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 주님 연출 제작의 대하 사극 드라마 -대탈주 (삼하17:15-29) 본문
주연 다윗
조연 사탄
연출 하나님
시나리오 하나님
관객 주하인 외 큐티방 임원 이하 블로거
상영관 Hiss Hers & 나만의 극장
부제 :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하나님께
오늘은 한편의 대하 사극 드라마를 보는 긴박감이 몰아친다.
후새는 천연덕 스럽게 잘못된 계책으로 혼란을 조성한 후 슬그머니 점잖게 무리를 빠져 나온 후 .. 나오자 마자..... 꽁지가 빠지게 자기 집으로 직행한다.
얼마나 빨리 서둘렀는지.. 후새가 달리는 바람에 아마도 포장 되지 않은 당시의 도로엔 먼지가 자욱했으리라 생각된다.
그리고는 급히 두 제사장을 호출한다.
초조하게 기다리던 그는 그들이 들어오자 급히 잡아다녀 식탁 한 구석에서 머리를 맞대며 소근 거린다.
자초지종을 얘기한 후 그들에게 명하여 다윗에게 사람을 보내어 급보를 알리도록 지시한다.
어둠이 깃든 후새의 집 거실에는 타는 촛불의 자욱한 향내와 더불어 깊은 긴박감이 어린 세사람의 초조한 얼굴과 함께 밤이 깊어간다.
장면이 바뀌면서... 요나단 등은 들킬까봐 조심스레이 성밖에 머물고 있는 중이기에 후새 일행은 어두워진 야음을 틈타 그들에게 여종을 보낸다.
다윗에게 상황을 알릴 목적으로...
하나님의 역사로 진행되는 일에도 마귀의 방해는 집요하다.
아마 어제의 대 반전이후 안심하고 있었던 마귀 사령부에서도 엄청난 대책회의가 있었던 모양이다.
잠못 잔 마귀들의 눈은 게슴츠레하고 벌~겋다.
눈꼽도 낀 마귀참모도 보이고..ㅎㅎ
( 원래 마귀 눈은 그런가?ㅎㅎ)
아마 사탄과 참모 마귀 사이에서 이런 결론이 맺어진 듯하다.
' 조금의 눈도 떼지 마라.
철벽수비를 해라.
조금의 이상기미라도 있으면 즉시 알려라. ~ !!!'
그리고 나서는 후새 진영에 눈을 떼지 않고 있던 한 사람이 .. 한밤에 급히 서둘면서 나가는 여종을 수상히 여겼다.
그래서 뒤따라 갔다.
여종과 밀회하는 그들을 현장에서 발견하자 마자 급히 사람들에게 알린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가만히 계시는가?
전지 전능하시고 ~ 만유의 주재이시며~ 모든 능력의 근원이시자 ~ 천하 만군
의 대장이신~ 우리 위대하신( ㅎㅎㅎ 어디서 많이 듣던 표현이다... 북쪽 김정일..ㅎㅎ) 주님께서는 가만히 계실리가 없다.
아마 '씨익'하고 웃으셨을 것이다.
그리고는 그 두사람에게 어떤 급박한 신호를 느끼도록 하셨을 것이다.
요나단과 아히마스 두 사람은 갑자기 어떤 느낌이 왔다.
충격 비슷한 띵~하는 느낌.
그리고는 알게 모르게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하고 손발에 약간의 땀이 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둘이 얼굴을 마주치며 동시에 뛰기 시작했다.
주님은 신호로 그치지 않으셨다.
그들을 알지 못하는 바후림의 어떤 집으로 그 발길을 향하게 하셨다.
아무리 친한 사람이라도 동업하면 90%가 싸움나고 망한단다.
이처럼 천천히 진행되는 일도 보조 맞추기가 힘든데... 마구 놀라서 달아나는 자들이 전혀 알지 못하는 어떤 바후림의 집으로 힘껏 뛰면서 발 맞추는 것이 과연 기적이 아닌가?
