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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말씀하소서 ( 막 14:12-21 )

주하인 2011. 4. 16. 10:38

제 14 장 ( Chapter 14, Mark )

 

어디에 거하더라도

그냥

인내 하겠습니다

 

주님 원하시면

그냥

기다리겠습니다

 

바람이라도 불어오면

그냥

엎드리겠나이다

 

다만 바라올 것은

제게

빛을 비추어 주소서

말씀을 주시옵소서

 

그리하시면

제 영혼 이리 

피워내리이다

 

 

12.  무교절의 첫날 곧 유월절 양 잡는 날에 제자들이 예수께 여짜오되 우리가 어디로 가서

      선생님으로 유월절을 잡수시게 예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하매 
   매사에 여쭈어 보는 습관을 더 들이자.
당연히도 더 기도를 해야 겠고

더 깊은 기도를 사모해야 겠다.

 내 주님, 나의 예수님께..

 

16.  제자들이 나가 성내로 들어가서 예수의 하시던 말씀대로 만나 유월절을 예비하니라

  그 주님께서 그때 이렇게 응답하시리라.

' 주하인아.

 이리 이리 이렇게 저렇게 하거라'

그러면

내가 할 일은 제자들이 그냥 유월절 예비하듯 순종하면 될 일이다.


 
17.  저물매 그 열 둘을 데리시고 와서 
 거기에 무슨 의심이 필요하고

무슨 고민이 필요하겠는가?

 때로는 주님께서 말씀하시고 '저물매' 나타나실 수도 있다.

 

 이제 조금은 '이것이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심'을 눈치챌 정도의

신앙의 수준에는 온 듯하지만

아직도 뚜렷하신 말씀을 알아듣는

그런 수준에는 와 있지 못하다.

 이용규 선교사님의 '더 내려놓음'이란 책을 다시 한번 읽어 보고 있다.

요즈음 조금 조금 흔들리는 탓.

다행이도 난 망각을 잘하는 지라,

아내의 말처럼 ' 새로 읽는 것 같겠다.. '란 놀림을 받아도 재밌을 정도로

처음 읽듯 은혜로 충만해지니.. ㅎ

 그 내려놓음의 의미가 그것 아니던가?

기도하며 ,

그 분이 원하심을 눈치채고

내려놓고

거기에 기다림이다.

'더 내려 놓음'이란 책을 새로 쓴 이유가

어느새 '자아' 가 교묘히도 살아나오셔서

그것을 하지 못하게 함을 깨달으심이었다.

 기다리지 못함.

'저물 때가 되어서야' 나타나실 예수님을 기다리지 못함.

그것은 내려놓되 실패한 내려놓음일 수 있다.

 

나.

어디까지 왔는가?

'내려 놓음'의 단계는 조금조금 되기도 안되기도 하지만

'기다림'의 과정이 다시 길어지면서

어느새 '사순절'동안 이전의 그 어리석음을 다시한번 체험하고 있다.

 

 어제.

금요성령 집회에는 본 교회에서 파송하신 네팔 선교사님께서 오셔서

아주 은혜로운 설교를 하셨다.

거기에 '응답'에 대하여 하신 말씀 중,

기도하고 기도하고 또 기도하며 기다리는 중에 받을 수 있음을 들었다.

그렇지 않던가?

저물도록 기도하고 기대해야 한다.

 더 내려 놓음책에서 '십자가'를 오해함은

예수 십자가를 지신 사실을 인정하는데서 멈춤에 있다한다.

대부분은 교인들이 거기까지..

그 이후는 '내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한다고..

그게 진정한 예수님 십자가의 의미라고..

맞지 않던가?

 저물도록 기다리기 위해서는 '낮아져야 한다'.

낮아지지 않는 '자아'는 자꾸만 튀어나온다.

내 십자가를 짐은 낮아짐이다.

낮아짐을 기뻐함이다.

   
  
19.  저희가 근심하여 하나씩 하나씩 여짜오되 내니이까 
 가만히 보면 모든 근심을 '나'다.

