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나도 그리되고 싶습니다[눅9:37-50] 본문

신약 QT

나도 그리되고 싶습니다[눅9:37-50]

주하인 2016. 2. 2. 07:01

아이.

오래전에 내원했던 조금 결손된 모친의 품에서 자라는 아가.

어떤 일에도 울지 않고 보채지 않는다는..

그래서 들여다 본 눈이

너무나 슬퍼서 허락 맞고 찍은 사진.

아가 사진을 고르다 이 앞에서 가슴이 멍해지며

다시 골라낸 사진.


아이는 천국을 기억하며

단절 되어가는 그 기억을 슬퍼하는 것 같다.

지금 다시 보니.

아기는 어찌 자랄까?


모든 하나님의 선물들을

잘 길러내야 할 텐데..

세상은 그들을

두발달린 짐승으로 (둘째 아들 표현^^;; ) 만들어 가니

어찌 하면 좋을까?



42.올 때에 귀신이 그를 거꾸러뜨리고 심한 경련을 일으키게 하는지라 예수께서 더러운 귀신을 꾸짖으시고

     아이를 낫게 하사 그 아버지에게 도로 주시니

 '올 때에' 라 하셨다.

하나님 앞에 나올 때 사단은 싫어한다.

하나님을 진정 기뻐하여 주님 앞으로 나오려 할 때 그들은 갖은 방해를 한다.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여 나올 때 그들은 슬퍼한다.

'올 때에'라셨다.

그때에 귀신이 크게 방해를 했다.

예수님 앞에 오는 것을 사단의 세력은 정말 무서워 한다.

매일 같이 주님 앞에 더 '올 때'를 기억하고 살아야 한다.

승리의 그때다.


48.그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가 큰 자니라

'이런 어린 아이'라 하셨다.

그 아이를 영접하라셨다.

그것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 하셨다.

하나님을 영접하는 길이라 셨다.

겸손하면 높여진다는 교훈 적인 이야기에서 멈추는 걸까?



49.요한이 여짜오되 주여 어떤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와 함께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귀신 쫓고 하나님의 기적을 나타내는 것보다 더 귀한 일인

'어린 아이를 영접하는 일' ..

그것이 단지 겸손을 노력하라는 교훈 뿐일까?


 난 그들처럼 되고 싶다.

그들의 그 선한 눈망울을 닮고 싶다

그들에게 마주치는 내 작은 관심을

그들은 여지 없이 받아

그 눈에 광채를 띄어가며 다시 내 가슴으로 돌려준다.

그럴 때 세상은 밝아지고 희어지고

어두움이 들어올 틈이 없다.

오직 그와 나만 있다.

그들의 선한 영혼,

그들의 관심을 받는 자의 천국의 달콤한 기억들이

내 가슴에 그대로 전달됨이 아니고 무엇인가?


아..

아이를 닮길 원한다.

사랑을 받는 아이.

관심을 받는 아이

그런 것을 알고 기뻐하는

그 순수한 천국의 기억을 같이 기뻐하고 싶다.



진료실을 드나들면서

앉아 있는 아이들.

어딘가에 몰두하고 있는 아이들을

가만히 쳐다봐주고 있으면

그를 발견한 아가들은

더 크고 반짝이는 눈으로

온 얼굴의 근육을 다 사용해서

날 기쁘게 맞아 준다.

아니.. 부끄러워하고 무서워 하는 듯해도

한 두발짝 걸어가다 뒤돌아보면

여지없이 거의 모두가

날 빨아들이듯 바라보고 있는 것을 본다.


그럴 때 아이를 앉고 있는 어머니나

그 주변을 쌓고 있는 아픔의 흔적들이나

그 어느 것도

아이와 나 사이엔 존재치를 않고 있다.


아이는 내 관심을 통하여

아마도 천국에서 보내기전의 그 원형을

기억해 내고 있을 지 모른다.

내 관심의 눈빛을

전혀 기억해 낼 수는 없지만

하나님께서 만들어주신 육체에 보내지기전

평화롭고 사랑 뿐이던

그 천국의 기억 잔재들이 남아

그들은 나를 그렇게 바라보고 있는 듯하다.


아이의 눈을 바라보고

아이의 웃는 얼굴을 바라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너그러워지고

나도 모르게 내 얼굴에 미소가 걸려 있음을 본다.

그리고는 돌아서 내 방으로 오고 나서도

한 동안 아이의 그 모습이 

기쁨으로 내 영혼을 흔들다 간다.


아주 잠시지만

난.. 착해진듯하다.

아이들 때문에..

나.. .

그리되고 싶다.

내 영혼 한점 흐드러짐 없는

천국의 백성 자격을

이땅에서

그들처럼 회복하여 가고 싶다.



 겸손.

그렇다 .

아이들은 겸손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그 순결한 아이.

사랑 받을 줄 아는 자들의 관심에 대한 반응을 보면서

과연 아기들이 보이는 그 품성에

겸손 , 낮아짐.. 단어만을 묘사하는 것은

코끼리의 뒷다리 만지는 격임을 알게 된다.

하나님의 영으로

그 분의 은혜의 체험의 시간들이 늘어나면서

그 기억들이 점차로 뚜렷이 남아져 가고

나... 어째서 말씀을 좇는 것을 의무를 넘어서

마치 마약을 끊지 못하는 (죄송하지만..더 이상의 이해하기 쉬운 표현을 알지 못하는 일천한 믿음이라서 ^^;;) 

은혜 중독자 처럼 되어 가고

그렇게 매사에 단 일초라도 아이와 같은 전적 의지, 전적인 신뢰와

그에 따르는 '은혜 체험자' , 철저한 '보호받는 자'로서의 든든함과 행복을 누리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게 되어야 한다.


과정에서 겸손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겸손은 그들이 가진,

아주 일부분의 덕목일 뿐이다.


나..

아이와 같이 되고 싶다.


감사합니다.

주여.

병원에 인터넷을 연결할 수 없어

컴을 가져가야 하는데

그러면 걸어갈 수 없어서

일찍 일어나 묵상을 완성했습니다.

아주 작은 결심이지만

아이 같은 천국의 기쁨의 흔적을 기억하는 자로서

그리하였습니다.

주님도 아시다시피

저는 리듬이 일정치를 않고

결심과 의지로 십여년 넘게 이리 묵상을 할 수 있는 자가 아닙니다.

오직 제 안에 하나님을 사모하는 자로서의

아이같은 마음이 회복된 증거라 생각합니다.

주여.

잊지 않고 살게 하소서.

주여.

홀로 뿐 아니고

타인, 가까운 자들에게 더 아이같은 베품을 품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신약 QT'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리&양[눅10:1-16]  (0) 2016.02.04
그 뒤[눅9:51-62]  (0) 2016.02.03
청빈함[눅9:1-9]  (0) 2016.01.29
절박함의 자연스러움[눅8:40-56]  (0) 2016.01.28
오직 내 바라는 큰 일[눅8:26-39]  (0) 2016.01.27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