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종말과 회의'懷疑' (눅21:20-28) 본문
(눅21:20-28)
'은혜의 강가로' 모든 '성도가 다함께 ' 나갈 수 있길 원합니다.
어떤 어려움이든
없는 자 어디있겠습니까?
그래도
주님의 은혜가 계시니
성도가 다함께 불러 올리는 찬송을 받으시는
하나님이 계심을 아니
다시 일어나 머리를 들려 합니다.
은혜로
우리를 채우시고
다시금
날 이끄시는
내 하나님 아버지 되소서
22.이 날들은 기록된 모든 것을 이루는 징벌의 날이니라
28.이런 일이 되기를 시작하거든 일어나 머리를 들라 너희 속량이 가까웠느니라 하시더라
' 징벌'
'이 날'
.....
며칠 째 '그날' , 즉 '주님 재림하실 날',
마지막 날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무서운 이야기..
어쩌면 이 삶을 살면서
이 삶에서 얻는 다양한 관심 거리, 내 생각을 사로잡는 여러 문제들.......로 인하여
집중하기 어려운 이야기일 수 있다 .
이 마지막 날은 그러해서 여러 의미가 될 수 있다.
정말 중요한 이야기,
하나님의 뜻에 관한 이야기인데
소돔과 고모라 백성 처럼
죄악이 관영된 세상에서 파묻혀 정신을 빼앗긴 엉터리 같은 상황일 수도 있다.
어쩌면 지금 이 말씀을 들으면서
마치 , 신화 속이야기를 듣는 듯,
내 상황과 괴리 되어 있는 듯한 느낌.
그래서 말씀이 내 인생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 같은 당황함을 주는 것은
내 '믿음의 약화' 탓이고
내 영혼이 혼탁해져서 일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을 알면서도
난..
집중할 다른 것의 무게가 너무 크다.
이 일을 어찌 하는가?
아니,
이러한 내 삶과 조금은 '괴리' 된 듯한 느낌의
' 너무 큰' 문제인 ' 마지막 날' , 7년 대환란의 시작에 대한 이야기는
다른 말씀 때와는 달리
내 일상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자꾸 느껴져
요 며칠은 '힘 없는' 삶이 되는 듯..하다.
그런데
진정 살아계신 하나님이 매일 내 삶을 간섭함을 인정하며
말씀 묵상을 거르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나에게
말씀 구절에 따라
달리 느껴짐은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면, 가당치 않은 이야기가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든다.
'회의懷疑''
그것..
이전에는
억지로 신앙으로 묻어 버리고
옳지 않은 그런 생각들을 눌러버리는 것이 옳은 것임을 알고
말씀 구절을 통하여 깨달으려 하고
애써 부인하려 애써 왔지만
그것이 정말 옳은 태도인가........ 다시한번 생각해본다.
그래서,
요새는
가만히 그냥 기다린다.
지난 주 주일 예배 때 목사님이 설교 하셨다.
'차인표님이 confession이라는 구호단체에서 활동하게 되면서 .............'
그 방송이 나가면서 감동을 받은 수많은 사람들이 그 홈페이지에 몰려
순간 '다운'이 될 정도였다.. 시는 말씀을 하셔서
그의 그 강직하고 신실한 믿음이 감동스러워
'토론토 사랑의 교회(?)에서 간증한 것 다운 받아 보는데
거기에서 '의문'이 들 때
혼자 기도하던 이야기를 하는데
고개를 끄덕이는 부분이 있었다.
'주님... 나보고 어떻게 하시라고요?
제발 답해주세요.
우주적이고 거창한 이야기 말고.. 저에게 맞는.......'
맞지 않는가?
그날 저녁 퇴근하며
차 안에서 읖조리듯 기도한 내 기도와 일치하는 이야기 였다.
오늘 말씀 묵상의
그 우주적이고 거창한 이야기가
' 마지막 날'에 대한 것이시다.
정말 중요하고, 반드시 있으실 이야기지만
난........너무 힘이 없다.
종말.. 등을 현실에 집중하여 감당하기 어려운 자,
그렇다면, 그 종말을 어떻게 이야기 해야 하는가?
내 일상의 어려움을 종말적 어려움으로 이해하여야 하지 않겠는가?
나 뿐이겠는가?
이 삶을 사는 자들이 매사에 얼마나 힘드는가?
그냥 눌러 버리고 잊어버리고 사는 것이지.......
어제.
화요일.
수술이 없는 날이라서 휴가를 내고
강릉에 다녀왔다 .
'이모'님.
중학교 때 서울에 처음 전학와서 날 돌보아주신.........
사촌동생은 나랑 한살 차이라 친구처럼 지냈는데
국도 극장 소유주 아드님이셨던
이모부의 쇠퇴와 더불어 과음으로 인한 젊은 나이의 중풍.....
그리고 고난, 고난......
이모님과 동생의 힘듦을 같이 보면서 자랐던 터라
노후의 편안함을 달갑게 느끼며
한동안 연락을 못하던 중
갑자기 '유방암 ' 수술을 하신다 하셔서
다녀왔던 것이다.
동생은 보질 못했으나
큰 사업체 부도 맞고 힘들게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
마음이 그렇다.
....
날씨는 어제 따라 화창하여
드라이브 하는 마음으로 나섰지만
세상을 산다는 것은
마치 '살얼음' 얼은 개울가를
징검다리 밟고 지나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하나님의 은혜로 많은 부분 축복을 받는 듯
잘 펼쳐지고는 있으나
아직 해결되지 못한 문제들이
이렇게 저렇게 고개를 들때는
마치 징검다리 위에서
좌우로 휘청대고 있는 것 같지 않던가?
