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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말씀을 말씀으로(왕상13:1-10)

주하인 2010. 10. 6. 10:08

제 13 장 ( Chapter 13, 1 Kings )  

그래요

 

나는  

작은 자 입니다

그것도

아주 보잘 것 없던 자 였었습니다

 

하지만

내가 듣고 있는 것은

주님 말씀이고

나를 움직이는

유일한 이유가

점차로

말씀이 되어가고 있기에

하나님의 사람으로의

희망이 느껴집니다

 

감히

어찌 바라겠습니까

하지만

그런 마음을 느끼게 하시는

우리 주님을 찬양합니다 

 


 
1.  때에 하나님의 사람이 여호와의 말씀으로 인하여 유다에서부터 벧엘에 이르니 마침 여로보암이

    단 곁에 서서 분향하는지라
 '말씀에 의하여'

오직 말씀 때문에..


2.  하나님의 사람이 단을 향하여 여호와의 말씀으로 외쳐 가로되 단아 단아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다윗의 집에 요시야라 이름하는 아들을 낳으리니 저가 네 위에 분향하는 산당 제사장을 네 위에 제사

     할 것이요 또 사람의 뼈를 네 위에 사르리라 하셨느니라 하고 
' 말씀으로'
오직 말씀을 들어..


6.  왕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말하여 가로되 청컨대 너는 나를 위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여

    내 손으로 다시 성하게 기도하라 하나님의 사람이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니 왕의 손이 다시 성하여

    전과 같이 되니라 
(사람의 말이 아니다) 


9.  이는 곧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명하여 이르시기를 떡도 먹지 말며 물도 마시지 말고 왔던 길로

    도로  가지도 말라 하셨음이니이다 하고 
말씀이'
오직 말씀으로 명하셨기에..  

 

 

 몇번인지 세어보지 않았지만

운전하려던 차를 잠시 세우고

잠시 들여다 본 아침 묵상 구절에서 눈에 계속 뜨이는 것은

'하나님의 사람'이다.

  하나님의 사람.

선지자, 사도...도 아니고

특별히 하나님이 긴밀한 목적을 가지시고 강조하시는

어딘가 모르는 친밀하면서도 부담스러운 느낌....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구절을 눈에 담고 출근했다.

인터넷에서 큐티 구절을 스크랩해서

블로그에 옮기며 하나하나 말씀을 자근자근 읽다보니

'말씀'이라는 단어가 강하게 눈에 들어온다.

늘 그렇듯, 굵은 글씨로 느껴진다.

꿈틀거리듯한 느낌일 때도 있다.

'아마도 이 것을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려나 보다' 라 하며 하나하나 정리하니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오직 '말씀' 만으로 매사에 정결화 되어야 함을 느끼게 하신다.

'하나님의 사람'이 주는 뉘앙스가 위에 언급한 대로

훨씬 더 선지자나 사도 등보다 개인적이고 친밀하면서도

부담이 되는 느낌이기에  주님의 주시려는 말씀이 맞는 듯함을 느꼈다.

잠시 눈을 감았고 묵상을 했다.

 

 나.

하나님의 사람이던가?

아니다.

아직은 아니다.

요 며칠 뿐이던가?

틈만 나면 넘어지고 쓰러지는 이 어리숙한 자가 '하나님의 사람'이라니...

가당치는 않다.

그러나, 선지자나 사도는 정말 공적으로 공인 받을 만한 자지만

'하나님의 사람'은 사적이고 친밀하면서도 개인적으로 영광의 개념일 듯한 생각이 든다.

가만히 나를 적용시켜 보았다.

아니지 않다.

그럴 수 도 있을 수도 있다. ^^;

가끔은 하나님의 사람의 정체성으로 성공하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람이란

일상의 삶을 살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노력하고

하나님의 기쁨을 알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하나하나 살아가며 점차로 그 분량이 늘어가는 자.. 일 것 같다.

그러기에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과 '아직은 온전하지는 않은 ' 하나님의 사람의 두 부류로

나누어 나에게 적용해 본다는 것이 너무 과도한 자기 과대 평가인가? ^^;

 

나.

말씀의

말씀으로 인한

말씀에 의한 - 마치 링컨 의 표현 같다 ^^* - 삶을 살길 원한다.

진짜다.

그것이 어떤 것을 의미하는 지도 안다.

그대로 산다면 그게 어떠한 축복을 의미하는 지 확실히 확신하고 사는 자임도 맞다.

