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높은 산 물가의 나무( 렘17:1-11 ) 본문
제 17 장 ( Chapter 17, Jeremiah )
난
날아 오르렵니다
오랫동안 날 누르던
사슬을 끊고
관습이란 이름의
우상을 박차고
그렇게
난
날아오르렵니다
주님 계신 그 곳으로
난
힘차게
날아오르렵니다
주님의 생기와
주님의 생명력으로요
1. 유다의 죄는 금강석 끝 철필로 기록되되 그들의 마음 판과 그들의 단 뿔에 새겨졌거늘
2. 그들의 자녀가 높은 메 위 푸른 나무 곁에 있는 그 단들과 아세라들을 생각하도다
5.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혈육으로 그 권력을 삼고 (개역개정 :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
罪
죄의 무서움은 '유전'된다는 것이다.
자식들이 똑같이 나와 같은 행동을 하고 있음을 보면
흠찟할 때가 있다.
늦게 퇴근하여 들여다 본 거실 소파에
비스듬히 팔괴고 누워 patato couch 같이 하고 있는 걸 보면
영락없이 게으른 내 휴일의 모습이다. ^^;;
그들은 나의 거울이다.
죄는 우리의 삶에 그리 떨어져 있지 않다.
늘 우리 곁에 있다.
주님을 위해 살 기회도 따라서 바로 곁에 있다.
어떤 때는 아름다움에도 '죄'가 있고 '선'이 있다.
봄 하늘 아래 생기도는 산을 보고
여름 하늘의 무성한 푸른 뫼를 보아도
그 생기와 그 생동감을 보고
마음이 열어지고 무거움이 터지며 자유로움이 찾아들어
주님의 영광을 감사하는 마음이 들지 못하고
그 '곁'의 단들과 아세라 ,
즉 식구들끼리 먹고 마시던 기억 만을 추억하는 것은
'죄'라는 것이다.
그게 무에 죄일까...
'무릇 사람을 믿으며 혈육으로 그 권력을 삼고 (개역개정 :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다
그렇다.
일상의 삶을 살지만
그 삶이 목적이 되면서 주님을 잃어가는 것이 '아세라' 우상이라는 것이다.
그게 죄다.
사람을 믿는게 죄라고 하지 않으시는가?
사람을 믿는 게 무슨 죄인가?
위에 말하는 대로 사람 만을 믿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고...
우리의 어리석음이 바로 그것이다.
눈에 보이고 믿음이 필요없고 간편하고 즉각적이기 때문에
사람을 의지하고 육신을 믿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여호와께 마음이 떠나게 되는 것이다.
이 죄가 바로 '우상'의 죄이다.
그렇다면 위의 말씀은 우리의 삶과는 별개의 것인가?
단지 옛날 어리석은 자들의 것인가?
아니다.
하나님을 믿고 위한다면서도 하나님의 이름 만을 앞세운
인간들의 잔치인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교회의 워크샵이나 세미나 등에서 은혜 받았다고 하는 것 중에서
푸른 먼산의 아세라 목상을 그리워 하는 경우는 얼마나 많은가?
인간들의 情粉 잔치인 경우가 대부분 아닐까?
..........
살아간다는 것.
그리고 믿는 다는 것.
그것은 절대로 양분할 수 없는 것이다.
세상을 살다가 교회에만 나오면 그것이 믿음인가?
분리는 다른 신을 만들어 낼 수 있다.
교회의 추억
세상적 십자가...를 만들어 낼 위험성이 너무도 다분하다.
세상을 살면서 하나님의 뜻을 보아야 한다.
높은 산 푸른 나무를 볼 때 그 뒤의 추억을 보기보다는
그 것을 만드시고 그 안에 충만히 거하시는 하나님을 보아야 한다.
세상을 살되 내 자아의 욕심을 내려놓고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
그것이 믿음이다.
그렇지 않음은 '종교 생활'이다.
종교 생활은 '죄'다.
큰 죄.
7.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8. 그는 물가에 심기운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
일상을 살아가면서 주님을 믿는다는 개념.
그것은 매사에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을 신뢰하여 의지한다는 것이다.
말은 쉽지만 개념이 뚜렷하지 않은가?
5절의 말과 대치되는 말씀이시다.
삶에 닥치는 어떠한 일이든 '내'가 하려는 것은
사람을 의지하는 것이고 육체의 힘을 의지하는 것이다.
반면에 주님을 의지하고 신뢰한다는 것은 맡기고 내려 놓음을 의미한다.
