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주여 내 아픔을 기억하소서 ( 애 3:19-39 ) 본문
제 3 장 ( Chapter 3, Lamentations )
벌레.
징그럽지만
나에게 직접적으로
아무 영향을 미칠 수 없는 것.
상처
아프고 힘들었지만
나에게 직접적으로
아무런 영향을 미칠 수 없는 것!
아니 없을 것 !
하지만
나의 선택이
반드시 필요한 것!
19.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내 고초와 재난을
상처로 바꾸면 어떨까?
'주님 내 상처를 기억하소서 !
주님 내 아픔을 기억하소서 !
주여 내 고통을 기억하소서 ! '
20. 내 심령이 그것을 기억하고 낙심이 되오나
상처가 무엇인가?
성장과정에서 얻어진 '의미있는 타인'-가까운 ,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자들- 에 의하여
충격적인, 혹은 지속적인 감정적 육체적 타격을 받음으로써 얻은
감정적 영역의 고통.
삶의 전 영역동안 비슷한 상황에 도달할 때마다
끊임없이 되풀이 됨으로 가져오게될 고역, 고통.
마치 공중에 테이프 틀어 놓은 듯
비슷한 순간에 도달하면 '심령에 기억되고 낙심되게 '만드는 족쇄!
21. 중심에 회상한즉 오히려 소망이 있사옴은
그 상처가 비단 몇몇 분의 특수 상황은 아니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내적치유'나 '상담'의 이름으로..
불신자들의 '우울증'이나 '자살'... 의 이름으로 들먹여지고
중독적 성향, 말초적 만족의 추구로 빠져듦은 모두 '상처'의 이유다.
그러나, 오늘 말씀이 좀 이상한 듯하다.
상처가 오히려 소망이란다.
이것은 심오한 의미를 담고 있다.
'중심에 회상'하라신다.
중심에 회상함'이라는 뜻은
이 상처에 의한 고통은 도망가거나 변방적이고 말초적인 처방,
즉 원인을 깨닫지 못하고 단순한 상담이나 내적치유에 의존하려는
의지형 처방은 일시적인 회복은 있을 수 있을 지 모르지만 근본이 아니기에
중심을 알아야 한다는이야기다.
주님은 본질에 고통, 상처를 통하여 주님의 뜻의 본질에 도달하길 바라시는 뜻이시다.
짧은 글로써 모두를 이해시킴은 어찌 가능키나 할 것인가?
하지만 원칙이 이것이다.
중심에 놓여진 원리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무슨 일,, 어떤 상황,
비록 그게 상처고 과거의 성장과정의 비밀한 이야기라도
주님의 뜻에 놓여지지 않은 것은 없다는 것이다.
그 뜻을 우리가 몰라도..
중심에 회상이라는 이야기는
'하나님을 전제로 한 직면'과 그에 따른 '선택'을 이야기 하시는 것이다.
어려운가?
어렵다.
하지만 쉽다.
수년 전 내적 치유에 관심을 가졌던 적 있다.
정모 목사님의 상담 프로그램..
교회의 12단계, 현실 요법.......
그런데, 시간이 지나다 보면 공통점이 있다.
그들 모두 이렇게 이야기 한다.
' 하나님 이란 이름 뒤로 숨지 말라'라 한다.
그래. 맞다.
상담적 이야기로 보면 하나님이라는 그늘 뒤에 숨길 것은 숨기는 것은
자신을 직면하는 데 참으로 어려운 회피가 될 수 있다.
맞기는 하다.
중심에 도달하기 위하여서는 우선 솔직히 자신을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아프다고 숨을 때 회복이 될 여지가 없다.
이것은 '상담 프로그램'의 대부분이 심리를 중점으로 하기에
인본위주의 접근을 할 수 밖에 없고
아무리 내적 치유니 교회에서 시도를 하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접근을 해도 잘못하면
인간 위주의 변방-심리-에 돌다 말 위험성이 아주 농후하고
그러다 보면 그것은 '하나님'은 별거다..라는 묘한 메시지가 영혼에 박힐 위험이 없지 않다.