하나님의 손길이 이처럼 우리가 상식이라 생각 밖에 못하는 기적이 상식적 상황을 통해서 임하시기도 한다 생각이 안드는가?
이것은 기적이고 이것은 주님의 손길이다.
또한 기다렸다는 듯이 우물로 뛰어 들어갔다.
그러자 각본에 의해서 연습했다는 듯이 여인이 나와서 그 위를 덮고 곡식을 뿌려놓는 기막힌 시간적 배려와 재치와 재미와 극적인 고조가 이루어진다.
이게..
수십차례의 연습과 대사처리와 표정연기를 통해서도 손발이 맞지 않아서 NG 나는 게 현실인데..
어찌 모르는 여인이 조렇게 조 처럼..
주님의 손길이 아니라고 할수 있나?ㅎㅎ
그리고는 주님은 가만히 두셨다.
그러자 우리의 뒷북만 치는 마귀..
자기가 잘난 줄 알고 다윗을 궁지에 몰아넣었던 마귀의 전략가들의 지시를 받은 압살롬 종의 무리들이 쫓아왔다.
신기하기도 하지..
우습기도 하고.. ㅎ
그러나, 역시 하나님의 지혜를 받은, 혹은 순발력 넘치는 여인네 집으로 주님이 인도하셨 든.. 각설하고 .. 거짓말을 멋지게 함으로 (주님의 허락 맞지 않은 거짓말은 안됨.ㅎㅎ ) 위기를 벗어나게 하신다.
마귀진영은 쑥밭이 되었다.
대장 사탄 마귀가 대노(大怒)했다.
누군가에게 '시말서'를 받도록 하였다.
퍼뜩 떠오른 인물 ~ '아히도벨'
그의 마음에 악감을 쏟아부으며 부담감을 주었다.
'넌 안되어. 네 한계야. 넌 부족한 놈야. 너 그봐라. 그렇게도 잘난척하더니 이 결과가 무어냐. 후새 그 부족한 녀석을 못이겨?.....'
정말 이 정도의 상황에 아히도벨이 죽을 정도였던가?
그가 그렇게 마음 심약한 사람인가?
그러나 그는 자살해서 죽었다.
이게 마음의 장난... 급성 우울성 발작.. 마귀의 장난이 아니라구 누가 하겠는가?
(우울증 .. 얼른 얼른 치료합시다. 예방이 최고고 !!! )
이 한편의 사극 드라마의 소란을 거친 후 그들은 다윗에게 알리고 다윗은 안전가옥
'마하나임'으로 자리를 옮긴다.
이제야 위험이 정리된 것이다.
마하나임은 주님의 철저한 도우심에 의해 옮겨 주신 고난 탈피용 일시 거처인 셈이다.
고난이 올 때 그 고난이 벗어나지며 해방의 때가 있을 수가 있다.
그러나 그 해방의 때가 모든 회복을 암시하는 것은 아닐 수도 있단 것이다.
더 좋은, 더 큰 축복과 평강은 아직 남아 있을 수도 있기에 지속적으로 주님을 사모해야 하는 것이다.
어찌 되었든 다윗은 마하나임에서 또한번의 기쁨을 맛보게 된다.
인간을 통한 위로.
이 모습을 통하여 난 솔직히 좀 시험에 들었다.
잠시지만..
난 솔직히 대인 관계가 그리 좋은 편은 아니다.
좋은 사람 몇 사람만 사귀는 편이었다.
그러다 보니 내 위급 지경에 다윗처럼 저런 융숭한 대접을 받을 수가 있을까?
아니었다.
속으로... '아... 주님의 축복도 완벽한 신앙인에만 있게 되는 가 부다...'하는 약간의 좌절감.
그러면서 더 '인간적으로 열심히 위급상황을 대비한 노력...봉사.. 해야 되나?'
하는 생각이 밀려왔다.
그러나...
주님은 곧 대답을 주셨다.
