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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이제 함께 가자꾸나 (렘19:1-13 )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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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이제 함께 가자꾸나 (렘19:1-13 )

주하인 2009. 10. 14. 11:07

제 19 장 ( Chapter 19, Jeremiah )

 

 

그래

네가 그랬었구나

네가 그리 할 수 밖에 없었구나

 

하지만

이제

함께 가자꾸나

 

너와 난

주님의 만드신

토기란다

 

모든 아픔

모든 상처 내려놓고

이제 우리 함께

가자꾸나

 

 

 

 

1.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가서 토기장이의 오지병(옹기)을 사고 백성의 어른들과 제사장의

    어른 몇 사람을 데리고 
 

   옹기 사서

백성과 제사장 중 어른 몇을 데리고 '라 한다.

어른이 꼭 나이든 사람 만은 아니다.

영적으로 예레미야님과 통할 사람.

 

 

5.  또 그들이 바알을 위하여 산당을 건축하고 자기 아들들을 바알에게 번제로 불살라 드렸나니 이는 내가

    명하거나 말하거나 뜻한 바가 아니니라     
9.  그들이 그 대적과 그들의 생명을 찾는 자에게 둘러싸여 곤핍을 당할 때에 내가 그들로 그 아들의 고기,

    딸의 고기를 먹게 하고 또 각기 친구의 고기를 먹게 하리라 하셨다 하고
' 엄청난 타락 '

자식들과 친구들의 살을 먹을 정도의 타락이

그들 만의 특별한 죄였던 것일까?

 주님은 '내가 명하지도 말하지도 뜻하지도 않으셨다'한다.

분명코 그들 죄덩어리 인간들도 '하나님'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바알을 분향하지만 그들은 그게 하나님의 형체라 강하게 믿고 있었을 것이고

- 하나님은 형상화 시킬 수 없는 분임을 모르고.. -  자식들을 불에 태우고 먹는 것을

종교적 최고의 헌신이라 착각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현재의 삶 속에서 교회를 열심히 다니지만

이단에 빠지기도 하고

주님을 열심히 외치고 헌신봉사하고 은사를 많이 베풀기도 하지만 자신이 만들어 놓은

또다른 형상의 하나님을 외치는 위험속에 있지 않다고 누가 장담하는가?

  어제 네미게이토 선교회의 '수레바퀴 예화'에 대하여

성장반에서 공부를 하였다.

 바퀴의 중심은 '그리스도'이고

네개의 살이 각각 ' 기도' , '말씀' , '전도', '교제'로

바퀴의 타이어는 '순종'이 이루고 있다.

그 중 하나라도 약하면 바퀴는 무너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 중 하나가 빠지거나 하나에 집착하면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부르짖되 '바알'의 산당에서

열심히 자식을 삶는 경우가 아니라고 누가 말할 수 있는가?

자신은 최선을 다하지만...

 

10.  너는 함께 가는 자 목전에서 그 오지병을 깨뜨리고 
  '함께 가는 자'

참 어려운 아침 묵상이다.

유난히도 힘이 든다.

 이 함께 가는 자가 '영적인 어른'이다.

'동역자'다.

 

  혼내고 키운 아이들은 인생이 힘이 든다.

그 가정에는

서로 아픔이 많기에 숨기는 것이 많아지고

대화는 줄어든다.

서로의 말에 아픔을 많이 느낀다.

마음은 여리고 순수하지만

그것을 표현할 방법이 없다.

 어쩌다가 큰 마음 먹고 나눈 이야기에 서로들 아파한다.

미래보다는 과거에 관심을 많이 둔다.

현재에 깊이 충실하지 못하고 '중독적'성향의 것에 빠져 들어가기 일쑤다.

 

 나름대로는 정말 잘 키우고 싶었다.

최소한 나 같은 아픔은 주지 않고 키우려 했지만

그러나, 나이들어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이들에게 멍이 들어 있음을 보고 있다.

 둘째와는 말씀을 묵상하고 나누고 통독해가며 많은 이해가 있어졌다.

첫 아이가 군대 갔다 와서 '휴학'을 하고 나름대로 아르바이트도 하더니

너무 힘이 들던지 쉬고 있다.

살이 많이 빠졌었다.

집에 있는 요며칠 동안 계속 하루 종일 방에만 있다.

컴퓨터만 붙들고...

어찌 특별히 할 수 없어 쳐다 보고 있지만 가슴이 답답하다.

