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인내의 끝과 인내의 앞( 눅 21:5-19) 본문
제 21 장 ( Chapter 21, Luke )
어두컴컴한
이 세상에
징조로 보이실
주님이시여.
조각 구름 뜨는 것
보고도 비가 오는 것을 예측할 수 있으면서도
시대의 징조를 보고도
종말을 예상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한탄하신
우리 예수님이 생각 납니다.
5. 어떤 사람들이 성전을 가리켜 그 미석과 헌물로 꾸민 것을 말하매 예수께서 가라사대
6. 너희 보는 이것들이 날이 이르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
세상 사람은
미석과 꾸민 것을 보되
주님은
그 후를 보길 원하신다.
9. 난리와 소란의 소문을 들을 때에 두려워 말라 이 일이 먼저 있어야 하되 끝은 곧 되지 아니하니라
13. 이 일이 도리어 너희에게 증거가 되리라
세상 사람들은
두려움을 보되
주님은
증거로 보길 권하신다.
14. 그러므로 너희는 변명할 것을 미리 연구치 않기로 결심하라
15. 내가 너희의 모든 대적이 능히 대항하거나 변박할 수 없는 구재와 지혜를 너희에게 주리라
세상 사람들은
이 말세의 삶에 적응하기 위해
많은 변명과 처세의 노력을 필요로 하지만
주님은
지혜와 구재(words)를 주신다 한다.
즉 , 알아서 처세할 능력을 주신다 한다.
16. 심지어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벗이 너희를 넘겨주어 너희 중에 몇을 죽이게 하겠고
17.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18. 너희 머리털 하나도 상치 아니하리라
그날이 오면
세상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를 미워하고
지옥도의 형국을 만들어 가며 살겠고
믿는 우리에게는 더한 핍박으로 작용하겠지만
주님은
우리의 안전을 확인하신다.
19.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
세상 사람들은
종말에 대하여서 알지도 못하기에
그리할 필요가 없지만
주님은
우리에게는
인내하라고 하신다.
영혼을 얻는 다고 하신다.
한번 받은 구원인데
종말의 힘듦은
우리에게 왜 필요한가?
징조를 볼 눈은 왜 필요하고
성령으로 인하여
말하고 지혜를 가질 일은
또 왜 필요한가?
십자가 통해 누구나 받는 구원인데
인내는 왜 필요할 까?
기독교는 의문 투성이인 종교이기도 하다.
체험을 하지 않고
말씀을 멀리 떠나 있으면
어이없는 것으로 보일 수 밖에 없다.
오늘 세상 사람들 처럼
아무런 상관 없이
지들끼리
열심히 치고 받고
세상의 성공을 위해
무한정 치달으며
더 잘 살기 위해
무한 경쟁에 돌입하며
인륜과 情은
필요에 따라 접어 놓고 살다가
때가 되어
예수님 지상재림 하시기
바로 직전에
공중 강림하실 때
누구나 휴거되어
지상에서 벌어놓고 만들어 놓은
재물과 명예와 학벌과 인맥과 연인과 ...
모든 것을
그냥 휴거되며
달각 천국으로 가져가면 된다고 생각하는
현대의 다수의 교인들에게
오늘
묵상구절은
늘
논리적 허구에 차있는 것이다.
기독교는 기쁨이 당연하다.
그러나, 그 기쁨은 축복에 의한 것만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그들에게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한계이다.
그래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은
그냥 묻어 두면 된다.
어린 아이들은
달콤한 것 이외의 쓴것이
몸에 좋다는 사실은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그래서
그냥 피해버린다.
그러다가
이빨이 썩고 몸은 비대해져
생활 습관병 - 과거엔 성인병이라 했다 . 아이들이 당뇨, 고혈압 생기기 전에는..-이
생겨 버리고 종국에는 '사망'까지도 가게 된다.
아침에
무서운 얘기를 하신다.
아직도
종말이라면
시한부 종말론을 생각하게 되고
이단을 생각할 수 밖에 없이
강팍한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들로 인하여
더더욱 '종말'이라는 이야기만 나와도
몸을 옴츠리게 되어 있다.
하지만
일점일획도 바뀔 수 없고
성령의 감동으로 씌어진 것이
성경임을 믿는 다면
당연히
계시록이나
종말 등에 대하여
믿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믿지 못하는 것은
어찌 보면
쓸데없는 두려움이나
지혜없음
삶에 대한 고정된 욕심
상기한 추정같이 어린아이의 심성에 머물고자 하는 미성숙함이
그 원인이 아닌가 한다.
그렇다면
두렵지도 않고
견딜 수도 있고
다 알아서 해주시는
주님 origin의
인내라는 문제가 남아 있다.
왜
인내해야 하는가?
무엇을 보고
인내해야 하는가?
종말은
주님의 세상에 대한
엄청난 사랑과 인내와 공의에 대하여
너무도 빗나가기에
심판하시는 것이고
그 심판의 과정에
비록 기독교인 일지라도
주님의 뜻에 합당치 못하게 살아왔던
어두운 부분들이 정화되고 깨끗해 지기 위한
목적일 수도 있다.
이런 것.
자식들이 타락하니
기다리시다 기다리시다
회초리를 드시는 개념.
하지만 때리시는 순간에 힘을 뺄 수 밖에 없는
父情 !
그러면서,. " 얘야, 이래도, 얘야, 어서... "하는 개념이다.
그러하신 주님의 깊은 마음을 알기 위해
우리는
그 분의 뜻을
받아 들일 수 밖에 없다.
