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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죄책감과 자유( 렘18:13-23 )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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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죄책감과 자유( 렘18:13-23 )

주하인 2009. 10. 13. 11:52

제 18 장 ( Chapter 18, Jeremiah )

 

 

 

언제나 되어야

속의  때가 

온전히 벗겨지고

흰 

내 영혼의 속살이 

그대로 들어나게 될꼬

 

주여

절 

도우소서

 

당신의 성령으로

절 씻으소서

 

 


13.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는 누가 이러한 일을 들었는가 열방 중에 물어 보라 처녀

      이스라엘이 심히 가증한 일을 행하였도다 

  처녀 이스라엘.

처녀.

처녀라는 것은 경험이 없는 자를 이야기 하는 데

경험이 없음은 순진하고 순수한 자를 이야기 하는 데

그가 '심히 가증한 일'을 행했다 한다.

 간음

영적 간음.

 

 처녀가 그러한 일을 행했음은 일반적인 일이 아니다.

섹스를 잘모르는 처녀가 그럴 음행을 저지를 몇가지 이유는

실수이던가,

음행이 만연한 사회적 분위기에 휩쓸려 아무렇지 않게 저지러 버리던가(현재 세상처럼... ),

선천적으로 '옹녀'로 태어난 죄악덩어리 육신을 비정상적으로 가지고 태어 났던가,

성장과정의 심한 정신적 상처가 ,...

순진할 처녀가 음행을 일삼을 이유가 된다.

 실수라면 주님께서 이리 진노를 하실 이유가 없다.

선천적으로 어찌할 수 없을 기형적 상태라면 불쌍해 하실 것이다.

상처 탓이더라면 역시 자신의 죄가 아니기에 긍휼함으로 치료를 받기를 권유하셨을 것이다.

물론 지속적으로 되풀이 하는 것은 예외이지만..

 그렇다면 사회적 분위기에 휩쓸려

전적으로 자신이 선택하여 음행을 해치워 버리는 것이 문제다.

 

 주님이 노여워 하시는 죄는

'타인에 의하여 불가항력 적'인 것보다는

자신이 선택한 죄에 대한 것이시다.

 

 처녀가 무엇을 알아 음란을 행할까?

의사의 눈으로 보면 그것은 처녀에게는 그리 가능치 않은 이야기다.

성적 경험이 늘어날 수록 욕구가 커져

음행을 할 위험성이 높아지는 것이다.

남자는 다르다.

최소한 여자는 그렇다.

처녀는 '선택'의 죄가 아니면 반복적 음행을 할 이유가 없다.

그게 생물학적 원리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다.

 


 

19.  여호와여 나를 돌아보사 나로 더불어 다투는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보옵소서 
  
  또, 죄 !

목회자를 거는 죄.

 

 

 


23.  여호와여 그들이 나를 죽이려 하는 계략을 주께서 다 아시오니 그 악을 사하지 마시며 그 죄를 주의

     목전에서 도말치 마시고 그들로 주의 앞에 넘어지게 하시되 주의 노하시는 때에 이같이 그들에게

     행하옵소서 
 
예레미야님의 반응을 본다.

'그들이 나를 죽이려 합니다.  

 계략입니다.

 그 악함을 사하지 마세요.

 그 죄를 사하지 말아 주세요.

 주의 목전에서 넘어지게 하세요.

 주님 화내셔 주세요.....'

꼭, 부모님에게 이르는 초등학교 어린 학생 같다.

 

 

 

 오늘 '죄'와 그에 대응하는 '예레미야'님의 반응에 대하여 본다.

 모든 잘못에 대하여 일일히 반응하지는 않았으나

그 분 예레미야님은

진짜로 악한 죄에 대하여

특별히 사도 직분에 대하여 악한 죄로 대응하는 자에게는

격노를 금치 못한다.

 이 분의 반응 만을 딱 떼어 놓고 보면

마치 초등학교 학생의 그것과 다름없는

조금은 '세련되지 못하고 '  '조악한 crude' 한 모습처럼 보인다.

촉새처럼 이른다. ^^;;

 

 그러나, 배울 것이 있다.

 그 분도 분노할 때가 있다.

분노를 아무데나 발하지는 않았지만

전혀 발하지 않지도 않았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시다.

노하실 때가 있으셨고 눈물도 보이셨다.

 성경에는 '노하지 말라'고 하지 않으셨다.

