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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만 계시면 난 죽어도 좋다 (왕상14:1-20 )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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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만 계시면 난 죽어도 좋다 (왕상14:1-20 )

주하인 2010. 10. 9. 11:56

제 14 장 ( Chapter 14, 1 Kings )

 

주님 만 계시면

죽어도 좋습니다

 

주님 찬양하다가

그 분이 임하심을 느낄 수 있다면

죽어도 좋을 것만 같습니다

 

주여

죽도록

주님 영광위해 살길 원합니다

 

주여

죽도록

말씀 안에 붙들리길 소원합니다

내 주여

 

 


1.  그 때에 여로보암의 아들 아비야가 병든지라 
  아이가 병든 것.

누구에게나 가슴 아픈 일이 맞다.

 


2.  여로보암이 그 아내에게 이르되 청컨대 일어나 변장하여 사람으로 그대가 여로보암의 아내임을 알지

    못하게 하고 실로로 가라 거기 선지자 아히야가 있나니 저는 이전에 내가 이 백성의 왕이 될 것을

    내게 고한 사람이니라 
  그래도 자신이 임명한 거짓 선지자가 아니고

하나님의 사람인 '아히야'를 기억한게 다행이긴 하다.

사람이 절박하고 절실하면 하나님을 찾게 되어 있다.

문제는 하나님이 우선이질 않고 세상에 살다가 그리된게 문제지.

세상도 절절히 섬겨 '우상'이 되고

하나님을 찾아도 병고치는 무당 찾듯이 찾는게 문제다 .

 

 우리는 안그럴까?

일이 생기면 열심히 다른 해결책을 찾다가 안되면 그제야 찾지는 않는가?

그것도 문제 해결 만을 위해서?

     
 
12.  너는 일어나 네 집으로 가라 네 발이 성에 들어갈 때에 그 아이가 죽을지라 

 주님께서 만일 '그 문제로 인하여 죽을 것이라' 하시면

그것도 '곧' 죽을 것이라 하면 어떨까?

 

 

 의사로서 사람을 많이 대하다 보면,

그리고 사람 뿐 아니고 '질환'을 다루다 보면

다양한 어려움이 의료적인 일이외에도 벌어진다.

하나님 처럼 전지 전능해서 이것 저것 확실히 구분하고 말씀 한마디로 다 해결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 것인가마는 상황과 질병과 사람의 사이에서는

이것이 옳을 수도 있고 저것도 옳을 수도 있는 경우가 자주 있다.

그런 경우 실은 이것이 옳은 것이라는 의구심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몇 사람의 뜻이 나와 다르면 괜히 억울하기도 하고 하다.

그런 경우에도 만면에 웃음을 띠고 환우들을 대할 수만 있다면야 얼마나 좋을까?

복잡한 머리는 내리 눌러도 가끔 가끔 조금씩 튀어나오는

이 어이없는 급한 성품은 스스로 당혹시키기도 한다.

 구체적이고 정확한 말로서 이야기 하기에는

문제가 있어서 이리 저리 돌려서 표현을 했지만

아침부터 머리가 복잡하다.

그러면서도 그 해결의 원인을 '멘토'로서 생각하고 있던 목사님을 찾아가 보았지만 안계시다.

 그러면 어떨까?

말씀이다.

 하나님 말씀에 고정하는 것이 답인 것을 아는데

묵상을 아침에 들추어 보고 나왔기에 오늘 일과 아주 별개의 것으로 느껴짐이

또한 당혹스럽지 않은가?

늘 '살아계신 하나님'을 말씀을 통하여 느꼈는데...

잠시 묵상을 앞에 두고 찬양을 읊조리며 마음을 정리했다.

 묵상을 잡았다.

'죽어가는 아기' 를 살리기 위한 '나쁜 우상숭배자 , 여로보암'의 '하나님'을 찾음에 대하여 나온다.

'어리석은 그도 죽어가는 자식을 위해 주님을 매달리는 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나랑 무슨 상관이 있는가?

 혹시 나는 흔들리는 마음이 내 속의 사망의 흔적들이 아니던가?

그것을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우선 매달려야 하는데

아히야 같은 '사람'을 먼저 여로보암의 무당 매달리듯 매달리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어제.

금요 성령집회.

찬양을 하며 난 '죽어도 좋다' 라는 단어가 계속 머리 속에 빙빙 돎을 느끼면서

나는 찬양의 곡조의 슬프고 기쁨과 상관없이

내 기쁨과 은혜 받기 위한 행위와 아무 상관없이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절절히 사로잡혔다.

