 사람이 저래야 한다는 것을 잊지 않게 하소서.

주님.

귀하신 주님.

주님 뜻대로 살기 원합니다.

그러나 절 붙들고 늘어지는

죄의 유혹들이 있습니다.

상처 통해 품어 나오는 괜한 짜증이 있습니다.

그리고 나면 아픔을 견디지 못합니다.

그럴 때 제단 뿔 잡게 하소서.

주님

좋은 일도 주님이고

나쁜 일도 주님이고

모든 일에 주님이 전제가 됨을 잊지 말게 하소서.

좋은 일을 감사함으로

나쁜 일은 제단 뿔 잡음으로 그리하게 하소서.

 다윗님의 올려드리는 기도를 닮게 하소서.

주님 인도하심에 의하여 자연스럽기 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