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사람을 움직이는 원동력(삼하16:15-16:23) 본문
23 그때에 아히도벨의 베푸는 모략은 하나님께 물어 받은 말씀과 일반이라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고 있다.
사람 마다 그들을 움직이는 기본 동력이 있었다.
압살롬은 자만과 욕심이었다.
아히도벨은 자신의 지혜에 대한 과신과 욕심이 아닐까?
(밧세바가 아히도벨의 손녀였다(삼하 11:3,23:34).
아히도벨은 판단력과 지혜가 뛰어났다. (삼하16:23).
이처럼 뛰어난 지혜자가
『어리석음의 형제』라 되어 있다.
무슨 얘기인가?
자기의 욕심이 동기가 되어 주님의 뜻보다는 자신의 지혜를
따르는 자란 얘기다. )
후새는?
후새는 다윗의 대한 충성.
다행히 다윗이 주님의 뜻대로 하는 사람인지라 후새역시 선한 영역에 속해있다.
이처럼 인생은 여러 사람들을 움직이는 동기에 의해서 엮어져 나가는 Interactive Rollplaying
game 처럼
느껴진다.
오늘 게임의 스토리는 '갈등 구조'이지만...
또, 오늘의 묵상에서 드는 의문이 하나 더 있다 .
왜 가장 선민이라 입버릇 처럼 자부하는 이스라엘 백성, 그중에서도 유다의 가장 핵심부에서
이러한 가장 비 신앙적인 일이 자행되고 있을까?
이 모습이 과연 이들의 아주 특별한 성향
탓일까?
그들이 과연 하나님을 처절히 싫어해서일까?
정말 마귀 영역이었을까?
현대의 우리, 특별히 오늘 묵상을 들여다 보고 있는 나를 포함한 내 주위에서는 동일한 일이 없다고 느껴지는가?
과연 그들을 보면서 교훈만 얻고 나는 안그래야지..하고 아멘..하고 일어날 수 있는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집회에서 예수님보다는 프로그램이 우선이 되고 있
지는 않은가?
교회가 예수님의 말씀이 폭팔적으로 힘을 발휘하고 성령의 은헤가 구름이 밀려 나오듯이 교회 문에서 밀려나와
눈물흘리며 많은 자들이 교회에 들어가 등록하여 대단위 교회가 이루어지 보다는.. 건물의 크기, 레포츠의 접목등에 의해서 이루어 지지
않는가?
( 대형교회가 절대로 나쁘다는 얘기는 아니다. )
단지 동기의 선후관계를 보고 있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어떠한가?
나의 찬양의 눈물이 내 감정적 만족에 의해서 이루어지지는 않는가?
내 기도가 나의 아들을 위해서 되어지고
주님은 단지 내 기도를 응답해주실 수
밖에 없는 심부름꾼의 역할로 전락해져 있지는 않는가?
내가 입을 들어 전도할 때는 어떤가?
난 이정도 했으니까.. 하는 자기
만족의 도구화 되어 있지는 않는가?
정말 나를 움직여 가는 가치관은 과연 무엇인가?
과연 나는 무엇때문에 사는가?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 가?
과연
나한테 천국은 어떠한 의미인가?
나는 주님이 어떠하신 분인가?
오늘 하루 조용히 앉아서 다시한번 주님과 나의 관계에 대해 되풀이 생각해 보아야 겠다.
당신의 가장 약한부분을 강하게 세워줄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라
- 캐럴 L. 피츠패트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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