이 땅...

너무 힘들다.

'선이 신랑'이라는 닉을 쓰는 친구가 고백했지만

이땅의 아버지로 산다는 것,

이땅의 어린이나 학생으로 산다는 것.. 뿐이겠는가?

이 땅은 '사단의 영향권' 아래에 있기에 산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힘이 든다.

힘이 들어도 때로는 '너무 너무 '힘이 든다.

그럴 때 우리가 의지할 것은 사람이 아니다.

사람, 그 중에서도 가까운 터놓을 자, 특별히 멘토로서 의지할 만한

영적인 친구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마져도 '여로보암'을 보고, 솔로몬'을 보면

온전한 그 누구도 세상에 없음을 느낀다.

그러기에 점차로 더 '말씀 ' 만을 의지해야할 필요성을 느낀다.

매일 매일 말씀을 사모하다 보면

그 분이 길을 가르쳐 주심을 느낀다.

' 나'

정말 '선이 신랑'이 잘 알지만 얼마나 급하고 부족한 품성을 가졌는지 모른다.

그런 내가 그 누구에게도 고백하기 힘든 일을 겪어 나가며

나름대로 혼란에서 벗어나 서 있을 수 있음은

'말씀' 탓이다.

말씀 탓에 난 흔들려도 빨리 돌아올 수 있고

흔들리는 그 어지러움 속에서

꼭 '구역질'보다는 선한 기쁨을 느끼게 되어가고 있다.

고난이지만, 좌절 만이 오지 않고 '희망'도 함께 오고 있다.

'두려움'이 있지만 ' 든든한 무엇'인가 같이 있음을 느끼고 있게 되었다.

연약한 내 자신을 발견하였지만 그게 '강함'을 위한 연단 과정임을 확신하게 되어 가게 되었다.

.....

그게 '말씀' 탓이다.

난, 그래서 내 자신이 '선지자'나 '사도' 같은 자라곤 절대로 말 못하지만

'하나님의 사람'이 아닐 것이라고도 전혀 이야기 못하겠다.

이게 '교만'이 아님은 말씀 앞에서서 말씀이 날 증거해 주심을 조금은 느낀다.

자만심이 아니다.

'친밀하시고 개인적이신 ' 하나님께서

'너.. 하나님의 사람 같이 하나님의 사람이 될 하나님의 사람

 주하인아.. !' 하시는 것 만 같다는 이야기다.

 말씀 묵상은

말씀을 가지고 말을 꼬고 뱉어서 교언과 영색으로 만들어 내거나

세상의 잡다한 지식을 엮어서 '논리적 유희'로 만들어 내거나

혹은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어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포장한

'큐티를 가장한 도덕책'을 만들어 내는 과정이 아니다.

 말씀은 살아계시다.

말씀은 기쁨이다.

말씀은 평화다.

말씀은 힘이다.

말씀은 능력이다.

그렇다고 말씀은 '영적' 부분에 국한되어 세상에 영향을 직접적으로 미치지 못하는

심리적 기법은 더더구나 아니다.

말씀은 '영육혼'의 전인적 부분에 통쾌한 영향을 미칠 수 밖에없다

살아계신 하나님.

그렇게 불리워 짐은 하나님은 말씀이고

말씀은 살아계시고

살아계심은 일상에도 영향을 지대하게 미치고 계시기에 그리 불리워 지는 것이지 않는가?

 '살아계신 하나님'은 '나' 주하인 혼자만 불러 주는 이름이시던가?

세상의 수도없이 많은 '은혜' 받은 자들이

책으로

찬양으로

예술로

삶에서

일상의 이야기로

간증으로

드러내놓고 불려 올려 드리는 이름이 아니시던가?

이 살아계신 하나님은 말씀으로 세상에 영향을 미치셔서

그 삶이 어려워도 힘이 있게

그 삶이 고통여도 눈물나는 감동있게

그 삶이 절망여도 희망이 있게

때로는 주하인의 간증처럼 일상에 새로운 능력으로 패러다임을 바꾸기도 하시고

하나하나 내 부족한 능력을 채워 주셔서

새로 만들기도 하시는 분이시기도 하다.

이게, 오늘 말씀에 나오는 '말씀의 말씀으로 인한 말씀을 통하신 '하나님이시다.

