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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 파멸의 아픔을 딛고(창32:21-32)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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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 파멸의 아픔을 딛고(창32:21-32)

주하인 2007. 5. 18. 09:16

제 32 장 ( Chapter 32, Genesis )



23.  그들을 인도하여 시내를 건네며 그 소유도 건네고
 
24.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야곱이 혼란 스럽다.

 

 밤을 새야 하는 데 '홀로 남았다."

식구들을 다 건네고

소유까지도 모두 건넸다.

건네 보냈다. 

그리고 혼자 남았다.

 그의 혼란을 잘 알 수 있는 행동거지이다.

남들의 조언을 받고

남들에게 의지해서 그들의 coach -요새 코칭이 유행이다-를 받았으면 좋을 것을... 

 -물론 코칭이 나쁘다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주님은 실은 모든 합리적 방법을 동원하고 시간을 때우기보다는

  진실한 마음으로 주님을 대하기를 바라시는 것이시다.

  야곱도 있는 방법을 다 쓰다가 마지막에 주님을 맞게 되었다. 

 

 혼란이 극에 달하거나

혼란의 와중에 어떤 번쩍이는 느낌으로

주위 사람들을 물리치고 혼자 남아 있고 싶을 때가 있다.

바로 야곱이 그런 상태가 아닌가 싶다.

그는 혼란 스럽기 그지 없다.

그래서 후자의 이유로 자신도 모르게 홀로 있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그는

"소유 마져 건넨 것" 일 수가 있다.

 

 가진 것이 많으면 생각이 많다.

생각이 많으면 본질에 접근할 수 없다 .

見物生心

그러기 위해 건넨 것일 수가 있다.

비록 그게 의도적은 아닐지 몰라도.

아니면 그는 자신의 절박한 처지가 마치 돌아오지 못할 다리를 건널 비장한 느낌에서 정리 차원으로 식구와 가진 모든 것을 다 하나하나 배웅하고 마중한 다음에 홀로 있은 것일 수도 있다.

어찌되었던 간에 그의 정리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한 의도적 행위이던

아니면 결과적 차원에서 그 분과 씨름을 하게 되었던 간에 그는 하나님을 만났다.

 

 주님을 만나기 위한 전제 조건은 모든 것을 마중하여 건네 버리고서 가능하다.

세상적인 노력을 잠시 뒤로 미루어야 한다.

분주함은 마귀의 장난이 아니라 마귀 그 자체라는 어떤 유명하신 분의 얘기가 있다.

그것과 통하는 이야기이다.

그는 분주한 주위 모든 것을 벗어 던지고서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그런데 궁금증이 남는다.

우선 야곱은 그 사람이 올 것을 알고 기다린 것인가?

갑자기 문맥이 이어지지를 않고 뜬구름 잡는 듯 갑자기 씨름 얘기가 나온 것이 희한하다.

글로서의 결핍된 구조.

이게 성경이 문학과 다른 점이고 여기에 어떤 말씀하시고자 하는 내용이 숨어 있을 듯 싶다.

 일단 주님 앞에서 현실적인 문제를 가지고 씨름을 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 상징적 상황이 현실화되어 보이는...

은혜가 퍼부어지고 은사가 열리면 환상이 보이는 것처럼...

그러다가 문제가 해결되어 있는.

 

 또 씨름을 하게 되었다면 어떻게 시작이 되게 되었을까?

사람이 하나 퍼뜩 나타나서 쭈구려 앉아서 넋을 놓고 있는 야곱에게 어찌 청했을까?

야곱은 분명코 주님이 나타나서 씨름청할 것은 생각도 하지 못할 상황인데...

제코가 석자인 사람이 어찌 ..

또한 씨름이라는 행위가 그 당시에 존재하던 문화적 행사였을까?

그 사람은 어찌 생겼을까?

코가 넓고 뒤로 들렸을까?

신비롭고 잘생겼을까?

얼굴에 운무가 낀 듯 흐릿해서 아무리 보아도 잘 보이지 않는 상태는 아니었을까?

그 사람이 손내밀 때 자신도 모르게 끌려가서 손잡고 벌떡 일어서게 되는 상황이었을까?

허리 샅바는 어찌 잡았을까?

궁금증이 한두가지는 아니지만

여러 의문에도 불구하고 온통 두려움으로 온몸이 마비되는 것 같이 몸에 힘이 하나도 없을 그의 상황에 씨름에 갑자기 응하게 된 것은 자신도 모르는 신비적인 상황에 엮여서 였음이 분명하다.

 그러한 가정은 이런 경험에서 그렇다.

 성질이 지독히도 급한 난 성질 부리고 머리 속이 윙윙 도는 상태에서 어쩔 수 없이 교회에 끌려가면서 - 이게 은혜다.   그래도 교회는 갔다.   수 금 일요일 - 도저히 앉아서 씩씩대고 좌절하느라 기도할 수도 없을 상태 - 기도?  기도는 나같은 자에게는 위선이라고 생각될 정도라고 생각되었다.- 에도 억지로 눈감고 주님 이름 만 부르면 이해할 수 없을 만큼 큰 은혜로 날 다잡아 주시는 경험을 많이 하고, 결국은 내 감정과 환경을 주도하는 것은 내가 아니고 주님이시었음을 인정하게 된 어느 날 부터는 아예 기도하러 자연스럽게 나가게 되었다.

성질 부렸어도..

 

 아마도 이랬을 것이다.

야곱은 홀로 남아 깊은 시름에 잠기는 데

갑자기 사람이 나와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를 껴안고 씨름을 하고 있게 되었을 것이다.