그 분이 우리의 아버지이시고
그 아버지의 품안은
답답한 듯하나
따스하고
힘든 듯 하고 안온함을 알아야 한다.
종말은
힘듦이지만
우리 기독교인에게는
그 이후의 약속이 있다.
천국이다.
천년 왕국이다.
사자 들이 양같고
독사 굴에 손을 넣어도 깨물리지 않는다.
세상은 마구 마구 돌아간다.
작년 만해도
디플레이션 얘기는
아주 아주 간간히 나왔다.
기후 변동은 얘기했어도
곡물 전쟁, 식량 난에 대한 이야기는
뜬 구름 처럼 느껴졌다.
기름이 30달러를 넘어섰다고
경악을 하던 게 바로 1년 전 갓 넘었다.
지금은 100달라를 후떡 넘어섰다.
동남아에 눈이 왔다.
우리 나라는 아열대 기후로 바뀌고 있다.
미국에는 허리케인 , 홍수, 총 난사, 비행기 참사, 경제 대공황 징조.........
중국은 대홍수, 대 가뭄,
호주는 가뭄이 심하다.
서 태평양의 작은 섬은 침몰해 간다.
북극의 얼음이 녹아간다.
..................
징조가 곳곳에서 보이는데도
우리는
커다란 차에
큰 집,
아직도 부동산 대박의 꿈이
온전히 식어 들어가고 있지는 않다.
두려웁지만
두려움을 잊기 위해
전 세계인이
몸부림 치는 꼴 같다.
오늘
주님이 말씀하신다.
세상 사람들은 눈 앞의 것 만 보되
너는 '종말' 이후의 '7년 대 환란'을 보라.
그 들은
그 대환란의 두려움으로 끝간데 없이 행동할 것이로되
너는 징조로 보라.
그리고
그들은 그 두려움으로
사재기 , 편법 등 온갖 노력을 기울이지 않을 것이로되
너는 가만히 주님 만을 보라.
성령 인도하실 것을
기쁨으로 기다리라...시는 것 만 같다.
인내는 영혼을 산다고 한다.
인내의 끝에
천국의 삶이 기다리고 있음을 모르면
막연한 인내는 한계가 있다.
인내의 뒤에는
주님 성령님의 도우심이 있을 것을 알면
얼마든지 인내할 수 있다.
주님의 궁극적인
우리에 대한 기대는
'영혼'이다.
이 땅의 육신의 모습과
이 땅에서의 벌어 들이거나
만들어 놓은 업적이
그 분의 관심이 아니다.
우리의 이 땅에서의 시간이 다 되어
우리가 우리의 육신의 장막을 벗어날 때
이 땅에서의 삶의 방편을 매개로 하여
얼마나 주님께 순종하여 삶으로
영적인 성장을 이루었는가가
그 분의 유일한 관심이실 뿐이다.
대통령?
선교사?
목사?
의사?
찬양사역자?
거지?
농부?
.........
영혼이 얼마나 그 모습에서 성장하였는가
성화되었는 가만이 그 분에게 중요할 뿐이다.
종말은
기독교인에게는
마지막 제련의 기회일 뿐이다.
부디
눈을 들어
주님을 보고
주님을 놓치지 않고
주위에서 벌어지는 어떠한 일에도
그게 주님의 뜻이었음을 인식하고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삶으로써
일상에서
일상으로
주님께 영광을 드리는
그러한 하루하루가 되기를 소원한다.
특별히
종말의 징후가 크게 보이는 이때에
주님의 말씀을 크게 받아 들여
우리에게 부여될 수 밖에 없는
그 큰 환란을
주님으로 인하여
경감될 수 있도록
가만히 세상 사람들의 움직임과는 다르게
조심스러운 행보를 할 때다.
인내할 때다.
영혼에 깊은 관심을 가질 때다.
천국을 사모할 때다.
적용
1. 천국을 묵상한다.
2. 마음을 낮추고 소유를 가능하면 버리려 노력한다.
3. 식욕을 절제해 보겠다.
양을 줄이는 연습을 먼저한다.
4. 성경 여섯 장 읽겠다.
성경은 목숨이다.
5. 인내한다.
가급적 덜 말하고
가급적 눈 빛을 가라앉히고
가급적 생각을 절제한다.
6. 점심에 있을 '성경공부'에 지혜 주실 것을 기도한다.
기도
주여
감사합니다.
종말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 대하여
말씀 주심을 감사합니다.
두렵고 떨리고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라서
피해 가고 싶지만
피해갈 수 만은 없는
주님의 살아계신 말씀이기에
순종하여 묵상하였습니다.
은혜로 함께 해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실은
가진 소유를 버려야 한다는 부담이 큽니다.
낮아진 마음으로
기뻐해야 한다는
감정적 곤란도 겪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은 준행하려 선택하는 순간
놀라운 은혜로 응답을 해주심을
잘 체험해 왔기에
주님 말씀을 준행하려 합니다.
시작으로
말을 줄이려 합니다.
식사를 줄이려 합니다.
주님
오늘 하루 만이라도
주님 뜻 가운데서
주님의 말을 준행할 때에
은혜로 함께 하소서.
특별히 점심 시간에 있을
간호사들과의 성경 공부에
함께 하시고
준비하지 않고 하니
인도하소서..
종말의 그때에
구재(口材)와 지헤를 주신다 하셨듯이
지금도 그리하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감사하며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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