그 의도는 분명히 아님을 알지만..
하지만 그 과정에서 난 확실히 배운 것은 있다.
'주님을 놓치면 안된다.
모든 것은 선택이다.
하나님의 원리가 우리의 자유 의지를 바탕으로 펼쳐지기 위해서는
우리 내면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한다'
그러면서 그 즈음 시작되던 '큐티'에 내 중심을 바치기 시작했다
수년 후 그 당시 같이 공부를 시작했던
정말... 상처가 많으신 분들은 아직 큰 변화가 없음을 보고 있고
인도자께서는 '불교'에 심취하고 계심을 보며
난 내 선택이 옳았음을 기뻐하고 있다.
솔직히 '상처'라는 말은 인격에 문제가 있다는 말과 그리 틀린 말은 아니며
인격의 부분을 고침은 그리 쉽지 만은 아님을 얘기하는 것이다.
인격은 영혼의 틀을 나타내는 것이고
영혼의 틀이라는 이야기는 심리 보다는 더 깊은 부분을 의미한다.
그 영혼 부분은 '심리 상담'으로는 불가할 수 있다는 것이고
온전히 '주님'을 의지해야할 -누구나 다 그렇지만 , 치유라는 관점에서 말이다 - 당위성이 있다는 이야기다.
주님을 가장한 내적치유가 아니고
내적치유 등의 심리적 이해 + 우리의 선택 +++++ 하나님..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상처가 반드시 고통일까?
난, 그 상처로 인한 대인 공포증상이 있었다.
지금도 좀 있다.
고통스럽기가 말도 못한다.
남들은 평범하게 할 부분에서 두렵고 힘이 드니
두려움도 두려움이지만, 그안에 따라오는 자괴감, 외로움,.. 은 짐작하기 힘들 고통이다.
늘 원망이고 부정이었다.
그러다가 주님의 말씀이 내 영혼에 들어오면서
난 고통이나 두려움에 비례하는 어떤 소망이 내 영혼에 들어옴을 느꼈다.
평안해질 때마다 더욱 더 평안해졌다.
그것은 고난과 더불어 '위로'가 넘친단 성경의 말씀과 하나도 다름없었다.
샬롬이, 평강이, 천국이 어떤 것이란 것을 느끼는 단초가 되었다.
내 심성은 더욱 아름다와 짐을 느끼고 있다.
어느 분의 말씀인가에서
나와 같은 상처로 인하여 고통을 받는 자들은
역으로 '날마다 하나님의 나라를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 자고
그것은 그러한 경험을 통하여
고난을 받는 자들의 위로자가 되게 하려는 주님의 뜻이라는 것을 알았다.
공감한다.
고난을 겪어 보지 못한 자들..
특별히 부유하게 큰 분들,
영적으로도 수세대에 걸쳐 큰 고민없이 주님을 받아 들인 자들이
리더 그룹에 서면서
그들의 독단과 전횡에 가슴아파 한 경험이 있어 보아서
고난은 성숙과 일치함을 절절히 알고 있다.
최소한 난 그렇다.
내 두려움은 나에게 사회적으로는 큰 마이너스 였지만
그 모든 것을 넘어서는 어떠한 보상 이라는 면 - 통합적인 의미다.
영적이고 감성적인 면, 말씀을 체험하는 면에서
그리고 의학적 기술, 재정적 안정, 악기를 배우게 됨, .....세상적인 성취도 면에 있어서도
난 누구보다 놀라운 체험을 하고 있다. -에서는 난 엄청난 이익을 보고 있다.
난 '소망'이 있다.
인생이 아무 의미가 없는 혐오성 세계관이나
세상에서의 성취를 오직 긍정적 '심리'를 가지려는 노력에 의해 악착같이 성취하려는 ...
그래서 그 다음에 남는 게 없는 '유물론 적 세계관'을 가진 자들뿐 아니라
기독교인 도 마찬가지다.