'내려놓음'
제일 좋아하는 단어 중 하나이다.
내려 놓는 다는 것은 '통제'의 욕심을 버린다는 것이다.
내가 가까운 사람, 특히 가족을 어찌어찌 해보고
내 장래를 위해, 노후를 위해 어찌어찌 돈벌고 재 테크 하고.......
하나하나 내가 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주물거리는 것을 '통제'라 한다.
이 통제는 어느 정도는 성공할 수 있다.
어느 정도 돈을 벌 수 있고
겉으로는 성공한 자식들을 볼 수 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워크홀릭'으로 나올 수도 있고
나이들어 고혈압 , 중풍, 우울증... 으로 나올 수도 있을지도 모르며
성공한 재력을 노리는 가족간의 알력.....등
자아의 통제노력은 반드시 반대 급부가 있다.
그것은 '불행'을 전제로 한다.
내려 놓음은 반대다.
통제력을 잃는 다는 것.
그것은 정말로 어려운 일이다.
나이들어 뒷방늙은이 되는 느낌.
그것 벗어나기가 힘들다.
그처럼 쉽게 이룰 수 있는 것을 멀리 돌아가야 하니 얼마나 속이 타는가?
눈에 보이는 것을 돌아가니 간질이 난다.
하지만 , 내려놓음은
자유다.
홀가분함이다.
기쁨이고 눈물이고 아련함이다.
재산, 자식... ..주님의 아량에 의한 것은 틀림이 없는 것이시지만
축복을 전제로 하고 있다.
내 경험을 돌아보아도 통제하고 싶은 마음을 내려 놓으니 축복이 오고 있다.
최소한 그 주신 것을 난 '축복'으로 감격하게 되고 있으니 말이다.
그게 진정한 축복이 아닌가?
또한 오늘 말씀에도 '복'을 분명히 말씀하신다.
얼마나 좋은가?
' 홀가분하게 성공하다. '
하지만 무엇을 어떻게 내려놓고
무엇을 언제 내려 놓아야 한다는 말인가?
손을 씻을까요? 발을 씻을 까요?
다 여쭈어 볼까?
하나도 내가 하는 일 없이 주님의 해 주심 만을 바랄까?
성경에 나온다.
' 계획은 내가 하되 성사는 주님이 하신다'라고...
인간사 반드시 해야할 일이 있다.
그 할일은 내가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역시 헷갈리는 일 투성이이다.
어디까지....어떻게 해야.........
그러기에 말씀이 필요하다.
내가 계획하고 열심을 보이되 '말씀' 묵상을 통해 그날그날 적용을 하고
수정을 해나가야 한다.
아버지와 아들이 대화가 없으면 되는가?
그게 '큐티'고 묵상이며
그것이야 말로 주님께 맡기고 인도함 받는 올바른 길이다.
8절에 그는 물가에 심기운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
그런 자야 말로 '물가에 심기운 나무'다 .
이것도 '심은'이 아니다.
'심기운 나무'다 .
철저한 주님의 힘이다.
그 물가에 심기우기 위해 우리가 할일은
주님을 생각하는 삶이다.
그 분의 생기, 생명, 먼 산의 높은 나무가 될 나를 기뻐하는 것 뿐이고
늘 말씀 묵상함에 있다.
물가에 심기운 나무는 어떠한가?
겉으로 보기에는 그리 달라 보이지 않아도
그 뿌리는 강쪽으로 뻗쳐 있어
물의 수분을 늘 공급 받는 위치에 있는 자다.
하나님의 생명이다.
성령이다.
예수님의 생기다.
그 생기가 세상의 눈에 보면 멀리 떨어진 나무와 별 차이가 없어 보여도
그 나무와 하나님 사이에서는 뿌리를 통해 늘 주님의 생명을 공급 받고 있는 상태이다.
그러기에 그는 더위가 와도 두려워 할 일이 없고 그 잎이 청청할 수 밖에 없다.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늘 결실의 삶을 살게 된다.
난, 이 상태를 평강이 지속되는 상태로 이해하고 있고
이 변화없음이 지속되는 게 '심령천국'으로 느끼고 있다.
참으로 이해가 된다.
상황은 아무리 달라져도
내 속이 변화가 없으면 그것이 물가에 심기운 나무가 아니던가?
예수님 믿기 전에 난
나이가 들어가면 삶의 낙이 없어지고
더 이상 삶을 살 재미가 없을 줄 알았다.
