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주님은 내 기도와 내 눈물을 원하신다[사38:1-22] 본문
1. 그 때에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니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가 나아가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
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는 네 집에 유언하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 하셨나이다 하니
이렇게 '히스기야'님에게는 '환란'도 많은가?
그리고 그러한 것을 '왜' 알려주기까지 하시는가?
결국 5절 이하에 보면 낫게 해주실 것을.. .
이것을 보면 '어려움' , 심지어는 죽음에 이르는 병까지도
허락하시는 이유가 나와 있으시다.
무엇인가 보이시려 한다.
그 무엇인가를 아는게
하나님이 날 인생에서 데치고 뒤집으시는
연단에 대한 본질을 깨달음이 아니던가?
2. 히스기야가 얼굴을 벽으로 향하고 여호와께 기도하여
히스기야님은 이 절박한 때,
이 어이없는 환난의 몰아닥칠 때,
여호와께 기도했다.
' 얼굴을 벽으로 '향하고 기도했다.
그 모습이 상상이 된다.
가슴이 아프다.
어째, 내 모습을 보는 것 같다.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인생의 절박함을 가지고 있었음도..
기도원을 찾아갈 수 밖에 없는 그 절박함도....
어찌 .. 내 모습이 투영되는가?
무엇을 얻으려 함이 아니다.
더 나아지려함이 아니다.
그냥...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어려움이 어려워서
갈 때를 찾다 찾다 찾지 못하고
결국 갈 곳이 '하나님 앞'밖에 없어서
갈 수 밖에 없어 간 자의 모습.
어찌 할 수 없어 얼굴을 벽에 향하여 박고 기도하는...
그 기도하는 바탕에는 그래도 그의 영혼을 자극하는
성령의 아련한 흔적으로,
기도하던 때의 후련함이 기억이 나서
그리할 수 밖에 없던.. 그 절박함.
그러나, 결과적으로 옳은 선택을 가져온 절박함.
3. 이르되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주 앞에서 진실과 전심으로 행하며 주의 목전에서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 하고 히스기야가 심히 통곡하니
그리고는 '히스기야는 통곡'한다.
그것도 '심히' 통곡한다.
나름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 밖에 없다고 강하게 선언할 수 있는자.
그에게 어찌 그리도 많은 고난이 연달아 몰아치는가?
랍사게가 물러가고 한숨돌리고
하나님의 살아계시었음을 다시한번 확인하기도 전에
또다시 병이 중히 들고 , 죽음을 예언하는 소리까지 들리니..
그 심히 통곡할 수 밖에없는 좌절이 가슴을 친다.
눈물이 눈에 고이려 한다.
아들이 대학에 한차례 실패했을 때
그리 큰 기대를 하지 않았음에도
하나님이 보여주셨던 그 가까운 임재의 느낌과
나름 하나님 앞에서 느껴진다 생각했던 '합격'에 대한 막연한 기대와 상관없는 결과가 나왔을 때
탈락 자체보다는
내 신앙의 방향이 흔들리는 듯한 잠시의 혼란이 날 곤혹케 한 적이 있다 .
그때, 난 왜 내가 그리 힘들어야 했는지
내 스스로 굉장히 의문이면서도
기도원으로 향한 내 벽을 향한 혼자의 눈물은
지금도 기억이 난다.
히스기야는 그때를 기억하게 한다.
그 분의 영혼의 흐름이 나의 그것과 비슷하게 느껴지려 한다.
4. 이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다.
그리 안하셨어도 되셨을 것을
왜 병까지 주고 죽음을 예언하게 하시고
또... ?
5. 너는 가서 히스기야에게 이르기를 네 조상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네 수한에 십오 년을 더하고
하나님이 그러신다.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다 ."
주님이 계획하시는 바의 그 크고 놀라움은 우리가 죽을 때까지
아니 죽어 영원을 살아도 알수가 있으련마는
'아픔'과 '혼돈'과 '고난'과 '혼란' 마져도
우리의 선을 위하여 쓰임은
굳이 '고난이 유익'이라는 말씀 구절을 뜬금없이 더 들지 않아도
히스기야님을 통해 보이시는 저 말씀은
고난을 통하여 '기도'를 받으시고 '정결한 눈물'을 원하시는 게 하나님의 뜻이란 것이시다.
