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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를 위하여 (왕하17:1-23)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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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를 위하여 (왕하17:1-23)

주하인 2011. 8. 1. 11:43

제 17 장 ( Chapter 17, 2 Kings )

내가 사는 이유는

나 자신을 위하여서 만이 아니길 원합니다

아니 오히려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가 되길 원합니다

 

그게

깨닫지 못하는 자들이 보기에

무미하고 건조한 길인 것으로 보일지 몰라도

이제 난 압니다

 

주님 십자가 아래 있는 다는 것이

그 얼마나 뜨겁고 열정적이고

지평이 끝도 없이 넓은 축복의 은혜인지요

 

부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저랑 같은 기쁨을 공유하여

세상을 살되 천국을 지향하는

그런 축복 누리길 소원합니다

 

주여

 

14.  저희가 듣지 아니하고 그 목을 굳게 하기를 그 하나님 여호와를 믿지 아니하던 저희 열조의 목 같이

     하여  

16.  그 하나님 여호와의 모든 명령을 버리고 자기를 위하여 두 송아지 형상을 부어 만들고 또 아세라

     목상을 만들고 하늘의 일월 성신을 숭배하며 또 바알을 섬기고  
  

' 주님 보시기에 ' 악하기가 말도 못하시다.

산당, 우상.

그것도 도처에 곰팡이 번지듯이 전 나라에 퍼진다.

애굽을 섬기다 앗수르의 공격을 받자 조공을 바치고는

다시 조공을 멈추고 앗수르의 공격을 또 받고....

 정신없기가 마치 '오늘'의 정신없는 상황 같다.

사람들이 '인간적'인 것을 이유로

갖은 것을 다 합리화 한다.

 대타협을 이유로 종교간의 화합... 그럴 듯하지만 우상과 하나님을 타협한 다는 이유 자체가 우습다.

거기에 몇몇 목사들께서는 '인간적'인 것을 이유로

소외된 곳에 사회적 손길을 내밀며 하나님의 유일신으로서의 명령을 비하한다.

그 인간적인 이유로 타종교 , 우상의 수준으로 기독교를 낮춘다.

 참 중요하다.

인간적이고 공감해주는 것...........

 

 그런데 이런 것이다.

아버지 존재를 인정하지 않은 아들이나 딸이

집에 아버지 대신 조금 불쌍한 남의 남자를 들여 놓고

이들이 '아버지 ' 대신할 수도 있지 않은가 주장하는 것이랑 큰 차이없다.

 자연의 질서를 무시하고 그 질서의 결과로 'AIDS'가 만연한 기본 원인이 되었는데도

'동성애'를 벗어나지 못하는 몇몇 애처러운 자들을 이유로

동성애를 미화하고 정당화함은 조물주의 영역에서 판결을 내리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

총기 사건 난사들이 도처에서 마구 일어나고

수많은 어이없는 일들,  '막장'의 사건들이 벌어지는 이유들..은

저들 불쌍하고 그들이 좋은 것이 다 옳은 것이다..라는

'포스트 모더니즘'의 힌두이즘적 발상이 가져온 악한 결과다.

그것은 위에서도 아버지 비유를 했던 것과 마찬가지의 어이없는 이유다.

 어제 예배후 집에 돌아오는 길에

극동 방송에서 모 목사님의 설교에서 그것을 간단히도 표현하시는 말씀을 들었다.

' 경계'를 넘어서는 죄'라는 것이다.

맞다.

경계다.

아들은 아버지의 경계를 넘어서면 안되고

학생은 선생님의 권위를 넘어서면 안된다.

남성이 여성의 경계를 넘어서도............

 

어떠한 이유든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그 경계를 넘어섬,

그것은 십계명을 넘어섬이다.

십계명은 그 경계를 가장 함축해서 만들어 정리해 놓으신 것이시다.

경계를 지킨 후에

윗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아랫사람들을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

때로 '원죄적' 존재인 인간들의 죄성으로

그 경계는 어려웁게 느껴지기도 한다.

경계를 넘어서는 것은 '유혹적'이기도 하다.

얼마나 통쾌하고 마귀적 짜릿함이 그 경계를 넘어설 때 느껴지는가?

 아담과 이브가 사과를 따 먹을 때,..

그때가 바로 경계를 넘어섬이 아니던가?

그 짜릿함, 그 자극이야 말로 '사단'이 활동하는 영역이다.

 

 그렇다면 그 경계를 어찌 설명할 수 있는가?

' 하나님을 위한 영역'과 '자기를 위한 영역'의 선이다.

위에서 표현 했듯이 하나님이 정한 선을 넘어 서는 것이 경계를 넘어서는 것이다.

모두 자신의 뜻대로 자기의 기분을 위해서 사는 세상이 바로 지옥이고

자신의 기분 만을 주장하다 보니 사사건건 충돌이다.

매사 막장이다.

 

 오늘 묵상을 읽어가면서 한마디로 드는 느낌은

'혼돈'이다.

통제 불능이다.

 행동하는 것들도,

하나님은 안중에도 없고 애굽이나 앗수르, 바알 앗세라 목상,  산당을 넘어서 성벽까지............온통

정신이 하나도 없는 '강아지 소굴' 같다.

그 이유의 중심이

16절 '자기를 위하여' 다.

