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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여 늘 감사합니다. (시34:1~10)

주하인 2006. 12. 30. 08:44

2006-12-30 시편 (Psalms) 34:1~34:10

         

(다윗이 아비멜렉 앞에서 미친 체하다가 쫓겨나서 지은 시)

 

 
1. 내가 여호와를 항상 송축함이여 그를 송축함이 내 입에 계속하리로다
  

( 어두움 속에서도 타는 듯한 제 노래를 받으소서 .  주여... )

 

 

 그래 당연하다.

여호와를 늘 송축하고 싶다.

나도...

실제로 찬양을 좋아하고 거기서 은혜를 많이 받는다.

그러나

조금만 흐트러지면 어느 땐 좌절에 빠지고

멀리만 느껴지며  찬송은 참 부르기 어려워진다.

 다윗이 오늘 시작하는 시편의 시작이 은혜에 넘친다.

마치 성령충만할 때 하는 그런 고백같이 보인다.

그러나

아비멜렉에서 미친체 하면서 도망쳐 나왔다는 윗 부제의 설명을 보며 오히려 감동을 면치 못한다.

 " 내가 여호와를 항상"

그냥도 아니다.

항상이다.

찬양이라는 표현 보다는 송축이라 썼다.

사전에는 송축을 '경사를 기리고 축하함'이란 뜻이며 송축을 의미하는 extol 이라는 영어 단어는 '격찬'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또한

" 그를 송축함이 내 입에" " 계속" 이라는 표현도 했다.

내 입이라는 소리는

당연히도 노래가 입에서 나올것을 한번 입이란 표현을 더 했고

자신이 하는 것이 너무도 당연할 것을 '내'라는 말로 강조했으며

"계속"한다는 것으로 보아

다윗의 주님에 대한 사랑은 환경이나 상황에 상관없는 강력한 기쁨을 의미한다.

그의 변치 않는 깊은 신앙심이 그대로 느껴진다.

 아니 , 주님에 대한 열렬한 사랑이 느껴진다.

  그런데 이러한 격렬한 사랑이 혼자만으로 가능한가?

짝사랑이나 스토커의 질김도 그런 격렬한 외부적 표현으로 나올 수 도 있겠다.

하지만 ,거기에는 오늘 보이는 순수한 기쁨의 느낌 보다는 어두움, 두려움, 집착이 있을 뿐이다.

오늘 다윗이 수차례 강조 강조 표현하는 순수한 열정은 없다.

 

 아침에 버스를 타고 왔다.

차 안에서 묵상집을 펴 들었다.

복잡한 머리를 비집고 들어오는 윗구절

내가 지향할 심사로 보여 참으로 기뻤다.

 

가슴이 뜨겁다.

어찌 다윗의 수천년 전의 심사가 나를 대변하는 것 같은고...

허..

 

 

 

2. 내 영혼이 여호와로 자랑하리니 곤고한 자가 이를 듣고 기뻐하리로다  
 영혼 가득히

우리 주님을 자랑하고 싶습니다.

진심으로

다윗이 그 모진 수모 가운데서도

오히려 주님을 자랑하는 그 자랑을 체득하고 싶습니다.

아버지 주님이시여

비록 힘들더라도

그 자랑하는 비밀을 배우길 원합니다.

아..

그래서

나처럼

아니

나보다 더 곤고한 자가 나를 보고

주의 살아계심을 알게 하소서.

그래서 끝없는 절망 속에서 보이는 한줄기 희망의 증표가 되게 하소서.

그들로 나를 보고 기뻐하게 하소서.

 

 

3. 나와 함께 여호와를 광대하시다 하며 함께 그 이름을 높이세
 주님 

이런 사람들과 함께 하길 원합니다.

내가 외치는 이 기쁨의 소리가

다윗의 미친 체하고 물러 나와 느낄 그 모독과 모멸감에도 불구하고 드리는 extol 을 보고

이상하다 느끼는 자가 아니고

오히려 '그래 그 사람이 왜 그런지 나는 알아..' 라고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자들..

그들과 함께 주님을 노래하는 기쁨을 공유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4. 내가 여호와께 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

( 이제는 어두움 속에서도 주님께 찬양할 준비를 하겠습니다.  쭈~욱  늘~~)

 

 

 이제는 주님이시여.

두려움은 더 이상 두려움이 아닐 줄 압니다.