그러기에 난
나이가 40대 넘기 전에 세상의 삶을 마감될 것이란
어이없는 우울한 생각을 하며
젊은 시절을 살아 왔었다.
그러나, 내 나이 50.
특별한 세상의 이룸은 없다.
자식들도..
내 위치도..
어릴 때 좀 특이하게 커왔던 나의 이력을 보았던
내 주위의 사람 들 중
지금의 내 모습을 보고 성공했다고 할 만한 거리는 없지만
난 오히려 이전보다 훨씬 소망이 있고 훨씬 기쁨이 넘친다.
눈 주위가 늘어져 흘러내리고
이마에는 주름이 쪼글 쪼글해지고
알게 모르게 내 가슴 피부도 흘러내리고
배 둘레는 넓어져 가며
어떤 이성도 날 쳐다볼 만한 자랑거리가 스스로의 육신에 남아 있지는 않으나
날 쳐다보는 내 눈은 이전보다 조금은 더 사랑스럽다.
가진 재산은 전문의 시작할 때
의사로서 누구나 기대하던 그 평균 수준의 반도 못가졌으나
챙피하거나 속상하지는 않다.
오히려 자유롭다.
난, 물가에 심기운 나무 같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그렇다.
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아직은 온전하게 뿌리 박은
물가의 심기운 나무는 아닌 모양이다.
가끔은 흔들리고 있다.
그것은 오랜 구습 탓이다.
주위 의미있는 분들의 너무도 안팎이 다른 삶을 보아가며 자라왔기에
나만은 안팎이 통일된 삶을 살자고
굳게 맹세하여 왔던 터
내 마음의 가는 바를 솔직히 깨닫고 표현하며 사는 것을
내 인생의 모토로 삼아 왔던 것이 그것이다.
그러다 보니 강직하고 선은 굵지만
남들에게 가끔 상처를 입히기도 하고
그것은 갈등의 소지가 되어 왔던 것은 사실이며
스스로도 스스로의 믿음에 혼란이 있던 것은 사실이다.
결국, 사람은 자아 강화의 훈련 만으로 스스로 설 수가 없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마음.
이것의 부는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와 같은 존재는
믿을 만한 가치가 없는 것이다.
세상은 '나'를 위주로 바꾸라 한다.
내가 기쁘면 그게 진리라 주장한다.
그게 다원주의 아니던가?
그게 포스트 모더니즘 아니던가?
그게 힌두교의 사상이 아닌가?
그게 뉴에이지다.
세상은 '지옥도'로 변하고 있다.
마음을 강화함은 '지옥'을 이 세상에 끌어 들이는 현상이다.
말초적이고 자극적이고 가치 기준이 모호하여
'죄'에 대한 개념조차 없어지고
죄에 대하여 이야기 하는 것 조차 비웃음 받을 시대에 이르게 되었다.
그래 .
편하고 쉬운 것은 좋다.
하지만
그 결과는 파괴적이다.
위에 말씀대로 부패하게 되는 것이다.
썩어 버릴 이 세상의 허상의 꿀을 위해
진리이고 진실인 영생의 삶을 포기하고
천국 대신 지옥을 선택하는 것은 자유다.
하지만
세상이여 .
더욱 진중해야 할 것이다.
주님은 살아계시다.
적용
1. 죄는 얼른 얼른 회개하자.
2. 성경 일곱장 읽겠다.
3. 감사하자.
난 비밀을 깨닫고 있는 소수의 사람 중 하나다.
얼마나 감사한가?
4. 겸손하자.
5. 주님의 생명수 물가를 묵상하자.
더위야 오라.
가뭄아 와라.
난 두려움 없고
난 걱정이 없으리라.
6. 주님이 계신 천국, 먼산의 푸른 나무를 묵상하자.
9. 외우자
렘 17장 8절그는 물가에 심기운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
10. 주실 축복을 기뻐하자.
기도
주님
감사합니다.
아직은 죄에 있지만
곧 주님의 원하시는 깨끗함에 이를 내 운명을 예감하니 감사합니다.
주여.
말씀이 이해가 되고 감동으로 다가오니 감사합니다.
주여.
아픔은 아직 내 속에 있지만
주님으로 인하여 회복될 것을 믿기에 감사하여이다.
주님.
아직은 흔들리지만
곧 가뭄에도 결실을 맺을
그런 나를 기뻐합니다.
감사합니다.
주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창조의 하나님
- music by 주하인 + 아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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