 너도 나도 자기를 위하여 사는 세상.

지켜서 돌보아 주는 배려나

남을 위하여 지켜주는 긍휼이나 사랑

세상의 안녕을 위하여 참아주는 인내나 절제 등의 아름다운 단어들은 찾아 볼수 없는 ..........

 

그러기에 하나님은 그것을 '악하다' 표현하셨다.  

'하나님을 위하여 ' 사는 세상,

남을 위하여 배려하는 것은

어쩌면 피곤한 듯하고 무미건조한 듯 보일 수 있으나

그 경계 안에서 살려는 노력은 '성령'의 충만함으로 영혼이 매우 기쁘다. 

진정한 행복이고 기쁨이다.

 그렇게 사는 것이 '천국'의 삶이다.

 

어제 .

주일.

예배후 TV나보고 정욕적인 삶을 사는 것은

몸은 편하고 말초적 자극은 만족되나 늘 허전한 것 같고

그대로 또 월요일을 맞이하는 것은 찌부두둥한 느낌이 자꾸 쌓이는 것 같았다.

아내의 동의 하에 '기도원 '갔다 가자 했다.

나...

그리 열렬한 기도의 용사는 아니다.

남들처럼 금식하고 소리소리 지르고

하루에 수시간씩 다니엘의 기도하는 열정의 사람은 아니다.

그런데............

그 깊은 비내리는 안에서

평강의 맛을 놓치지 않기 위해 가는 기도원의 기도는

하나님이 기뻐하심을 난 안다.

어제도 여지없이 주님은 깊은 안정감으로 날 사로잡으신다.

참 기쁨..........

 

' 하나님을 위한 인생'

난... 내 개인적인 기쁨 탓일 수도 있다.

저러한 목적으로 내 인생의 마지막 목표를 정해 가고 있다.

그런 가운데 주님의 정해주신 경계 안에서의 삶은

때로는 지루하고 피곤한 듯 보이지만

내 영은 늘 날아갈 듯 평온하다.

행복해진다.

점차로 더............

행복에 대하여 일부러 찾아 다니지 않지만 가져다 주시는

부수적인 평강이야 말로

이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는 '삶의 이유'에 대한

뚜렷한 답이 되는 것이다.

 

 오늘 묵상 구절을 보면서

정말 싫다.... 는 생각이 많이 든다.

정말 미련하고 정말 어이없다.. 는 생각이 많이 많이 들고

저렇게 사는 것이야 말로 강아지들의 그것과 무엇이 다른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다시 한번 나에게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

내 삶의 목표와 방향에 대하여 확인하심이다.

감사하다.

 

 

적용

1. 난  '자기를 위하여' 사는 삶은 이제 조금 씩 내려 놓겠다

 아직 유혹의 욕심이 날 붙들어서 놓치 않는 경우는 많지만

자꾸만 하나님을 위하여 내 욕구를 내려 놓는 연습을 하리라.

 

2. 하나님을 위하여

 조금은 인내하겠다.

  환우분들의 권리의 경계를 존중해 드리겠고

 직장 동료들의 인권의 경계를 존중하겠고

 아내와 자식들의 권리의 경계도 존중하겠다.

  나.. 더욱 인내하겠다.

 

3.  하나님의 뜻 만을 생각하자.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이 모르시는 것이 없다.

 억울하고 낮아지고 힘이 들고 약해지는 것.. 억울한 것 같아도

 주님을 생각하면 감사다.

  그것마져 주님이 허락하신 뜻이시다.

  내 할일은 그 안에서 말씀으로 날 붙드는 노력이다.

 

4. 성경 세장 읽는다.

 

5. 아버지 학교 간다.

 

6. 오늘 부터 다시 중국어 배운다.

 빈 시간을 주님 위해 쓴다.

 이후의 삶을 위한 준비로 배워둔다.

 

 

기도

 

주님.

아침 만도 그랬습니다.

눈을 뜨려니 짜증이 나려 했습니다.

또 하루.. 밝았구나.. 가 첫 생각이고

이구.. 가 첫 느낌이엇습니다.

그러나 곧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남편으로서 의사로서 잘하자.....

내 마음은 곧 평강으로 채워졌고

말씀의 깨달음은 내 경계를 잘 지키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라.. 는 레마였습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이 허탄한 세상에서도 주님은 나에게 의무와 의미를 주셨습니다.

비록 이 게으른 육신과 영혼은 자꾸만 주저 앉고

마구 경계를 내질러 내 하고 픈 대로 내 유혹을 삼켰으면 좋겠지만

그 결과는 '무의미'한 또 하루의 죽임임을 깨달아 알게 하시고

이제 주님이 허락하신 내 경계 의 틀 안에서

최선을 다해 하루를 살면

주님이 또 다시 내 영혼에 깊은 평강과 안녕의 축복을 허락하시고

내 걱정하던 부분까지 다 인도하심을 체험하게 하실 것을 압니다.

 

앗수르나 애굽같이 ,

깍은 나무 같은 아세라 목상같이

그런 단초적이고 말초적인 위안에 내 자신을 맡기지 않으려 합니다.

조금 시간 걸리고 어렵지만

주님의 뜻을 매사에 깨달아 풍성한 삶을 살길 원합니다.

주여

도우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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