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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집에서(렘19:14-20:6) 본문

구약 QT

여호와의 집에서(렘19:14-20:6)

주하인 2009. 10. 15. 11:05

 

거미가 꾸미는 하늘 인가

맑은 하늘을 오염시키는 거미인가

 

어디 있던

나는 하나님의 집에 있다

여호와의 집은 내 안에 있다

 

내 죄는

주님 안에서

다 녹아들어간다

 

 

 

     제 19 장 ( Chapter 19, Jeremiah )  

14.  예레미야가 여호와께서 자기를 보내사 예언하게 하신 도벳에서 돌아와 여호와의 집 뜰에 서서 모든

      백성에게 말하되  
 예레미야님이 '여호와의 집'에서

예언의 말씀을 전한다.  

 

    제 20 장 ( Chapter 20, Jeremiah )
1.  제사장 임멜의 아들 바스훌은 여호와의 집 유사장이라 그가 예레미야의 이 일 예언함을 들은지라   
  총감독인 바스훌도

'여호와의 집'에서 예언을 들었다.

 

2.  이에 바스훌이 선지자 예레미야를 때리고 여호와의 집 베냐민의 윗문에 있는 착고에 채웠더니 
  여호와의 집에서 '바스훌'이 예레미야 선지자를 때렸다.

여호와의 집에서 예레미야 님을 착고에 채우고  감금했다.


 
3.  다음날 바스훌이 예레미야를 착고에서 놓아 주매 예레미야가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네 이름을

    바스훌이라 아니하시고 마골밋사빕이라 하시느니라 
 예레미야님은 '여호와의 집'에서 '선지자'로 확실히 명기가 되었고

바스훌은 '여호와의 집'에서 '마골밋사빕', 즉 '두려움이 사방에 있다 '고 불리워 졌다.

 예레미야님은 착고에 갇힌 채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

마음이 힘이 들어도 말씀을 듣는 그 분의 영성이 대단하다.

나는 마음이 흔들리면 확 고꾸라지는 엉터리 영성이다.

ㅜ.ㅜ;;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되기도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사사로이 이용되기도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 분노로 사용되기도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정죄하기도 한다.

 

 하나님의 성전, 즉 집인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그렇다. 

그 마음에 성령 하나님이 늘 와서 거주하시고

말씀으로 선포하여 주시지만

듣고 순종하고 적용한다면 '선지자' 의 믿음이 될 수도 있지만

듣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들어도 왜곡되는 경우도 없지 않다.

 

 결과는 무엇인가?

교회는 분란이 일어나게 될 것이고

개인적으로는 실족의 위험성이 없지 않아진다.

평안은 사라지고 '두려움'의 그 공동체를 사로잡게 될 것이고

개인의 영혼도 안정이 없어질 것이다.

 

 이유는 무엇인가?

바스훌이 '총감독'이다.

높은 자리의 교만이 말씀을 듣지 못하게 하고

기도하지 않았을 태만이 귀를 막아 버리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지 않기 위해서는 어찌 해야 하는가?

교회와 '나' 뿐 아니라 주님의 백성 개개인 모두가

귀중한 '여호와의 집'임을 명심하여야 한다.

 

 

 어제 수요예배 중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에 대한 명쾌한 설교를 들었다.

그 중 '양선'에 대한 설명은 처음 들어서 기억에 남았다.

양선이라는 것은

자신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안에서  남을 가르치고 인도하는 것이라고 하셨다.

그러시면서 23살 처음 전도사로 사역 시작한 당시의

목사님의 별명이 '홍칼'이라 하실 정도로 대단한 열심이셨다고 하시며

권사님들 성경 공부 이끌어 가실 때의 예화를 말씀하셨다.

 당신은 하루종일 기도하고 묵상하고 전도하는 분이셨고

말씀 가르침에 열정이 있으시고

불의한 일을 참아보지 못하셨다 하셨다.

 개중에 기억나는 '조권사'님이 계셨는데

연세가 지긋 하심에도 불구하고 칼같은 '양선'에 오해를 하지 않으시고

늘 다소곳이 찾아오셔서

'참 감사합니다

 그렇게 지적을 아니해주셨더라면....'이라시면서

잘 받아 들이셨다고 한다.

 또 다른 기독교계의 원로 목사님께서 'J'신대 총장 선거에서

이사로 계시는 목사님께 투표 부탁으로 전화오셨을 때

홍칼 목사님께서는 거짓을 할 수 없어서

미리 약속하였던 내정 인사가 있으심을 정중히 말씀드리니

조용히 받아 들이시고는 전화를 끊으셨다 한다.

 추후에 '부흥회'에 초빙하셔서 그 때의 그 일을  말씀하시면서

오히려 그 정중함과 정직함 - 겉과 속이 다르지 않음-을 칭찬하셨다하시면서

그런 분들의 겸허함과 높은 인격 덕에 오늘의 당신이 있을 수 있음을

설교하시는 데 덕분에 나에게 부족한 덕목인

'양선'과 '겸허함'의   모습에 대하여 각인 시킬 수 있었다.

 

 오늘 예레미야님은

여호와의 집에서 '양선'을 행하고 있다.

바스홀은 '겸허함' 대신 왜곡된 반응을 선택함으로

그의 인생은 이그러질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아들과 대화를 했다.

저녁 늦게 기도원 올라갔다 내려와서

나름으로 정제된 말로 시도를 하였다.

아픈 반응.

양선을 행하려 했으나 받아 들여지지 않으니

내 자식에 대한 우려가 마음을 무겁게 누른다.

물론, 시간의 흐름이 필요하겠고

훨씬 나은 삶이 허락될 것은 믿지만

오늘 여호와의 집에서 다른 반응을 보이는 모습이

양선과 겸허로 나오지 않는 모습으로 비쳐져

가슴이 답답함을 금할 길 없다.

 그래도 예레미야님에게 임하셨던 하나님의 말씀처럼

나에게도 은혜로운 말씀이 임하시길 빌어본다.

 

 

 

기도

주님

아시지요?

제가 양선을 잘못했던지

아들이 왜곡된 반응을 보였는지

실은 그 것도 헷갈립니다.

주여.

힘을 주시고

여호와의 집이 왜곡되지 않도록 하소서.

제 가정을 여호와의 집으로

제 아들의 심령을 여호와의 집으로

저를 여호와의 집으로 인정하시고 삼아주시는 하나님

주님 안에서

자비와 양선으로

겸허와 순종으로 받아지게 하소서.

성령으로 인도하소서.

그래서 내 상황에 상관없는 은혜와 말씀으로 절 잡으소서.

살아계셔서 말씀하시듯 그리 해 주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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