당장 '죽어도 좋을 것만 같이 후회없을 듯한' 이 하나님의 절절한 임재감.

이 풍성하고 놀라운 들어참의 뿌듯함.

죽음이 겁나지도 않을 듯한 이 강력한 든든함을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하던 중

입술 벌려 찬양 하는 내 뇌리를 스치면서 지나가며

계속 되풀이 되는 '아...이대로 죽어도 좋을 것만 같다'라는 감동이 날 스치는 것이다.

그것은...

어제 묵상의 버거움을 마무리 완성하지 못하고 수술 들어 갔다 나온 후

찬양 때문에 얼른 오느라 완성하지 못했던

사자에 찢겨 죽으면서 까지도 아무런 표현 하나 묘사되지 않던

그 하나님의 사람이던 유다 선지자의 마음이 느껴진 것만 같았다.

그래 .

어디 하나도 논리적으로 타당치 않은 표현이지만

그 사람, 유다 선지자는 자신의 잘못을 너무도 독특한 방법으로 벧엘 선지자의 입을 통해

강력히 임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는

'더 이상 변명할 것 없는 자신의 실책'을 절절히 깨닫고는

회개가 자동적으로 일어나는 그의 영혼에서

'그래, 모든게 주님의 뜻이시면 어떤 죄라도 달갑게 받겠다'라는 의도로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자신을 나귀 등에 안장 얹어 태워주는 그 벧엘 선지자의 이끌어 줌에 이끌리어 갔던 것인 것 같다.

그 때 아마도 그 신령한 선지자는 자신의 운명을 예감했을 것이고

그런 다소 잔혹한 듯한 사자에 찢기고 거리에 나둥그는 시체인 자신의 모습을 느껴도

하나님이 임하시어 하나님이 하시면

그대로 맡길 수 있는 '죽어도 좋아' 라는 마음으로 갔을 것이다.

 이게 찬양을 하러 올라가기 전 ,

그 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어 계속 묵상하며 올라갔던 차

찬양이 진행이 되며 내 전 영혼을 강력히도 채우던

그 느낌이 맞았다.

그렇다.

어디하나 누구에게 논리적이고 현상적으로 설명할 기회와 가능성이 없다.

그냥 그렇다.

 

 오늘.

내속에 차오르는 다소 어지러운 반응들.

내가 만일 '여로보암 '같은 속성을 지녔더라면

당연히도 견딜수 없이 이곳 저곳 찾아다니다가

자식의 죽는 꼴을 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예수님 안'과 '예수님 밖'에 대하여 절절히 설명해 놓으신 'Shin Park'님의 글을 읽고 끄덕였던 것처럼

내가 하나님 안에, 예수님 안에 있을 것인가를 경험하는 것이

오늘의 묵상의 주제인 듯 싶다.

 나.

 오늘 말씀을 , 이 어지러운 심령을 가지고 적용시키려 애썼고

어제의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 만 계시면 죽어도 좋을 듯한' 충만함으로 채워지고 만 있다면

그게 어떤 일이라도 난 평안을 유지할 것만 같았다.

최소한 '여로보암'처럼 겉 모습만 하나님의 사람을 찾아가다가

결국 자식 마져 죽이는 '죽은 영혼의 세대주'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아무리 오늘 묵상이 내 상황과 맞지 않는 것 같아도

주님을 묵상하면 주님께서는 또 이렇게도 절묘히

말씀으로 내 영혼을 위로하시고

말씀으로 상황을 해결해 주실 것이시다.

 

나.

주님 말씀에 더 고착하리라.

말씀에 내 상황을 맞추어 해답을 얻으리라.

말씀으로 내 영혼이 살아나고

말씀으로 인하여 문제가 문제가 아닌 것처럼 해결됨을 보리라.

 

살아계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참... 어려운 묵상.

특별히 오늘 내 어지러운 머리를 잡아주시고

차분히 가라앉히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귀하신 주님.

나 .

주님 앞에서 떨어지지 않게 하소서.

세상의 사람들 찾아가기 보다 말씀을 더 깊이 묵상하길 원합니다.

그리하다가 주님이 인도하시면 그 인도하심으로 절 붙들길원합니다.

주여.

감사하신 주여.

저 흔들릴 때도 '죽어도 좋을 듯한 감동'으로 절 채우소서.

그 원천이신 성령의 충만함을 받길 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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