'내 자아'가 죽지 않아 생기는 세상의 앎이다.

내 자아를 죽이려는 세상의 누름이 '근심'이다.

어서 어서 예수님을 생각함으로 자아가 죽어야 한다.

그게 내려 놓음이다.

 

 그러나, 그것.

그러한 사실을 어찌 쉽게 깨달을 수 있을까?

인간이 자신을 알 수 있다면 죽을 때가 가까와 져야 눈치나 챌수 있지 않을까?

제자들이 '나 입니까?'라 물어보는 물음이

참으로 의미 심장하지 아니한가?

자신도 자신이 배반할 지 모른다는 사실 조차 확신이 없는것이다.

그런 어리석은 자가 인간이다.

그러면서 어찌 천년을 살것처럼

모든 것을 다 아는 것 처럼 '교만할 수 ' 있는 당당함을 유지하던가?

이거야 말로 정말 어리석음의 극치 아니던가?

 빛님의 방에서 '이어령님의 기도'를 보았다.

참으로 빛나는 문체.

감동이다.

하지만 영혼 깊숙이 움직이는 감동이라기보다는

그의 번득이는 지성의 예리함에 감동함이기에

한편으로 덜배우고 덜 지성적이고

더욱 미련한 자이지만

예수님을 안 시간이 조금 더 오래된 분들의 기도가

더욱 절절함에

역시 지성과 영성은 그리 비례하지 않음을 보고

모든 것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도 틀림이 없음을 다시한번 느꼈다.

인간의 지혜로움이 하나님을 아는 자들의 무지보다 덜하다는

어디의 구절..이 힘이 된다.

 

 나.

참 오랫동안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들고 살아 왔다.

그러면서 조금씩 변화되는 나를 보면서도

한편으로 아직도 흔들리는 나를 최근에 느끼면서

'아 이게 내 십자가를 안지려는 ' 결과임을 깨달아 가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내 복잡한 머리가 이제는 많이 정리되어있음을 보고

하나님께서 예수 십자가의 공로만을 바라보고

내 십자가를 이해하지도 못하던

어리디 어린 내 영성을 불쌍하고 긍휼하게 바라보신 결과임을

다시한번 감사함으로 느끼게 하셨다.

 

 오전 근무만 하는 토요일.

한참 진료를 마치고 조금은 한가한 시간.

진료실 문을 두드리고 들어오는 반가운 얼굴이 있다.

'행정직 직원'

입사가 나보다 앞서는 거의 동년배의 그 분.

타 병원에 원무 부장으로 가시게 되었다면서

남같지 않은 나.. ㅎㅎ..

오래되고 한직에 인내하며 머물고 있는 자로서의

동병상련에 눈물을 머금어 가며 인사하고 가시려 들렀다.

 안타깝고 한편으로 조금은 외진 곳이지만

용꼬리보다 나은 머리의 자리기에 위안하며 보내드렸지만

이제 나보다 오래 근무한 자들이 얼마 없어지는

이 병원에서 중년 남자 산부인과장 - 단지..ㅎ - 으로

외로움과 더불어 약간의 근심이 날 잡으려 한다.

 당직이다.

토요일 세시까지 이곳 여성 병원에서 외래 진료를 도우고

당직을 한다.

 마음이 싱숭생숭하려 한다.

그래서 기도를 하기로 했다.

말씀을 기억하니.. 저렇다.

'내가 나를 모르는데..'

' 주님은 나를 지금까지 기다려 주셨다.

 내가 오직 예수 십자가의 공로 만을 받아 들이며

 내적인 충일성을 채우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내 속이 튼튼해 질 때까지 기다리셨다. '

'그리고는 나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기를 바라심을 보이신다'

'그 십자가를 질 동안

 그 분은 나에게 이러신다. ]

 주하인아.

 그냥 기도하고 기다려라.

 더 내려 놓고 기다려라.

 기다리는 동안 저물 날이 올때

 더 외로와지는 감정이 올지 모른다.

 그것을 깨달아라.