'노하되 헛된 분을 발하지 말라'고 하셨고

' 해가 넘어가도록 분을 발하지 말라'고 하셨다 .

특별히 분이 많았던 나에게 '성경'은 해결점을 주셨다.

분을 자주 발하는 자들은 의외로 마음이 약한 자들이 많다.

죄책감이 많고 좌절감도 많다.

그러기에 그 여린 감정이 분노로 인하여 자신에 더욱 상처를 입혀

분노는 남 뿐 아니라 자신에게도 결박이 된다.

 예수님 믿어가면서도 '분노'가 자주 튀어나옴은

주님을 더 깊이 믿는 데 장애물이 되었었다.

하지만 성경의 뜻을 알고는 많은 부분 마음이 편해졌고

그것은 오히려 역으로 '분노'를 낮추게 하였다.

 

 또한 예레미야님의 분노는 '죄'에 대한 것이다.

죄는 모두 죄다.

그렇지만 위에 써놓은 대로 주님이 싫어하시는

진짜 죄는 ' 반복적이고 선택적인 의도적인 죄'와

' 주님을 대적하는 죄'다.

예레미야로 대표되는 '올바른' 목회자에 대한 대적이다.

어쨋든 올바르던 타락하던 목회자에 대적하는 것은

주님의 권위에 대적하는 것이지만

목회자 자신은 스스로 '자신에게 대드는 것이 하나님에게 대드는 것'이란 개념은

자제가 될 부분이긴 하다.

 주님의 권위에 대적하는 것이야 말로 큰 죄가 맞다.

주님 예수님은 성전에서 장사하는 죄를 보고

상을 엎으실 정도로 분노하셨다.

 

 세번 째로 죄에 대한 반응에 대하여 배울 점은

직접 대적하기 보다는 '주님'께 고했다는 사실이다.

'원수 갚는 것이 주님께 있다'

성경에 자주 나오는 구절이다.

시편에 다윗이 그리 고백하신다.

 사울이 쫓아다니면서 죽이려 할 때 수차례 복수할 기회가 있었고

신하들의 권면이 있었음에도 그 분은 자신의 손으로 죽이지 않았다.

주님의 권한에 맡겼다

그가 위대한 점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기가 쉽던가?

'눈에는 눈  이에는 이'가 우리가 취해왔던 행태다.

손쉽고 시원하고..

이게 세상을 혼란하게 만드는 또 다른 죄를 양산한다.

죄가 죄를 낳고..

 주님은 주님께 맡기기를 원하신다.

주님은 그러시면서 예레미야님 처럼 가림 없이 솔직히 기도를 하는 것을 좋아하신다.

시편도 보면 그렇고 .. ..있는 그대로 ...

 주님 앞에서 고상하길 원하는 것은

또 다른 거짓일 뿐이다.

 

 

 오늘 묵상 중에 느끼는 것은 이것이다.

죄의 정의가 조금 더 뚜렷해졌다.

쓸데없는 죄책감에 시달릴 이유는 별로 없다.

주님은 내 행동반경에 확실한 틀을 가르쳐 주심으로 자유를 허락하셨다.

무엇보다 더 신경써야 할 것은 '기도'고 순종이란 사실이다.

예레미야님의 있는 그대로의 솔직하고 단순한 기도가 배울 점이다.

힘이 있는 기도란 저런 것이다.

주님과 동행한다는 사실이 저런 것이다.

 

 

기도

 

주님

귀하신 주님

감사합니다.

주님 뜻대로 살기 원하지만

늘 죄가 저를 가로막습니다.

솔직히 늘 주님과의 손잡고 동행하는

그 여유로움과 평화로움이 날 사로잡길 원하지만

그 손을 막고

날 주님의 품안에서 멀게 느끼게 만드는 것은

내 죄탓입니다.

하지만

어떤 때는 죄보다는 죄책감일  때가 많았습니다.

거짓 죄나

실제 죄보다 더 큰 무거움 탓에

주님을 올바로 보지 못하고

늘 가려져 생활해 오며

혼자 고아처럼 고민하던 경우도 많았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묵상을 대하며

죄와 죄책감, 그리고 자유로움, 기도에 대하여 많은 부분 생각케 해주십니다.

감사합니다.

주여.

주님 안에서 올바로 살길 원합니다.

주여 .

주님 품 안에서 자유를 누리길 원합니다.

분노를 덜 발하길 원하되

진정 참 분노와 짜증을 구분할 자유를 허락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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