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주님을 올바로 아는 자의 행운 (눅9:37-50) 본문

신약 QT

주님을 올바로 아는 자의 행운 (눅9:37-50)

주하인 2008. 2. 1. 13:08

제 9 장 ( Chapter 9, Luke )

 늘

주님 만나고 내려오는

새벽 산 하늘의

그 마음을 유지할 수만 있다면...

 

 


37.  이튿날 산에서 내려 오시니 큰 무리가 맞을새
 산에서 내려오시는 예수님의 일행과

그들을 맞이하는  큰 무리.

 

 예수님을 믿되

기도하고

인격적으로 주님을 만나는 기쁨을 아는 자들과

그냥

주님을 따라 다니기만 하는 자들.

 소수와 다수.

선택된 소수와 부끄러운 구원 받은 자들. 

 

 어제

목요일 아침에 일어나니

목이 아프고 감기 기운이 몸을 누른다.

아침 일찍 나가서

큐티의 찬양을 인도하려 하는 데

목소리가 전혀 안나온다.

그래도 갔다.

어찌 되리라 하고...

이게 요 몇년

주님의 일이란 거창한 타이틀은 아녀도

주님을 드러내는 찬양을 하면서

몇몇 강의를 하면서

목이 쉬어도

준비가 하나도 안된 것 같은 초조함 속에 나가도

주님이 다 알아서 하시는

놀라운 역사를 경험한 탓이라서

별로 걱정이 안되었다.

 주님은  필요하시다면 알아서 받으신다.

아니나 다를 까

아침 찬양이 참 은혜로왔다.

 저녁의 전인치유 시간이 가까울 수록

목은 점점 더 잠긴다.

그래도 나갔다.

사람들이 많이 운다.

더 은혜롭다네..

몸은 안좋은 데..

본 프로그램이 진행 되면서

테너 '박주옥 목사님' - 새 에덴 교회 음악목사님으로 청와대 초청 연주 자 - 의

찬양과 같이 오신 '유 집사'님의 소프라노 찬양을 들어가며

내 마음은 한없이 지평이 넓어진다.

관객석 제일 뒤에 앉아서

내 속에 펼쳐지는

행복감과 따스함과 평안의 기쁨이

얼마나 대단한지 - 그들의 노래와는 직접 상관이 없는 - 나도 모르게

오랫만에 필기 수첩을 꺼내어

이 기쁨을 휘둘러 적었다.

일시적으로 스쳐 지나가면

그게 감각의 장란이랄 것을

이제는 그 평강의 기쁨이

물결처럼 밀려오며 

오래 유지가 된다.

그 기쁨은 내 영적 상태와 아무 상관없이

주님의 때에 그렇다는 것이 놀랍다.

 

 난,

산에서 내려오는

예수님 일행과

그들을 맞이하는 큰 무리를 대비시켜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어제의 그 같은 평강을 비교 시켜서

주님을 온전히 알고

그 분의 평강안에 거하다가

이 세상 떠나

주님 안에 영원히 안식을 누리는 것이

결코

지적인 유희나

논리적 꿰맞춤이 아님을 보이시기 위함임을

이제는 영혼으로 깨닫게 시키려

하심을 알고

다시금

주님을 올바로 아는 자의 행운에 대하여

생각하게 되었다.  

 

 " 난 행운아다. "

 

 


 
38.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소리질러 가로되 선생님 청컨대 내 아들을 돌아보아 주옵소서 이는

      내 외아들이니이다

 얼마나 가슴이 아플까?

 .....................

 

 주님 예수님도

하나님에게는 외 아들이셨다.

 

 그 분을 세상에 보내실 때

안 아프셨을까?

아무렇지 않으실까?

무엇이 그리 대단하여서

이 볼품없는 인간 들에게

그리 대단한 사랑을 보이셨을까?

 

난,

저리 절절한 아들에 대한 사랑을 가지고 있기는 한가?

굳이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는 못하더라도

심지어는

귀신들린 외 아들을 가진 아버지의 절절함은?

세상이 너무 편해서인가?

그 절절한 사랑에 대하여

글쎄.. 하고 있다.

그런 자가 이웃에 대하여서는 과연 얼마나 절절한가?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의 그 마음이

조금이라도

단 일푼이라도 느껴지는가?

정말????

 

 사랑이 꼭 필요하다.

 

이 어리석은 인간의 모습을

주님은 얼마나 애절히 보실까?

당신의

그 외아들을 보내시며

이 귀신 들린 외아들의 아버지의 마음을 통해서라도

잠시 보이시고자 하셨는 데

엉터리 같이

사랑 결핍인 이 주모를 보시며

또한, 나 뿐 아니라

세상의 수많은 사랑 결핍자들을 보시며

얼마나 애절하실까...?