 그것은 너의 십자가를 지는 연습을 하는 기간이다. '

 

'낮아짐을 기뻐해야 한다. '

이게 내 오랫동안의 외우고 다니었던 묵상구절 아니던가?

진정 낮아짐을 기뻐해야 하지 않던가?

그게 십자가 지는 것이 아니던가?

다시 하나님 앞에서 기초에 충실해지는 것.

그러면서 기다리고 더 내려놓는 것.

 장래를 걱정은 하지 않되

무엇을 할 것인가는 끊임없이 주님께 여쭙고

(나에게 주어진 달란트와 현상황의 이유

 무엇을 하는 것을 좋아하실 것인가.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믿음으로 여쭈면서 기다려야 한다.)

 그러면서 더욱 기뻐하여야 한다.

내 자신이 낮아짐을 기뻐하고

낮아지는 내 자신을 기뻐하고

낮아지게 만드는 환경을 기뻐하고 온전히 받아 들여야 한다.

 정말 힘든 것이다.

그리고 때가 될때까지 인내해야 하는 것이다.

이제 그게 하나님의 뜻임을 강하게 안다.

그러기에 낮아짐을 기뻐할 논리가 충분하다.

 

 

적용

 

1. 기도하는 당직의 시간이 되리라 .

  TV 안켜겠다.

 

2. 성경 세장 씩 읽는다.

 매일..

 

3. 낮아짐을 기뻐한다.

  칭찬은 받아들이되 그냥 거기서 멈춘다.

 낮아지고 망신은 하나님의 뜻이다.

  내 자아를 십자가에 못박는 과정일 뿐이다.

그것을 기쁘게 해질 수 있어야 하나님의 때가 되는 것이다.

 

4. 주님은 말씀하신다.

 듣는 귀를 열자.

 기도하자.

 묻는 기도를 하자.

 

5. 저물매

 한참을 기다릴 때가 필요하다.

 

6. 내니이까?

 나도 내가 누군지 모른다.

 오직 주님 만 안다.

 다른 자들은 평균적으로 나보다 더 모를 수 있다.

 그런 다른 자, 심지어는 아주 뛰어난 지성가들조차 무슨 기대가 필요한가?

 CPE 모임에서도 그런 어리석음의 보편을 확인하지 않았던가?

 인간은 기대할 대상이 아니다.

 이해하고 기다리고 포용할 대상이다.

 

7. 우리 세대의 가장들을 위해 기도한다.

 힘없고 어려운 세 대.

 낮아짐을 기뻐하도록 .. 기도하자.

 

 

기도

 

주님.

귀하신 주님.

저.. 더 기다리고 내려 놓겠습니다.

도우소서.

매일같이 튀어나오는 이 자아 때문에

아직도 주님의 시험이 끊이지 않음을 이제야 다시한번 눈치챕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나도 같이 지는 마음이

절 온통 사로잡게 하소서.

억울한 세상의 억울한 일이

내 당연한 거쳐가야할 일임을 깨닫게 하소서.

주님.

저 서두르지 않게 하소서.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다시한번 심정적으로 더 고백할 수 있게 하소서.

매사 주님께 여쭙는 마음을 허락하소서.

이해되지 않는 상황.

억울한 마음.

겁나는 장래.

보이지 않는 끝...

그것 모두 주님의 뜻 가운데서

내가 나도 모르는 길을 갈 때

오직 주님 만이 날 인도하시어

내 발에 등을 비추시듯

내 길에 빛을 비추시듯

인도하실 것임을 믿어 의심하지 않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시여.

간절히 비올 것은

제 자식들..

제 아버지 역할의 온전하지 못하였음을

주님의 사랑과 거대하신 반석의 역할로 채워주실 줄 믿습니다.

아이들.

흔들리지 않게 하시어

오직 주님만 바라게 하소서.

주여

저보다 더욱 빨리

제가 가지는 이러한 깨달음을 가슴 깊이

영혼 속에 온전히 담게 하시어

세상에 드문 당신의 뛰어난 자녀 되게 하소서.

제 아내 ..기억하소서.

잊지 마시고 늘 그 기도에 응답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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