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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자(왕하15:23-38)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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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자(왕하15:23-38)

주하인 2011. 7. 30. 10:47

제 15 장 ( Chapter 15, 2 Kings ) 

저 하늘이 푸르고

떠다니는 구름은 솜 같으며

드리워진 무지개는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주님

 저 늘어진 전선줄은 어떠하신지요

제가 본 것처럼 혹여 힘있어 보이시는지요

아니면  어지럽지는 않으신지요

 

그렇습니다

제 눈의 유혹과

제 생각의 판단과

제 스스로의 정직함 만을 의지하여

그럴듯하게 보이기를  

이제는 원치 않습니다

 

오직

주님 보시기에

내 아버지 하나님 보시기에

어떠하신지가 중요합니다

 

내 주여

절 인도하소서

  
 

 

24.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이스라엘로 범죄케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아니한지라  
   이스라엘의 왕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악했고
  
34.  요담이 그 부친 웃시야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나
 유다왕 요담은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긴 했으나
 
35.  오직 산당을 제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이 오히려 그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더라 요담이

       여호와의 전의 윗문을 건축하니라 
  오직...

오직이라 하심은 ' 그것만.. '이라는 안타까움의 표시이시다.

그것마져. 라는 말씀이시다.

 

그것 .

오직 그것 까지 없애야 할 것.

산당이다.

산당을 배제하지 않으면서

    
 
37.  그 때에 여호와께서 비로소 아람 왕 르신과 르말랴의 아들 베가를 보내어 유다를 치게 하셨더라 
 하나님의 전의 문을 건축함도 주님은 기뻐하지 않으신다.

 

 

 산당.

 정말 너무도 잘아는 이 어이없는 '산당의 죄'를

왜 저들은 저렇게 악착스럽게 놓지 못하는가?

산당이 어떤 마력과 매력을 가지고 있기에 그들은 그렇게도 놓칠 못하는가?

과연 우리의 인생에서 '산당'은 무엇인가?

 끈질기게도 달라 붙는,

이 정도면.. 이라 생각되는 ,

진실의 나와 구분이 안되도록 붙어 있는 진득한 그 무엇 !

 그렇다면,나의 산당은 무엇인가?

 

 출근하는데 토요일이라서인지 고속도로에 차가 별로 없다.

그런데.. 일차선을 물고 아주 천천히 가는 차 때문에 텅빈 차도가 잠시 체증이 일어난다.

겨우 옆차선으로 추월해 들어가 내려다 보니 너무 당당하다.

그래서 순간 짜증이 인다.

'저런 분들 때문에... '

그래서 앞으로 들어가 교훈의 목적으로 조금 속도를 늦추니

그제야 속도를 과속으로 올리더니 다시 내 앞으로 추월해 들어온다.

저럴 것을...

다시 속도를 붙혀 다른 차선으로 도망하듯이 갔지만

계속 따라 붙으려 애를 쓴다.

저럴 것을 .. 왜?..

속에서 '화'가 올라오려한다.

난.. 이상히도 무지한 사람들이라 판단이 드면

그들에 대하여 나도 모르는 묘한 화가 올라온다.

무시하고픈, ..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서 부담도 올라온다.

'믿는 내가 .. '

마음이 복잡하다.

자주 그렇다 .

오래되었다.

내 본성같다.

아닌데...

구분이 안가고 진득한.. 이것.

 

 내내 묵상하듯 이 사실을 생각했다.

되풀이 되는 이 묘한 왜곡.

'산당'이 혹시 아닌가?

 산당.

주님을 나름대로는 정직히 믿는다면서도 묘하게도 버리지 못하는 악습.

 생각해보았다.

그들을 무시하고 픈 이 악한 생각은

어쩌면 자라오는 과정에서 습득된 '상처' 탓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어이없는 '아버지'의 모습을 그들에게 투사할 가능성이 많음이다.

용서했다면서도 자꾸만 되풀이 되는 분노는 '죄'다.

그렇다면 어찌 해야 하는가?

이것은 습관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주님 안에서 용서하였으니 그분과 그들의 인격을 분노하기 보다는

그분의 행동 만을 보아야 한다.

그게 산당을 벗어나는 길이다.

그의 어이없는 행동은 모든 '원죄 있는 인간'의 공통된 어리석음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해할 만 하지않는가?

  나...에 대하여도 마찬가지다.