( 하나님을 앞세우지만 긍정의 힘 만을 강조하는 것은 또 다른 아론의 황금 소 아닌가 걱정이 된다. )
그런 자들의 불쌍한^^;; 목표의식 보다는
훨씬 안온하고 평안하고 차분한, 그러면서 기쁜 '소망'의 세계관이
내 속에서 이 아픔덩어리 상처의 대명사 '주하인'에게
생기기 시작했다는 것이 훨씬 다행이라는 생각이다.
소망이다.
주님은..
22.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오케이 바리.
당연하다.
체험하지 못하는 머리속의 고백이 아니다.
매일 체험한다.
23.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
24.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저를 바라리라 하도다
25. 무릇 기다리는 자에게나 구하는 영혼에게 여호와께서 선을 베푸시는도다
'주의 인자는 끝이~~없~고~
... 아침 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니.. ♬'
찬양을 올리려 했지만 찾기가 어렵다.
고난을 겪는, 그래서 눈물의 선지자라는
예레미야 선지자의 고백이라고 생각이 드는가?
아침마다 새롭고..
언젠가 부터 아침에 10-30 분 정도 묵상을 하고 나오는 것이 버릇이 되었다.
그냥 아무 생각 않는다.
하나님 만을 묵상하고 가만히 있으면 내적으로 충만한 느낌이 있으면서
사우나 하고 나온 것 보다 훨씬 개운한 기분이 날 사로잡는다.
사우나는 잠시지만 그 기분은 오랫동안...
바로 어제 묵상 까지도 울고 불고 하던 예레미아님의 입에서
이러한 고백이 나온다.
이해가 가는가?
고난과 고통이 극에 달하던 자가?
위의 내 경험을 이해하는 자다.
이 분은...
주님은 수천년을 격하고 공감하게 하시니 놀랍지 않은가?
26.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상처와 고난에 대하여 치료나 도움이 필요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절대로 '기도'만으로 이겨내야 한다.. 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분명히 위에 썼지만 인간의 심리의 흐름에 대하여 통합적 이해가 있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심리학적인 스스로의 이해가 필요하다.
단, 모든 것을 이해한 후에 '주님의 말씀'앞으로 고착이 되어야 한다.
절대로 사람을 의지하거나 , 그룹이나 모임의 도움에 의존하거나
과거에 매달려 원망이나 투사는 도움이 안된다.
이게 비단 상처 뿐인가?
난 그리생각한다.
주님이 원하시는 원리를 깨닫게 하기 위하여
나에게 상처를 허락하시고 '대공'을 허락하셨다고...
믿음의 원리가 내 아픔 속에서 다 이해가 되니 어쩌겠는가?
주님 앞에 잠잠함.
내려 놓음.
이게 기본 원리다.
아주 좋은 세상의 방법이 있고 세게 기도하면 무엇하는가?
그게 주님의 뜻인가 내 뜻인가가 중요하고
주님을 뒤서게 하는 것이 아닌가가 중요하다.
더구나.. 기다림은 필수의 인내다.
27. 사람이 젊었을 때에 멍에를 메는 것이 좋으니
보라.
위에 주~욱 늘여 쓴 나의 고백이 일치하지 않는가?
성경에 바울사도께서
'우리의 고난 뿐 아니라 위안을 위해서도 부르심을 받았다'라고 나온다.
젊었을 때 멍에를 매는 것.
난 내 'phobia'가 멍에 였고 훨씬 덜하지만 아직도 나에게 남아 있는 멍에다.
그 멍에가 그리 나쁘지 만은 아니했다.
오히려 젊었을 때는 멍에를 매는 것이 좋다하신다.
'젊었을 때'라는 말에 '덜 젊어져' 가는 ^^* 나는 소망이 있다.
이제는 깨달음을 통하여 서서히 고통마져 가라 앉을 것이라는 암시가 아니신가?
소망이 하나 더 늘었다.
외워야지..
28. 혼자 앉아서 잠잠할 것은 주께서 그것을 메우셨음이라
혼자 앉아서..
혼자 하라는 이야기가 아니시다.
인간을 의지하고 의존하지 말것을 이야기 하시는 것이다.
순서를 이야기 하시는 것이시다.