다윗은 개인적인 노력으로 인간관계의 폭을 넓히고 네트워크 형성하려 애쓴 것이 아니다.
그는 단지 사람을 볼 때 '하나님의 눈'으로 보았을 뿐이다.
의도적 노력은 없었다.
아브넬이 죽을 때도 그냥 주님의 뜻이 어겨진 것에 대해 슬퍼하였다.
므비보셋을 끌어안았다.
압살롬도 다시 받아들였었다.
시므이의 저주도 포용했다.
단지 다윗은 주님의 뜻에 어긋나는 일을 하지 않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주위에 사람들이 몰려든 것이다.
그의 인품에 감격하고 감동하여 ..
그는 겸손하였던 것이다.
겸손이란 하나님의 눈으로 나를 보고, 하나님의 눈으로 남을 본 다음..
나에겐 절제를 .. 남에겐 관용과 포용을 베푸는 것이란다.
이 아침
주님의 역사하심을 보면서 그분의 응답이 재밌기도 하고 다양하기도 하여 우리 인간의 상상, 특히 고난의 와중에 있는 사람들은 감정의 홍수에 빠져 이해할 여력이 더더욱 없어서라도 그 분의 응답내지 계심을 인지할 수 없는 경우가 많이 생긴다.
이런 경우 십중 팔구 믿음이 약한 상태는 한번씩 스쳐가는 의혹에 의해 이렇게 생각을 하게 된다.
최소한 이전의 내 경우는 그랬다.
' 아니.. 정말 주님은 살아계셔?
아니.. 왜 나만...?
나는 버려진 자 아냐?.........'
그러나 요사이의 묵상을 통해서 강하게 느낀 결론이 있다.
바로 이것이다.
주님은 결코 날 버리지 않으신다.
내 느낌과 상관없이 그 분은 작업하고 계신다.
그 역사의 결과가 너무나 자연스러워 마치 언제 응답받았는가 싶게 고난은 물러가고 어느새 상처에는 딱지가 앉게 되어 있을 것이란 것이다.
주님의 그 응답의 시간이 짧아지고 더 뚜렷하게 느껴지기 위해서는 ... 그래서 간증집회에 끌려다니는 행운을 누리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기도와 묵상.. 그리고 주님의 말씀을 준행하려는 용기가 필요하다.
또한 모든 일상의 행해지는 일이 우리 주님의 뜻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 마음 자세이며 내 주위의 모든 자들에게 주님의 눈으로 보는 겸손을 행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될 때 우리 주님은 더 드라마틱하고 더 빠르고 더 큰 축복을 주실 것이다.
단지 마하나임이 아니다.
그보다 훨씬 대단한 약속이 그 후에 있을 것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기도)
주님.
오늘 묵상을 통해 주님은 부족한 저에게 힘을 주셨습니다.
답답한 저의 가슴에 한줄기 기쁨과 웃음을 주셨습니다
흔들리려는 적은 믿음에 다시금 확신을 주셨습니다.
올바로 살지 못해왔던 제 중심의 삶에 교훈을 주셨습니다.
그 교훈 따라 살아야 할 당위성에 대한 인지를 허락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 후에 올 아주 큰 기쁨에 대해 소망도 주셨습니다.
감사하고 감사하신 하나님.
늘 주님 곁에만 있도록 해주세요.
늘 주님의 향기만 맡을 수 있도록 하여 주세요.
늘 주님의 품격만 사모할 수 있도록 해주세요.
늘 주님의 사랑만 사랑할 수 있도록 해주세요.
늘 주님의 긍휼만 간구할 수 있도록 해주세요.
그리하여
엄청난 고난이 와도 담대할 수 있도록 해주시고
온갖 풍파와 모함이 흔들어도 흔들리지 않도록 해주세요.
우울과 좌절이 밀고와도 웃을 수 있는 담대함도 주세요.
믿고 의지합니다.
믿고 사랑합니다.
믿고 기뻐합니다.
믿고 찬양하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고통을 다루는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라.
- 옥한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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