 

 사람들은 원죄의 존재들이다.

결핍 덩어리 들이다.

사랑 부족 환자 들 뿐이다.

극한에 가서 자식 까지 잡아 먹는

모 국가의 현실과 구약 성경의 예가 그렇지 않던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과연, 누가  난 결핍 아니라고 장담할 수 있는가?
과연...


 

41.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너희를

      참으리요 네 아들을 이리로 데리고 오라 하시니
 

믿음?

주님이 도우시지 않는 

인간 본연의 믿음의 능력은

기대조차 어려운게 사실이다.

이들

수 제자들을 보라. 

 
44.  이 말을 너희 귀에 담아 두라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기우리라 하시되  
45.  저희가 이 말씀을 알지 못하였나니 이는 저희로 깨닫지 못하게 숨김이 되었음이라 또 저희는

      이 말씀을 묻기도 두려워하더라
  세상에 지혜로운 자가 없다고

성경에 나와 있다. 

 

자기 들 편한 것만

선택해서 듣게 되는 게 인간이다.

 필요하지 않은 것은  

아무리 광고하고 해도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한다.

 

설득의 심리학 책에

사람이 많은 곳에서 사고를 당하거나

폭행을 당해 죽어도 아무도 관심 갖지 않는 예화를 들며

이와 같은 때에 도달하게 되면

사람의 이름을 불러가며 도와달라고 하면

도와준다고 한다.

그와 같은 상황의 이유로 군중 속의 익명을 들고 있다.

남이 하겠지, 누가 하겠지 하는 게 인간이다.

남의 암 보다 자기 고뿔이 더 문제다라는 얘기도 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존경하고 따르지만

그 분의 돌아가심은 결국 남 얘기다.

 이 부족한 인간에게 과도한 기대를 하고

그들에게서 해결책을 찾으려는 노력이야 말로

정말 미련한 것은 아닌가?

 ( 우리 주님은 말라기서 이후   400년 을 영계에서 장고하시면서까지  세상에 말씀을 끊고 계시다가

   드디어는자신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고자 결단하신 것이 아닌가?

    그 長考가 그리 느껴지게한다.

    그 후의 그 성육신이 그 사랑의 결단을 알게 하신다. )

  두려움은 인간의 이성을 마비 시킨다.

이 모든 것을 주님은 아신다.

아시기에 그들에게 숨긴 바 되었다하신다.

 

그렇다면 그걸 아시면서도

왜 이야기를 하시는가?

2천년 이후의 우리를 위해서이다.

이걸 통해서 조금이라도 깨닫기를 바라시는

주님의 사랑이고 배려다.

행간에 숨어 있는 그 분의 사랑을 깨닫기를 바라시는

그 분의 시공을 초월하는

지혜이시다.

 

아...

대단하신 주님.

 

 


 
46.  제자 중에서 누가 크냐 하는 변론이 일어나니
 사리 사욕

명예욕

이기고자 하는 변론.

그 상황이 주님의 죽으심을 말씀하시는 상황임에도 이렇다.

이 이기주의.


 
 

48.  저희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 어린 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이가

     큰 자니라

 주님은

이렇듯 들여다 보이는

인간의 악함과 무지에도

끝까지 설명하신다.

끝까지 설명하심은

끝까지 사랑하심을 보여주시는 실례시다.

 

 나도

내 자식에 대하여

좀더 이해하고

끝까지 권면하여야 겠다.

배울 점이 너무도 많다.

예수님께는...

 

 그 분은

'겸손'하기를 원하신다.

낮춤을 그냥 낮춤이 아니고

아이를 영접하는 마음을 알 정도로 겸손하라 하신다.

아이에게 무슨 유익이 나오겠는가?

아이를 위함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손가락질을 당하지는 않겠는가?
속에서 부대끼는 어이없는 생각들에 대하여는

또 어떻게 대적할 것인가?

 

그럼에도

주님은 그리 낮춤이 좋다 하신다

그것이 스스로 판단 하에

주도적으로 하면

자신의 자존감이 높아진다.

자존감이 높아짐은 인격이 커진다는 의미다.

어렵다.

어렵지만

주님의 말씀이시라면... 이라는 전제가 있지 않은가?

예수님 믿으면서 정말 좋은 것은

모든 논리에

예수님의 뜻이기에 ... 라는 논리가 있어 편하다. 

그것은 또 다른 감동을 나에게 준다.

감동은 평강을 의미한다.

주님이 주시는 평강의 기쁨.

 서두에 평강이 넓혀짐

마음의 지평이 넓어지는 현상에 대하여 썼다.

난 ...

주님으로 인하여 선순환하고 있는

궤도에 섰음이

이 묵상을 진행하는 동안

자신감으로 다가온다.

