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절박함의 자연스러움[눅8:40-56] 본문
40 예수께서 돌아오시매 무리가 환영하니 이는 다 기다렸음이러라
예수님의 기적은 누구나 다 '환영'한다.
그리고 당연히 그 예수님을 기다린다.
41 이에 회당장인 야이로라 하는 사람이 와서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려 자기 집에 오시기를 간구하니
그러나 이처럼 '간~구'하는 자는 얼마나 될까?
난. 진정으로 간구하며 기다리는 자 일까?
세상이 마구 마구 변해가며 대 폭설, 홍수 , 가뭄, ...으로
아마겟돈의 전조 증상처럼 보이는데
난.. 얼마나 예수님을 기다리는 것일까?
그 분의 공중 재림을 얼마나 믿고 기다리고 환영하는 것일까?
무엇으로 그 분을 기다리나?
이들 군중처럼 '치료하시고', 이 어지러운 세상에서 '탈출'하고 싶은
단지 그런 마음은 아니던가?
그것 마져 얼마나 될까?
야이로의 간구는 있는가?
48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더라
혈루증 여인.
지금 시대처럼 '여성물품'이 제대로 갖추어진 시대에도
혈루증 ( 부정자궁출혈)로 한달 만이라도 고생하면 '우울'해질 소인이 되는데
이 시대... 얼마나 힘들었을까?
위의 귀찮고 번거로움을 떠나서 '빈혈'은 얼마나 심해졌을까?
그 여인이 저리 절박하게도
모든 사회적 제약, 개인적 심리적 위축, 현실적으로 군중을 뚫고 예수님 앞에 다가가는 물리적 제약도
그 분을 닿으면 어찌 될지 모르는 시대적 두려움 등........모든 제약을 뚫고
예수님을 만지는
저 절박함, 간절함, 그녀의 온전한 믿음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그녀는 병이 나았을 뿐 아니라
'구원과 평안'이라는
궁극적인 해결을 약속 받았다.
52 모든 사람이 아이를 위하여 울며 통곡하매 예수께서 이르시되 울지 말라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53 그들이 그 죽은 것을 아는 고로 비웃더라
보라.
야이로는 딸이 나았다.
그러나 환영하던 사람들은 '비웃었다'
그럴지 몰랐다.
56 그 부모가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경고하사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하시니라
늘.. 성경의 공관복음을 읽어가며 어색하게 느끼던 부분들..
어떤 때는(군대 마귀 떨어져 나간 광인처럼....) 알리길 원하시며
어떤 때는 오늘처럼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신다.
이 버거움.
자주 부딪치는 성경 속의 두가지 모습.
정말 죽은 아이가 밥을 먹고 돌아다니게 되는데
알리지 않는다고 누구도 모를까?
하나님의 때가 되지 않아서 그렇다는 추론은
아이가 증거로 버젓이 돌아다니는데 어찌 맞을까?
무엇인가?
위의 군중의 환영과 더 해지는 두 사람의 기적의 장면의 비교.. 에 그 답이 있지 않을까?
군중은 단지 구경하고 겉으로 드러나는 기적을 보는
무조건 축복, 무조건 '긍정'차원의 믿음이었다면
이들 두 상황의 남녀에게는 어떤 차이가 있던가?
그들은 절박함이 달랐다.
그들에게는 '아픔'이 있었다.
아픔을 포기하고 체념하는 게 아니고 '예수님이면 .. '이라는 절박한 '믿음'이 있었다.
그렇다.
그렇기에 아무리 그들이 세상에 대고
예수님이 하셨다.. 고 논리적 증거를 해대어도
그들은 또 잠시 맞아 들이는 재미있고 희한한 기적 쯤으로 치부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아시는 예수님 께서는
이처럼 이 말씀을 붙들고 고민하는 자들에게
' 절박한 믿음이 네게는 있는가?'
' 과연 아픔이나 힘듦이 절망 만일까?'
' 아픔이 단지 회복 뿐 아니라 예수님을 만나는 전제 조건임을 알고 기뻐하라'
.....라시는 것이 아니던가?
나.
잘 가고 있는가?
잘 모르겠다.
잘 가고 있는 것 같지만
주변을 돌아보면 아닌 것도 같다.
그래서 그 아닌 것을 더 절박함으로 몰고 가야 하는데
그냥 가만히 있다.
이게 절박함이 부족함인가?
아니면 믿음 후의 자연스러움인가?
구분이 잘 가지 않는다.
주님은 오늘 말씀에서 '절박함'을 더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 절박함의 전제가 ' 예수 그리스도' 임을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안계시다면 절박해 봤자 죽음이 더 가까운 몸부림일 뿐이지만
주님께서 계시니
더 절박함은 더 자유로움을 의미한다.
예수 님을 만나고 체험하고 믿음이 깊어지고
그 도구가 '고난'이다.
난.....어떤가?
난...어떤가?
주님.
말씀을 들어서
오늘 절박함에 대하여 깨닫게 됩니다
대상이 있는 절박함은 소망이지만
대상이 없는 절박함은 우울인줄 압니다.
그 대상이 되시는 예수님이시여.
제게는 절박함이 없는 듯 합니다.
평안해서 인지요?
절박한 후의 평안함인지요?
돌아보면 주변은 기도할 것이 많은데
그리 절박함은 부족한 듯 싶습니다.
주여.
아시는 바대로 전 약간은 그런 상태에 있습니다.
주님이 알아서 인도하시고 도우실 줄 믿습니다.
주여.
그 믿음 더욱 크게 하소서.
주여.
자연스러운 믿음을 허락하소서.
오직 주님이 계심으로 모든 것 가능함을 고백하나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받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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