 오늘 말씀 중의 이 분 하나님의 사람, 말씀으로 그득하신 그 분은

여로보암의 손을 마르게 하고

단을 쏟아지게 만드는 기적도 베푸시면서도 (육적 기적)

여로보암 등의 세력을 전혀 두려워 하는 기색도 없으며

그들이 제시하는 세상적 매력을 단호히 거부하고 (  심적 )

하나님의 말씀대로 전혀 다른 방향으로 돌아가는  (영적 )

영육혼 간에 온전히 말씀에 사로잡힌 모습을 보여주신다.

 내일 묵상에는 좀 다른 모습이 보이기는 하지만

최소한 이 때는 이렇다.

 

 나도 그렇다.

그 분보다는 훨씬 부족한 능력과 마음 자세지만

가끔 나도 하나님의 사람 비슷한 흐뭇함이 있기는 하다.

이전에 상상하지도 못하였던 발전 아니던가?

 

앞으로 더욱 더 하나님 앞에 말씀으로 서길 원한다.

그리하여 주님이 오늘 보이시는 영육혼 간에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시간과 기간과 능력이 늘어나길 간절히 바란다.

 

적용

1.  내 부족한 부분들을 받아 들인다.

. 말씀에서 그랬다.

 약한 것 강한 것이라고..

 부족하지만 풍족한 것이라고..

 주님 위해서 그러라 하셨다.

 

2.  일상의 거의 전부를 말씀대로 살 수 있길 기도한다.

 말씀을 묵상하고 그것을 일상에서 적용하는 시간이 점차로 늘긴한다.

 하지만 급한 성품이 튀쳐나올 때는 까맣다.

 까맣지 않을 때도 그 급함을 막을 의지가 부족하다.

 말씀 앞에 서지 못하는 이 죄를 되풀이 하지 않길 기도한다.

 

3. 말씀이 내 모든 것이다.

 말씀 만을 선택한다.

 내 감정의 흐름에 맡기던 것을 내려 놓는다.

 그러기로 선택한다.

 

4. 회개한다.

 말씀대로 살지 못함을 회개한다.

 그리고 감사한다.

 기회를 또 주심을 감사한다.

 

5. 감사한다.

 원리를 깨닫게 하신 이 귀한 축복을 감사한다.

 그 감사를 표현할 수 있는 공간, 블로그를 허락하신 것을 감사한다.

 그 감사를 올려 드릴 수 있는 찬양의 능력과 반주의 능력을 허락하심을 감사드린다.

 그 감사를 찍어 표현할 수 있는 사진기를 주시고 사진의 감성을 허락하심을 감사한다.

 그 감살 감사할 수 있는 감수성 주심과 아직은 순수하려 노력하는 자신을 발견함을 감사한다.

 그것이 모두 '하나님의 사람'으로 가는 길이고

 그런 내 자신이 '하나님의 사람'의 온전함에 가까워 지는 것임을 인식하고

 스스로 받아 들일 수 있음을 깨달아감을 감사한다.

 부정적인 데서 온전한 말씀 안에서 중심 잡힌

 긍정의 사람으로 바뀌어 감을 인정하게 됨을 감사한다.

 

6. 말씀 세장 읽겠다.

 귀한 말씀...!!

 

 

 

 

기도

  주님.

귀하신 주님께

하나님의 사람으로 자처하기는 너무도 부족한 제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될 가능성을 인정하게 된 것을

참으로 스스로 경탄하며 감사드립니다.

주님.

귀하신 주님이시여.

주님이 아니시면

제가 어찌 이 어둠의 세상에서 이리 기쁨을 감사로 올려 드리겠나이까?

이것이 진정으로 저에게 주신 주님의 축복의 결정체라 생각합니다.

주여.

주님은 치우치신 분이 아님을 알지만

특별히도 감사하는 이 부분의 의미를 기쁘게 받아 들여주실 줄 압니다.

말씀으로 살고

말씀따라 살고

말씀을 위해 살고

말씀으로 인해 살고

말씀 탓에 살 수 있길 소원합니다.

그게 저.. 주하인이고

그게 제 자식들이고

그게 제 아내이고

그게 제 지인들이고

그게 세상의 모든 기독교인 들이고

그게 모든 자들이길 원합니다.

그 때 세상은 '지상 천국' , 천년왕국의 시간이 될 것임을 깨닫습니다.

그날까지

주님의 영광과 존귀를 위하여

말씀대로 살 수 있길 간절히 빕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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