 


 
 
49.  요한이 여짜오되 주여 어떤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와

     함께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어찌 생각하면 잘 한 일 처럼 보인다.

주님의 일을 사사로이 이름 파는 것은 안 좋을 수 있다.

그러나,

더 깊이 보면

이것은 '편가름'이다.

' 기득권'의 또다른 표현이다.

주님의 이름 하에 들어가

남들을 제한 하려고 하는 '권력욕'의  또다른 표현이다.

 

 많이 보는 현상이다.

주위에서..

가만히 날 들여다 보면 안그런가?

 

늘 깨닫고 뒤돌아 보지 않고는

어느새 이런 논리적 함정에 들어가 있을 수 있다.

이게

큰 무리가 아니고

주님 수제자 들의 현상이다.

 

 


50.  예수께서 가라사대 금하지 말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니라 하시니라
 
 이게 맞다.

세상의 모든 일을

주님의 논리로 단순화 시킬 필요가 있다.

 남과 주님에게 해가 되지 않으면

그것은 죄가 아니다.

이단 시비로 얼마나 시끄러웠던 적이 있던가?

분파가 얼마나 무서운가?

세상의 원수도

교회의 분파 시의 그 냉정함과 냉혹함 보다는

덜 무섭다.

 

지혜가 필요하다.

넓은 마음이 필요하다.

주님의 뜻에 대한 올바른 준수의 용기가 필요하다.

매일 같이 변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적용

 1. 겸손한다.

 낮은 자의 가장 낮은 모습으로 겸손하련다.

아이들에게도 오늘 하루는 존댓말하겠다.

 주님의 말씀대로 ...

불쌍한 자를 우대하겠다.

그들은 나에게 경제적 이득을 주지 않지만

영적 이득을 준다.

 

2.  주님의 일이라면 어떤 모습이든 이해하고 받아 들이겠다.

 

3. 십자가를 감사한다.

 십자가가 없었다면 난 벌써 죽은 목숨이다.

심장병으로라도...

 

4. 자식들에게 조금더 인내하고 권면하겠다.

 

5. 낮은 나를 사랑한다.

 부족한 나도 나다.

 난 나를 사랑하고 이해하겠다.

 그게 남을 위한 길이다.

내 자식을 위하고 이웃을 위하고

이 사회를 위하는 길이다.

 

6. 문서로 내 의견을 밝히는 부분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검토한다.

 그럴 일이 있다.

 

7. 성경을 여섯 장 읽겠다.

 

 

 

기도

주님

오늘

주님 곁을 따르는 자들에게서 까지  

인간의 속성을 보고 있습니다.

그걸 보며

부정적으로 보면

인간이 한없이 혐오스럽고 우습기도 합니다.

한편으로

그런 자들 마저 사랑하셔서

십자가를 지시고

끝없는 인내와 권면으로 대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뵈면

사랑하고 웃을 수 밖에 없는 게

그들입니다.

그들에게 기대할 것은 없고

그들을 위로할 일만

막상 주님을 믿는 자들이 할 일이라 생각합니다.

특별히

주님과 고요한 밤을 새우고

산에서 내려온 자

산에서 내려올 자

산에서 내려오는 것을 바라는 자들은

반드시 그래야 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세상의 지혜로운 자보다 낫다는 말씀이

거짓이 아님을 다시금 보게 됩니다.

시공을 넘어서는 주님

그 주님의 사랑을 다시한번 배워서 감사드립니다.

늘 주님에 감격하며 살아갑니다

부족한 달란트지만

주여

당신의 감격을

죽을 때까지 증거할 수 있도록

절 도우소서.

그 걸 자부심으로

그걸 삶으로 연결시키고

그걸 자만심이나 엉터리 같은 상상보다는

주님이 주시는 위로의 통로로 삼고

주님이 이끌어 가시는 삶의 힘이 있음을 남에게 보이는,

혈루증 나은 여인

눈을 뜬 소경 같은 자가 되게 하소서.

주여.

주님을 앎이 너무나 다행입니다.

주님을 깊이 알아감이 너무도 감사합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강에 젖어 있음이 황홀입니다.

주여

부족한 이 입을 통하여

주여

부족한 이 몸사위를 통하여

주여

부족한 이 글을 통하여

주여

부족한 내 사진을 통하여

주여

부족한 이 위치를 통하여

주님 만을 증거하게 하소서.

주여

가능하면

주님 안에서 주님의 모든 뜻을 받아 들이게 하소서.

그리고

일요일 일치 주간에 일치하지 못하는 제 마음을

마지막 구절이 응답이셨음을 알게 하소서.

예수님

지혜를 허락하시고

마음을 돌리시려면 그리하소서.

기다립니다.

표징을 보이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