나는 주님 안에서 많은 변화가 있었고

나 자신은 예수님의 구원을 받은 자다.

그러기에 나 자신을 비하할 하등의 이유는 없다.

나 자신을 낮추고 경멸함도 '산당'이다.

단, 아직은 완전하지 못한

 그게 '산당'에서 벗어나는 길이다.

그렇다. 

아직 많은 산당이 있지만

아침에 다시 발견하여 다시 진일보할 산당파괴는 그것이다.

 즉,

' 사람을 보지 말자. 

  대신 행동을 보자.

  사람을 보고 실망함은 과거의 전이이고

 세상의 모든 보편적 사람들에 대하여 분노하는 것이다.

 나 스스로에 대하여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어이없음에 대하여 행동 만을 보자.

 그것을 깨닫고 내려 놓자.

 

 

 그리고 묵상 구절을 보며 여지없이 드는 의문.

"여호와 보시기에" 악한 자와 정직한 자의

이 땅에서의 결과가 차이가 없음은 어찌 이해해야 하는가?

두 왕 모두 무시무시한 징벌을 받지 않는가?

 며칠 째 묵상의 지속이다.

 

왕이란 달란트의 크기가 그들의 징벌의 크기와도 비례하는 것이 그  첫째이기에

나이들어가는 자 ,

믿음을 선하게 유지하려고 열심을 보이는 자로서 더욱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악'한 자와 '정직하지만 산당을 완전히 파괴하지 못하는 자'의

이 땅에서의 징벌은 같을 수 있지만

죽음 이후의 영생이란 면은 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너무 생각을 모두 세상의 현실에 집중하면 안된다.

주님의 주권이시지만 영원의 삶까지 생각을 펼치면

그들의 차이에 대하여 이해가 가지 않을까?

 그들 악한 자는 '지옥'

그래도 보시기에 정직한 자는 백보자 심판 이후 '천국' ....

너무 지나친 생각인가?

연옥... 중간영계까지.. 생각이 펼쳐질?

일단,  그 부분은 생각을 멈추리라.

그렇다면 이를 통하여 나에게 허락하시는

주님의 말씀은 무엇인가?

 '나'

아직 산당이 온전히 제거되지 않은 자로

부담이 있으면 안된다.

분명코 난 주님의 구원을 받은 자다.

온전한 구원을 향해 뛰는 자다.

 왕 만큼의 달란트가 없는 자이기에 이 땅의 축복도 기다리고 소망해본다.

주님이 원하시면 그리되리라.

 

또한

'여호와 보시기에 '

단지 정직한 자의 수준을 넘어서길 원한다.

' 여호와 하나님 보시기에 주하인은 아름다운 자'다..라는 소리를 듣고 싶다.

예수님께 '내 사랑하는 자'라 말씀하신 하나님의 말씀처럼

나도 그런 소리 듣고 싶다.

바램이다.

내 바램이 더욱 깊은 인생의 원함이 되고 싶다.

그래서 주님 성령이 함께 하셔서

내 지금의 상황이랑 아무 상관없는 가장 선한 마침을 마치고

주님 곁으로 가고 싶다.

이 일상의 어려움과 곤고함과 궁핍과 아픔이

그냥 약함으로 끝나지 않고

그를 통하여 '산당이 있는대로 제거되어'

약함이 강함이 되는 역사를 이루어 내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난 더욱 예수님을 인식해야 한다.

내 모든 삶의 과정..

현재까지의 어려움이 모두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허락되었음을

강하게 인정하고 인식하는 삶이 되길 바란다.

그래서 똑같아도 훨 큰 평강의 감정으로 세상을 살 수 있길 원한다

 

 

 

주여.

어느새 또 토요일입니다.

시간이 참 잘지나갑니다.

그 과정에서 주님의 보시기에 어떠한 자로 살아왔던지

또 아침부터 벌어진 내 마음 속의 분란을 통하여

다시한번 돌아보길 원합니다.

주여.

그래서 내 마음의 산당이 하나하나 무너져

주님 보시기에도 아름다운 자 되길 소원합니다.

주여.

당신이 보내주신 제 아들들도

제 아내도 모두 그리 살수 있길 원합니다.

깨달아 바뀌는 자 되길 원합니다.

축복하소서.

그냥 두지 마소서.

성령으로 저희가족 강하게 임하시사

모두 산당을 제거하고

세상에 보기드문 귀한 성가정으로 거듭나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받들어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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