솔직히 '엄친아'와는 비교하지도 않지만

자신의 장래에 대하여 열심을 내어 영어도 공부하고 .....했으면 좋겠지만

그러기 보다는 늦게 다니고 , 무엇보다 믿음이 떨어지는 듯 하다.

 기도하며 지켜보고 있다.

'현재보다 장래를 보라'는 마음이 강해진다.

 아내는 큰아이와 잘 통해 식사하며 대화를 시도하니

아이가 강하게 반발했다 한다.

 아이의 말이 일리가 있다.

그 아이는 아픔을 이야기 하며 분노를 많이 표했다 한다.

아내도 가슴앓이다.

갱년기가 되면서 쉽게 아픔을 느낀다.

하루 종일 속이 상했던 모양이다.

둘짼 둘째 나름대로 제 엄마와 부딪치고........

 

 요새 기도하고 말씀을 공부하는 중이라서 덜흔들린다.

특히 기도하면 마음이 딱 절단되듯이 불안이나 속상함이 제해지는 느낌이 든다. 

 저녁에  둘째 방으로 들어갔다.

아이에게 습관적으로 혼내던 옛 방식과는 달리

도움을 요청했다.

'너는 내 동역자다.

 엄마는 많이 힘드신 시기에 와 있다.

 홀몬도 그렇고 환경도.........알지 않니?

  네 억울함과 속상함도 알지만

 이전의 상처를 빌미로 그렇게 한다면 어찌 변화할 수가 있는가?

 너는 아빠와 오랫동안 말씀으로 다져왔다.

 나는 너를 동역자로 생각한다.

 우리 가정의 아픔을 잘라버리고 미래를 위해 같이 일구어나갈...

  급한 성질 참기 힘든 것 안다.

 그러나, 어머니를 도우고 아빠와 함께 바꾸는 '동역자'로 약간 만 자제해라.

 속이 상하려 할 때 그냥 밖으로 나갔다 들어와라.

 알지?

 그게 주님이 우리 가정에 고난을 허락하신 이유다.

  예수님이 십자가 지신 이유다 .

  넌 이 가정에 주님의 뜻을 이루어나갈 나, 아빠의 동역자다. '

  아이의 얼굴이 밝아진다.

 솔직히 큰 아이를 많이 혼냈었다.

그러기에 아이와는 아직 관계가 둘째보다는 조금은 더 소원하다.

말씀을 같이할 시간이 별로 없었고 대화의 시간도 덜했다.

 그래서 둘째에게 먼저 도움을 청한 것이다.

 

 오늘 묵상구절이 너무 힘이 든다.

아무리 대화를 하고 아침 기도를 했지만

분위기가 무거우니 힘이 든데다 묵상의 톤은 무겁기 그지 없으니

솔직히 쳐다 보기도 싫어지려 한다.

겨우 MP3에 녹음하여 걸어오며 억지로 억지로 들었다.

집중하여 주님께 짧은 기도하며 여러번 여러번 되풀이 듣다보니

'함께 걷는 자' 와 '옹기'에 집중이 된다.

죄악 덩어리 이스라엘 분위기가 집중이 된다.

 

 나.

그리 편치 않은 가정에서 커오면서 상처덩어리였고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후에야

진정 사랑이란게 어떤 것인 지 깨닫게 된 후

정신을 차리고 보니 가정이 내 커오던 그 모습 그대로임을 알고

돌이키려니 너무도 힘이 들고 안타깝다.

 늘 바라던 것은

가정이란 누구에게나 포근한 쉼터이고

구름 같은 편안한 Fortress(보장)이어야 한다는 생각이었으나

이것은 ...........

 바램과는 너무 동떨어진 죄 덩어리 괴수 노릇하고 있지 않았던가?

마치 성경에 '네 집안에 원수가 있다'고 하신 말씀 비슷하지 않던가?

주님의 말씀을 늘 묵상하고 닮아가려고 애쓰던 나에게

사랑은 커녕 미움과 원망........이 아직도 그득하니...

그게 바로 오늘 이스라엘 사람들의 의도와 다른 죄악과 무엇이 다르단 말이던가?

 이제 하나님께서 그처럼 추악하고 자기 자식 잡아먹는 괴물 들 집단을 향해

노를 발하신다.

분노를 발하시는 게 무섭기는 하지만

솔직히 냉정한 것 보다는 덜 무섭다.

화를 내시는 것은 사랑이 있으시다는 반증이다.

그 반증의 증거가 '옹기'다.

왜 그 분은 그런 모션까지 써 가시면서 그들에게 혼내려 하시는가?