내려 놓음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잠잠하라신다.
잠잠은 아픈 자들에게는 힘이든 요구가 맞다.
힘이 들고 어려운데 신음소리를 어찌 안낼까?
내면 혼내신다는 의미가 아니시다.
그 분이 그들의 아픔을 무시하거나 냉정하시다는 이야기가 아니시다.
주님은 주님의 뜻 안에서 '순서'를 회복하라는 말씀이다.
그 말씀을 순종하여 기다리는 노력을 하는 순간,
그 결과에 상관없이 회복을 시켜주신다는 약속이시다.
잠잠하라.
주하인아...
주님이 메우신다.
주님이 채우신다.
소망이다.
희망이다.
29. 입을 티끌에 댈지어다 혹시 소망이 있을지로다
30. 때리는 자에게 뺨을 향하여 수욕으로 배불릴지어다
오늘 개인적으로 말씀하신다.
원리에 대하여 잘 이해하고 있으면서도
주님의 뜻 안에서 행치를 못하는 부분이 이것이다.
아직도 날 모욕한다고 생각되는 부분 - 과거의 내 상처 탓일 수도 있을..^^;;- 에 화가 솟구치려는 경험.
이제 영혼의 흐름을 다시 주님 안에서
주님이 말씀하시는 대로 맡겨야 한다.
뭐라하면 오늘 하루 이 말씀을 적용하여야 한다.
때리는 자에게 얼굴을 돌리고 그들의 모욕으로 배불려야 한다.
넘어지면 티끌에 입을 댈 것이다.
더 낮추고 당연히 받아라.
그것이 주님이 고통에 대하는 나의 태도이시다.
31. 이는 주께서 영원토록 버리지 않으실 것임이며
32. 저가 비록 근심케 하시나 그 풍부한 자비대로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이해를 넘어서서
더욱 더 적극적으로 주님의 뜻을 적용할 때
주님께서 날 영원한 생명 가운데 세우실 것이고
근심 중의 주님의 풍부한 자비와 긍휼의 샬롬을 더욱 느끼게 될 것이다.
33.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
그게 본심이 아니심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나는 더욱 더...........
적용
1. 성경 일곱 장 읽겠다.
성경의 말씀 만이 진실이고 진리다.
2. 고난이 유익이다.
적극적으로 이해하자.
3. 티끌을 입에 댈 각오로 있자.
모욕을 당하면 피하려고 몸부림치거나 슬퍼하지 말자.
성질 내지 말자.
오히려 주님의 소망으로 그냥 티끌에 입을 대려는 마음으로 하루 지내자.
잊지 않도록 도우소서. 주여.
4. 때리는 자에게 얼굴을 대자.
수욕으로 배불리자.
^^;;;
5. '혼자 앉아서 잠잠하자'
주님이 메우실 것이다.
6. 주님 기억하소서.
내 고난이 주님의 본심이 아니셨음을 믿는다.
기쁘게 받자.
기도
주여
아프지만 많은 위로가 됩니다
약할 때 강함이라는 제가 제일 좋아하는 구절이랑 어찌 그리 통하는 지요...
주여.
특별히 오늘은 티끌에 입을 대라 셨네요.
혹시 주께 소망이 있을 거라는 말씀을 하시네요.
때리는 자에게 얼굴을 들이밀고
수욕을 배불리 먹을 마음을 가지라 하시네요.
마치 예수님께 주문하시는 듯한 말씀입니다.
이리 힘든 것을 어찌 저처럼 성질 덩어리 주모에게 말씀하시나이까?
도저히 불가능한 이야기 아니신지요.
그럼에도 주님이 다 아신다니 주여 감사합니다.
젊은 적의 멍에는 누구에게나 소망이 된다시니 또 감사합니다.
젊을 적 부터 덜 젊은 지금까지 멍에를 메고 있는 저에게 위안이 됩니다.
주님.
이제 덜 젊으니 곧 멍에를 벗기실 의미도 되리라 믿습니다.
소망을 가집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주의 뜻대로 살아가는 제가 되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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