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자유인(고전9:1-18) 본문
(고전9:1-18)
어리석음은
내
눈에 보이는 것만을
믿으려 하는
영혼의 흐름을 일컫는다
새는
눈 앞에
보이는 것만 믿으려한다
그 뒤에
저 넓은 호수가 있었음을
잠시 잊고 서 있다
주를 모르는 자들도
그와 다름없다
주의 은혜를
자주 잊는 자들도
마찬가지다
자유인이란
하나님의 그 놀라운 은혜를
절절히 사모하고
기억하려 몸부림치는 자들에게만 예약된
자격이고 이름일 뿐이다
1. 내가 자유인이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
자유.
자유인.
난..예수님 영접하고 나서
너에게 가장 중요한 변화가 무엇이냐.. 묻는다면
'자유' 라 서슴없이 말하겠고,
나의 가장 근본적인 '정체'를 이야기 하라면
묶였던 데서 풀려나고 있는
'자유인'이 되어가는 과정...이라 하고 싶다.
묶였다는 것은 어디인가?
세상의 것들이 아니던가?
세상의 권세잡은 자들, 사단..
그 사단에게 잡힌지도 모르고
오직 눈이 세상에만 고정이 되어 있어
이 세상의 성공과 물질과 세상 흐름에서 가장 앞서는 것 만이
인생의 목적인양 허덕이고
그 후의 영생이나 천국, 영적인 일에는
'코웃음'치게 만드는,
그래서 결국 우리가 가야할 본향에 가까워져가는 시기가 될 수록,
즉, 나이가 들수록
영혼의 옥죄임은 점점 더 심해져
어디인지 모를 갈망과 갈등 속에 몸부림치다가
결국 육신이 사라져
그 묶였던 영혼은 영벌에 들어가 버리는 것...
그것이야 말로
이 세상의 모든 불신의 영들이 가야할
'스토리' , 각본이 아니던가?
그러기에 그들 묶인 영혼들이 겪는
묶인 증상 들이
반대로 그들로 하여금 더욱 '자유'를 갈망하게 되나
그럴수록 더욱 갈증을 느끼게 될 뿐이다.
그러한 '절대의 외로움' ,
그들이 느끼던 안느끼던 그 사막의 황량함,
사망의 두려움을 잊기 위하여
그들은 서로 서로를 '탐하기 시작한다'
때로는 서로 '소통'이라는 이름으로
미화를 하기도 하고,
다른이들도.. 라는 명분으로 끝간데 없이 '도덕'조차 무너뜨려 간다.
그러함으로 그들은 잊고자...........한다.
그들은 '진리'이신 하나님,
예수님의 십자가 자체를 부인하기에
어찌할 수 없이 깊어져만 가는 고통 속에 몸부림치게 된다.
묶인 증상은 어떻게 나타나는가?
' 답답함 ' , '우울', '두려움', '힘듦.........의 모든 증상들이다.
성령의 열매와는 반대되는 증상들이다.
이 것을 세상에서 치유할 방법은 없는가?
감기나 다른 육신의 질병과 마찬가지다.
무엇이든 증상은 ' 진통제'나 '증상 완화제'를 써서 가라앉힐 수는 있다.
정신과적 치료도 마찬가지다.
약으로는 완화된다.
그러나, 근본 질환을 치료하지 않으면 반드시 재발내지 악화될 뿐이다.
나.......의사다.
그러기에 그러한 원리를 아주 쉽게 알 수 있다.
세상에는 '답'이 없다는 이야기다.
요즈음 '혜민'스님의 치유 집회가
그 분의 책이 세간에 화제다.
어제 TV에 그분의 치유 집회가 잠깐 나왔다.
하버드 대학 다니다가 스님이 되시고
다시 종교학 교수를 미국 모대학에서 하시는
스님으로는 유일한 교수이신
발군의 지혜를 가지신 분이신가 보다 .
책은 읽어 보지 않았지만
치유 쪽으로 좋은 내용이신가보다 .
그러나, 유사한 치유세미나는
벌써 내적 치유~~ 등의 이유로
대단한 열기가 한차례 '기독교 계'에서는 지나갔다.
세상에 '개독교'로 핍박 받기에 '매스컴'에 비추어지지 았았을 뿐............
한편, 그러한 지나갔음은 그들 내적 치유의 많은 부류들도,
어쩌면, 하나님이 우선되지 않으신
'세상의 것'과 , 심리치료와 절묘히 접목시킨 탓일 수 있다는 이야기다.
실제, 나 10여년 전에
그 부분에 대하여 이 블로그에서 많이 다루었다.
그래서 비교적 지금은 조용하다.
그게 믿지 않는 저 분들에게 이제야 비슷한 내용의 책의 전개가
이루어졌을 지 싶다.
아니라면.... 죄송하다.
하지만, 읽어보고싶은 욕구는 들지 않는다.
내적 치유나 산사의 심리치유나... 오십보 소백보..
영적 접근을 빌미로 한 심리적 접근...
인본주의에 빠질 위험성이 있을 개연성 탓이다.
그렇다면, 자유란 어떻게 얻어지는 것인가?
자유는 '영적' 심적 , 육적.. 전 분야의 통합적 치유를 이루는 것을 말하되
하나님의 그 무한하고 무궁무진한 우주의 에너지가
성령의 흐름을 통하여
우리 인간의 영혼에 내려옴으로 부터 시작이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
십자가의 구원을
깊이 체험하고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만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이야기다.
인간의 이 불완전함의 이유에 대하여
다시 처음부터 쓰고 싶지는 않다.