무엇 때문에 '어른'들을 데리고 가서 보여주시는가?
 돌아오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뜻 아니던가?

가만히 계심이 무서운 것이다.

 그 데리고 간 자, 함께 간자가 동역자다.

나는 둘째에게 함께 가달라고 어제 부탁을 했지만

그 아이를 어른이라고 인정한 것은 물론 아니다.

하지만 주님 안에서 아이와 난 말씀으로 함께 걸어 왔었다.

이제 현재는 그리되었지만 조금 있으면

우리 가족 모두가 '세상을 향해 함께 걸어가는 자'가 될 것이다.

돌아보면 우리가족 같이 선한 사람들도 흔치는 않다.

아이들 둘.

모두 나쁜 짓은 하지 못한다.

누구야 자기 자식이 안그렇게는가 마는

세상의 모진 아이들과 비교해서 그렇다는 이야기다.

 이제 그 아이들을 향해 내가 할 일은 이것이다

'옹기'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 그렇구나.

 네가 그랬었구나'

 네가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구나'...

아침에 출근하여 진료실에 앉아 잠시 묵상하려 눈을 감자마자

나도 모르게 그런 소리가 들려온다.

'그래...네가.. 그랬구나...'

가슴이 찡하다.

큰 아들의 아픔.

둘째의 힘듦...

 내 가정에서 아들로서 자라려다 보니

주님께서 허락하신 연단과정에 쌂아지듯 힘든 과정을 겪으면서

그 아이들이 겪을 수 밖에 없던 고난이

주님이 소리내어 내 눈물을 대신 뿌려주시는 듯하게 들려왔다.

그래서 즉시 눈을 뜨고  블로그에 들어왔다.

전혀 글 쓸 준비가 되어 있지 않지만

찍어 두었던 사진 하나를 걸어놓으니

마치 저 위에 보이는 두 꽃 송이 중 아랫쪽 커다란 꽃송이가

나로 느껴지고 그 위의 적은 꽃이 내 자식들로 보인다.

 주님은 위로 하신다.

함께 걸어갈 내 자식들의 마음을 이리 어루 만지신다.

그 분은 혼내시는 톤의 묵상구절을 보이시지만

나에게 사랑의 동행자 내 가족의 운명을 보이신다.

감사하신 분이시다.

늘 살아계신 분이심을 오늘 아침에도 다시한번 확인하는 아침이다.

 

 

적용

 

1. 무조건 인내하리라.

  그 아이들의 장래는 주님이 다 책임지실 것이다.

 그 아이들의 과거는 주님이 다 녹이실 것이다.

 그 아이들의 현재는 나를 통해 만지실 것이다.

 

2. 함께 가는 자. 

 세상을 향해 우리 가정이 걸어야할 길이다.

 주님의 뜻 안에서 동역자로 우리 가정을 보리라.

 

3. 성경 일곱장 읽자.

 

4. 우리는 주님의 옹기다.

  함부로 판단하지 말자.

  사람들을 주의 뜻 안에서 보자.

  최선을 다해 몸부림치자.

 

5. 우리 가정의 성령 충만함을 위해 기도한다.

  아이들의 장래를 위해.

  그 아이들의 장래를 믿는 믿음위해... 

 아내의 영적 육적 편안함을 위해..

 

기도

 

주님.

살아간다는 게 왜 이리도 힘든지요.

정말 착하게 살려고 노력했지만

남에게 상처를 그득 입히기만 하는 가해자의 모습으로 살아오고 있었습니다.

좋은 아빠가 되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정말 내 가정 만은 웃음꽃 피게 하고 싶었지만

아픔이 아직은 겨울 바람처럼 아프게 흞고 지나갑니다.

주님..

어떻게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의 그 죄악같은 죄악이 내 주위에 만연하는 지요.

주님의 옹기로 만들어 주신 제 모습을

어찌 그리도 깨기만 하고 살아왔던지요.

이제 주님의 뜻 안에서 돌이킬 수 있기를 원합니다.

함께 가는 자로 서길 원합니다.

세상을 주님의 뜻안에서 그리하길 원합니다.

내 자식들 .

좀더 온유하고 평안한 아빠로 서 끌어 안을 수 있길 원하나이다.

그들을 그런 동역자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살길 원함니다.

이제라도 아이들을 믿고 더 이해하고 받아 들일 수 있길 원합니다.

저에게 인내할 수 있는 마음을 허락하시고

기다릴 수 있는 지혜를 허락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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