날은 맑고
내13년된 고물과는 달리 아내의 차에서 들릴 듯 안들릴 듯 들리는
새차의 조용한 엔진음과
휴가의 후련함도
그리 밝은 마음을 주지는 않는 것 같다.
말씀에 집중하여
은혜에 거하면
이러한 내적인 어두움 따위는 아무것도 아닐 것이지만
세상의 조건들과 부합된
마음의 누름은
어쩌면 그것 만 가지고도 ' 마지막날, 종말의 어려움'과
무엇이 다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울 이모님의 고통
동생의 굴곡,
가족들의 어려움......
지금 방금 한분도 가슴뛰고 얼굴 달아올라
폐경이 아닌가 하여 들렀다 갔지만
아니다.
아마도 스트레스 탓일 듯 싶다.
세상 모든 자들의 살면서 받을 다양한 스트레스는
그들 만이 알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의 말씀은
나의 '현재의 종말적 어려움' 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것일 수 있다
거기에 '일어나 머리를 들라' 시는 것 같다.
'너의 속량이 가까웁다'는 것은
조건과 상관없는
하나님의 온전한 구원으로 인하여
꾸준하게 유지되는 하나님 나라의 영감,
평강... 이 영생토록 이어질 것임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일어나 머리를 들기 위해
나에게 필요한 의지와 힘이 있던가?
너무 힘든 자들에게
일어나 머리를 들라는 말씀이 과연 쉬운가?
그러나,
그래야함을 난 잘안다.
일어나 머리를 들으라는 말씀을 마음에 담고
오늘 하루 그러려는 생각만 함을 가지고도
주님은 기뻐하시고
그 기뻐하심을 성령으로 충만한 은혜로 체험 시켜 주시고
인도하여
나의 결국을 '영원한 구원'에 이르게 하실 것이다.
'회의'
혼란.
십자가 앞에 모든 상황을 ,
마음의 무거운 종말적 힘듦을 가만히 가져다 놓고
주님이 말씀으로 깨닫게 하실 것을 기대하면
자주
하나로 정리됨을 깨닫는다.
주님은 살아계신 분이시다.
그것을 기대하며 오늘 하루 또 지내리라.
적용
1. 내 어려움 , 모두 개인적 종말의 어려움이다.
그냥 십자가 앞에 가져와야 된다.
2. 회의... 그냥 인정한다.
싸울 필요없다.
주님 십자가 앞에 가져와 그 회의하는 생각마져 내려 놓는다.
그러면 주님이 해결하실 것이시다.
3.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자.
주님은 늘 살아계셔서 나를 인도하신다.
나의 이런 회의의 부족함을 인정하여 주신다.
그런 내 엉터리 심사를 깨닫게 하여 주시되 나를 기뻐하신다.
그것을 믿는다.
주님은 결코 그런 나를 버리지 않으신다.
오히려 사랑하신다.
4. 성경 세장 읽겠다.
5. 일어나 머리를 들으라 신다.
어렵더라도 주님이 그러라시니 그럴 것을 결심한다.
두려움 , 속상함, 외로움.......종말의 어려움이지만
주님이 일어나라.. 시니 일어난다.
머리 들라.. 시니 회의 버리고 머리든다.
말씀하시니 그럴 것이다.
6. 임하실 기쁨을 기대하자.
기도
참.. 생각이 많았습니다.
그래도 그리 빙빙은 아니었지만
잠잠하려는 영혼의 한 구석에서 수면을 뚤고 올라오는
물고기의 움직임으로 인한 파문처럼
날 누르는 회의가 있엇습니다.
오래된..
그래서 그럴 때 난.. 누르려 했습니다.
그 하나님의 뜻이 아닐 듯한
불신앙 같은 생각들을 부인하려고 했습니다.
요 며칠,
말씀 가운데
내 삶과 괴리된 듯한 내용으로
종말에 대하여 진행되실 때
종말이 나에게 주는
먼나라 이야기 같은,
차인표 님의 기도 같은 나와는 너무도 차원이 다른 ,. 큰 우주적 사건 말고
나에 맞는...
이 조그만 존재 마져 버리지 않으실
내 개인적 하나님 아버지가 주시는
긴밀한 메시지가 없으신 듯함이
아주 혼란 스러웠습니다.
그만큼 , 제가 가진 깊은 부분에 다가왔음을
전 인정하고 있음이 감사하지만
한편으로 이 불신앙 적인 나를 만나기가 두려웠습니다.
주님.
오늘 말씀이 깨달아 졌습니다.
그 회의에 맞닦드려 보니
오늘 '머리를 들라'
일어나라.. 시는 메시지가 뚜렷해집니다.
감사하나이다.
나를 동행하시고
날 안으시고 품으시는
내 백발까지 인도하실
그 하나님을 감사합니다.
믿습니다.
제 믿음 더욱 키우시고
저 .......더 감사하는 삶 살게 하시고
다시 일어나
머리를 들고
영생을 향해 나가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들어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신약 QT'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쁨의 선택(눅22:1-13) (0) | 2012.03.30 |
---|---|
말씀의 기둥(눅21:29-38) (0) | 2012.03.29 |
과부의 절절함을 보며(눅 20:41-21:4) (0) | 2012.03.26 |
강도와 성전 지기(눅19:45-20:8) (0) | 2012.03.22 |
하나님은 자연스러움을 원하신다(눅19:28-44) (0) | 2012.03.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