어제.
재훈이와 기적의 하나님과 하늘의 소망을 들고
전인치유 찬양의 무대에 섰다.
아이는 기도하고 깨달은 바가 있던지
약간의 경직이외에는 그리 떪이 없었고
결과는 성령이 들어쓰심이었던지
그곳에 계신 모든 분들이 정말 '열광적'인 반응이었고
난.. 아버지와 아들... 두 건장한 남자의 몸을 통하여
이 땅에 뿜어지는 하나님의 임재하심의 흔적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전인치유 기도회에 참여하면서
난 '아픔'에 대하여 깨달은 바가 있다.
아픈자들이 '아픔'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 아픔을 낫고자 함이 가장 기본된 목적이 된다면
건강한 자는 기도할 필요가 없을것이라는 논리다.
그래서 당도한 결론이
당연히도 하나님이 아픔을 허락하시는 것은
아픔을 통하여 기도하는 것이고
기도하는 동안 마음이 낮아지고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갈구하며
더 깊은 은혜의 눈물을 경험하게 하시는 것.. .
그러시면서 과정에서
하나님을 깊이 만나는 체험을 하도록 하시는 것..
그것이 '아픔'을 허락하시는 이유중 '하나'이란 것이다.
( - 모두는 아니다 ,
그분이 능력이 없어서 아프게 해서 좋게 하시나?
그것은 새디스트적 생각일 뿐이다 - )
오늘 히스기야는 '왕' 답게 더 큰 이유로
( 생각해볼 수 있는 더 큰 이유중 하나는... 주하인의 깨달음을 위한 도구?..ㅎㅎ ) 그런
눈물 빠질 고난을 경험했고
그는 '최선의 선택'으로 "무조건 여호와의 전'으로 들어가
'얼굴을 벽으로 향하는 하나님 만을 독대하려는 대성 통곡'을 시행하였고
그것은 하나님이 히스기야에게 진정으로 원한
'기도'와 '눈물'을 받으시게 되었던 것이다.
나.
오늘의 내게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죽었다고 생각하는 걱정과 '자아'가 불쑥불쑥... 용트림하려한다.
주님께 받치어야 하지 않느가?
굳이 큰 문제 없음에도
히스기야를 통해서 깨달음을 공유케 하고
감동이 가슴에 잔잔히 오게 하심은
별문제 없는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다시한번 상기하게 하심으로
주님 안에서 더욱 빨리 숙화, 성화시키는 뜻이 아니신가 싶다.
나..
오늘 주님 앞에 들고 들어가 벽을 보고 기도할 문제는 무엇이던가?
그것..
오늘 당직방에서 ,
오늘 하루 종일 해결할 일이다.
적용
1. 예의 없는 자들에 대한 짜증.
그 짜증에 대한 자책.
-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예수님에 대한 죄송한 마음이다.
가지고 주님 앞에 가서 벽을 보고 해결 받아야 한다.
되풀이를 회개하되 , 되풀이 자책도 회개할 일이다.
2 . 주님의 통쾌하게 하시는 허락하심을 체험하자.
주시면 직접 대면하여 말씀을 듣는 영적 체험도 필요하다.
하지만 아니시면 히스기야를 공감하는 마음이라도 더욱 크고 뚜렷했으면 한다.
3. 네 기도와 네 눈물을 보았도다. .하시는 말씀을 듣길 원한다.
기도하자.
4. 성경 세장 읽겠다.
기도
주님.
감사합니다.
너무 유명한 구절.
그를 통하여 깨달아지는 말씀들.
아는 것을 통하여 감동하게 하고 공감하게 하시는
짐작되는 하나님의 뜻이
오늘 하루 뚜렷이 준행되길 원합니다.
주여.
저에게 히스기야님처럼 모습을 들어내소서.
그 분의 절박한 열심도 닮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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