그때 부터,
매일 매일 '삶 속'에서
그 사람이 살아오면서 겪었고
성장환경 중에 가지게 될 수 밖에 없던 '상처'나 과거의 흔적으로 인한 영향과
무엇보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그 사람의 특질'
즉 , 달란트에 의하여 형성된
인격이
살아오는 시간 동안 '수도 없이 겪었을 '
선택이라는
귀한 '능동적 결심'의 결과가 이루어져
하나님이 허락하신 이 모든 귀한 '영적 키'가
그 인격의 성화 정도를 결정하게 되는 것이다 .
성화란 무엇인가?
인생의 사는 목적이란 '성화'라고
난 10여년 가까이 이 블로그를 운영하면서
예수님을 영접하고 지금까지 말씀 가운데 살아오면서
선언하고 스스로 명심하려고 애를 써 왔다.
그게 이 블로그의 정체성이다 .
세상에 내가 깨달은 '원리'.
하나님의 나에게 허락하신 '친밀하시고 귀한 '진리를
알아들을 귀를 가진
'선택받은 소수와 나누기 '위함이었다.
그 성화,
그 인생의 목적이 이루어져가면
점점 '자유롭게 '되어간다.
그 자유는
내가 가진 소유물이나
내가 가지지 못한 '결핍'이나
과거로 부터 올라오는 '질긴 영향'이나
그 어떤 거로 부터
흔들리지 않고 잔잔한 '평강'으로 유지가 됨을 말한다.
그것은 '샬롬'이고
그것은 '천국의 기본 심성'이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심령 천국'이고
그런 것을 세상에서 누리고 살아가는 자야 말로
'자유인이다'
그런 의미에서 난 자유를 경험하고 있는
자유인이 되어가고 있는 자다.
당당히 선언할 수 있다.
오늘 사도 바울님이 '자유인'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그 분은 가진 것 못가진 것에 의하여 흔들리지 않았다.
히브리인이었지만 로마인이기도 하였다.
가진 거 없었지만 가진게 너무 많기도 햇다
안질 환자였고 왜소한 대머리이기도 했다 .
비상한 머리를 가지고있는 자지만 가장 낮음에 처해도 '자유'를 누렸다.
자신의 부족함에 대하여 흔들리지 않았고
로마인으로 고개를 하늘 끝까지 들수 있었어도
가장 필요한 때 아니고는 신분을 밝히지도 않았다.
오늘 말씀 대로 '목회자'임에도
그는 '자비량'했어도
정말 고린도 교인들의 깨달음을 위해서만
자신의 처해진 상황에 대하여 '기쁨'으로 '힘있게 '말했을 뿐이다.
자유란.. 그런 것이다.
세상의 '비본질'에 의하여 흔들릴 일이 없는 것이다.
그는 '본질'이신 생명,
하나님의 그 우주적 에너지에 맣다아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본래 그렇지 않은 자였음은
그는 살인자 출신의 대머리 안질 환자 임은
우리가 잘안다.
그러나, 그의 놀라운 달란트와 더불어
예수 그리스도의 다메섹 도상에서 직접나타나사
3년에 걸친 대 영혼 변환을 거쳐
이처럼 '온전한 자유인'으로
완전 성화의 자유인이 된 것이다.
그는 '세상'을 살되 '천국'을 누리는 분이셨다.
그래서 그의 말씀은 이렇게 힘이 있다.
듣고 있기만 해도 가슴이 뜨거워진다.
그의 시대를 수천년 넘어서는 지혜는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에 그렇다.
그게 '자유'다.
그게 '자유인'의 모습이다.
그게 궁극의 우리의 나아가야 할 방향이다.
그게 '좁은 문'을 열고 나가서 만들어질 우리 선택받은 자들의 미래다.
오늘..
벌써 하루가 다 갔다.
어제 당직하고
월요일 아침을 바쁜 가운데 지내고 수술 두분하고 나니
또 벌써 이시간이다.
그렇듯, 그냥 그렇게 보내다 보면
또 일년이 지날 것이고
내 삶의 나머지 시간은 또 그렇게 갈 것이다.
그러나, 그래도 어찌할 도리가 없이 몸부림쳐야
내 인생은 그렇듯, 그렇듯 흘러가
거울을 보면
쪼그러져 가는 내 얼굴이
점점 속도가 가속화되어 가는 것을
두손들고 볼 수 밖에 없다.
이제
다시 주님 앞으로 마음을 정리하자.
세상의 비슷한 내 또래들을 향하여
그들은 어찌 하나,
그들에게 혹시 어떤 지헤가 있던가?
그들은 편한가?
그들과 있으면 ...........하고 눈돌리려 하지말자.
내 자유는
주님 안에 있다 .
어떠한 모습이라도
부르신 그대로
주님 안에서 주시는 자유를 기대하며
기다리자.
주님.
감사합니다.
어제와 다름없는
오늘 하루가 또 지나가려합니다.
그럼에도
다른 것을 조금은 압니다.
나........
시간은 어느때인지 몰라도
자유인이 될것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님의 당당한 선언과 그 흐르는 풍성한 여유가
자유라는 단어와 함께
시공을 격해 이천 몇년 뒤의 저에게 그대로 옵니다.
감사합니다.
주여.
내 속의 어지러운 것들...
주님 께 맡기고
다시 자유를 향해 항해해 나가는 제가 되기를 선택합니다.
내 하나님
그런 저에게 부디 지혜와 인내와
주님의 말씀 만을 선택하고
어떠한 이유에도 주님의 말씀의 이유가 가장 큰 ,
그런 매일의 선택을 하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도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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