지금까지 해 왔던 모든 일련의 습관적 상황 속에서도

그대로 두려움은 임하고

변함없이 보이는 상황일 지라도

실은

못 느꼈을 뿐

주님은 늘 옆에 계시고

나에게 항상 응답하길 원하고 계셨음을 다시금 확실히 느끼게 하소서.

그리하여

이제는 기도하면 응답하시고

기도만 하면 두려움의 어두움이 밀려 나가는 것을 알게 하소서.

 

 
5. 저희가 주를 앙망하고 광채를 입었으니 그 얼굴이 영영히 부끄럽지 아니하리로다 

 고통과 두려움이 더 이상 고통과 두려움이 아니고

오히려 주를 앙망하는 계기가 되었음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가슴보다 더 깊은 영혼으로 알게 하소서.

그리하여

우리의 육신이 빛나게 하소서.

얼굴이 밝게 하소서.

그게

남들이 보기에 광채로 보이게 하소서.

내 스스로는 부끄럽지 않게 하소서.

 비록

난 혼자 있는 듯하고

나 만 소외되어 있는 듯한 상황일 지라도

내가 주를 사랑하고

주님이 날 위로하시니

난 늘 기뻐 어쩔 줄 모를 상황이 될 줄 믿나이다.

주여.

주를 송축하길 원합니다.

주를 격찬하길 원합니다.

얼굴이 그리 밝게 하소서.

 

 

 
10.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젊은 사자는 힘이 넘치는 존재다.

위용도 대단하다.

그래서 뭐든지 자기만 믿을 것이다.

손수 뛰어 다니고

손수 소리지르고

손수 멋부리고

가끔은 해가 뉘역한 저녁 노을 아래서  잡은 동물 위에 발올리고 하늘 쳐다보며 갈기 휘날리며 멋진 목소리로 포효 한번 하면 그 얼마나 멋진가?

황금빛 갈기와 어우러지는 석양의 붉은 핏빛이 만들어 내는 환상의 칼라가

마침 한 줄기 바람이라도 불어 그 황금 빛 갈기 한올이 공중으로 휘날리면 훨씬 더 환상적인 모습이 되겠지...

 그러나 이처럼 대단한 사자가 항상 배부르지 못한다.

오히려 굶는 경우가 더 많지.

나이 들어 하이에나 떼에게 몰려 죽는 건 다반사다.

 

 인간의 힘을 의지하고

자아의 위용을 자랑하는 것은

쉽고 편하고 멋져 보일런지 모르지만

그것은 궁핍과 주림과 사망을 의미한다.

 만일 다윗이 자신의 잘생기고 사람 잘따르는 인기를 자랑하였었더라면

오늘 상황에서 찬송이 나올까?

얼마나 마음은 찢어지고 다양한 생각이 돌았을까?

그 잘생긴 얼굴이 얼마나 씰룩 거릴까?

눈에는 눈물이 일다가 갑자기 좌우로 쫙 찢어지며 살기가 돌다가 어느 순간 포기하는 절망의 빛이 그 눈에 어리면서 복잡한 마음이 들어나지는 않지 않을까?

 거기에 무슨 행복이 있고 비록 입에 혹시나 고기 가득 베물었어도 배부름이 있을까?

 

 진실한 행복자는 오늘 다윗과 같아야 한다.

살기 위해 미친 척하기는 했어도 부끄럽지 않고

쫓겨나도 미래가 긍정적이고

먹은 것 없어도 든든하고

돈 없어도 풍족하고

눈물은 주님으로 인하여 기뻐서 흘리는

그런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게 바로 행복 아닌가?

 

행복은 다른데 있는 게 아니다.

내 외모나 가진 것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냥

이름 만 불러도 노래가 나오고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날 기쁜 대상이 있고

스치고 지나는 생각 만으로도 가슴에 끓어오를 열정의 대상이 있으면 그게 행복이 아닌가?

더구나

전능하신 그 분이 내 일생을 다 책임질 보장이 있으니

그 얼마나 행복인가...?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기도

 

그렇습니다.

주님

난 주님을 사랑하기를 원합니다.

주님으로 인하여 찬양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비록 쫓겨나는 듯

가난한 듯

아무것도 없는 듯 하여도

주님께 기도하면

내 마음이 기쁨으로 차기를 원합니다.

늘 

주님을 열정적으로 찬송하면서 살기를 원합니다.

그게

타는 듯한 내 가슴의 열정으로 인하기를 원합니다.

주님.

주님을 간절히 찾고 찾을 수 있기를 원하오니

저에게 주님의 완전한 행복을 늘 체험하게 하소서.

찬송하게 하소서.

송축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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