 이건  당연히도 성령 충만하면 성질 부린 거 잊어 먹고 눈물 흘리게 되고 그때는 자신도 모르게 황홀경에 취해 하나님 하나님 하면서 순한 양이 되는 등 본성 마져 잊어버리고 마치 내가 '착한 양'인 것처럼 두손 들고 찬양을 목청이 찢어져라 하는 어이없는 - 증~말 창피하게도 불신자 시절에 이걸 내가 봤다면 미쳤다고 했을 것이다.ㅎㅎ - 태도를 취하면서 기도를 하는 그것과 비슷할 것이다.

난 그런 기도 당시는 화났던 걸 깡그리 잊어 먹고, 정말로, 자연스러운 기쁨의 마음으로 눈물 콧물 흘리곤 했고 지금도 가끔 그런다.

 이게 야곱이 그 곤혹스러운 씨름을 당연하듯이 하고 있는 감정의 배경일 것이라고 감히 추정한다.

그것 밖에 이 어이 없는 '창세기'의 글을 이해할 방법이 없다.

또 그 어이없음이 실은 숨어 있는 하나님의 비밀인 것이라 감히 생각한다.

숨어 있다가 살아 있듯이

인생의 경험을 통하여

그 경험 속에 숨어서 세미하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얼굴을

이 유사한 성경의 비어있는 구절 속에서 발견하게 하는 원리. !!!

 

 이제 알 수 있는 것이 있다.

 세상의 일상의 삶 살면서 우리가 우리의 주인인 줄 알고 살지만 실은 우리 일상 조차 주님의 허락이 없으면 하나도 이루어 질 것이 없음을 간접적이나마 눈치채게 될 것이다.

단지, 주님은 우리의 간절한 간구와

위급한 상황에서만

아니면 주님을 전적으로 씨름할 결단이 있을 때나 가능하다.

 

모든 것은 주님의 뜻에 달려 있음을 철저히 인식하고

모든 것을 내려 놓고

주님께 온전히 맡길 마음이 있을 때야 가능하다.

그리고 그 문제에 처절히 매달려 씨름을 할 마음의 절박함이 있어야 가능하다.

시험과 환란과 문제에 의한 고통을 벗어나기 위한 헛된 감정적 노력이 아니다.

주님 앞에 내려 놓으려는 씨름이다.

헛된 잡생각이 가로막고 있는 것을 제치고 주님 십자가 보혈과 성령의 인도하심에 맡길 의지적 씨름을 해야한다.

방해하는 사단의 세력을 주님의 싸움에 맡기려는 의지만 발휘하는 씨름이다.

 

 

 

 

 

 

 

25.  그 사람이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야곱의 환도뼈(NIV: socket of Jacob's hip 야곱의

      고관절) 치매 야곱의 환도뼈가 그 사람과 씨름할 때 에 위골(접찔림, 삠)되었더라  

 

 궁금한 것 또 몇가지.

 

 그 사람은 누구일까?

천사일까?

야곱을 어찌 이기지 못했을까?

위급한 상황에서 초인적 힘이 나는 인간의 속성 상 발등에 불떨어진 야곱의 상황 때문이었을 것이기도 하지만

또한 이처럼 처절히 주님을 의지하여야만 하는 우리 믿는 자들의 믿음의 강도에 대하여 강조하기 위함은 또 아니셨을까?

 

 정말 씨름을 하면서 '반칙'하려 할 때 순간적으로 주먹으로 탁치면 닿을 부위가 환도 뼈, 즉 고관절, 대퇴골이 엉덩이 뼈와 맞닫는 그 부위이긴 한 것으로 보아 창세기의 이 구절이 엉터리 같은 소설의 작위적 내용은 아님이 슬그머니 이해가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야곱의 환도 뼈는 왜 쳤을까?

안 다리 걸어 넘기거나

바깥다리 후리기도 괜찮을 것을 왜 환도뼈일까?

오른 손으로 쳐서 왼 환도뼈를 탈골(위골)시켰을까?

반대일까?

칠 때 아팠을까?  안아팠을까?

그 순간 넘어지는 야곱의 슬로모션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해부학적으로 뚝' 소리가 나며 갑자기 뒷쪽으로 허리가 꺽이면서 힘없이 무릎이 꿇어졌을 것이고 그 위로 천사가 야곱의 몸을 누르게 되어 아마도 한쪽 무릎이 꺽이고 반대편은 길게 뻗어지며 뒤로 누운 묘한 자세가 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슬관절-무릎관절-역시 많이 당겼을 텐데,

아니면 무릎의 십자 인대가 끊어졌을 텐데 그것에 대한 얘기가 없는 것으로 보아 이것도 또한 기적이다. ㅎㅎ

 해여튼 그리고 나서는 어떤 자세로 일어나게 되었을까?

일어날 때 야곱은 엉덩이가 뜨끔하지는 않았을까?

아무렇지 않았다면 그것은 왜일까?

아무렇지 않다는 추정은 진행되는 내용에 자신의 환도뼈 절은 것에 대하여 고통스러워 하거나 이상스레이 생각한 구절이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들어 그리 추정하는 것이다.

역시 이 조차 신비한 것이 아닐 수 없다.

( 우주는 늘 파괴와 생성을 되풀이 한다. )

 

그렇다면 거기에는 영적(靈的)의미가 있지 않을까?

혹시 성장한 믿음으로 되기 위해서는 세상을 내려놓고 세상것을 건네고 홀로 차분히 주님을 만날 뿐 아니라 어떠한 아픔 - 위대한 성자들 중에 가족을 버리고 수도생활 들어간 분들이 있는데 그런 아픔은 아닌지.. -을 의미하는 것은 혹 아닐까?

 아니면 속에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을

깊은 자기 연민의 새디즘 적인 고통을 내려놓는 그런 아픔은 혹 아닐까?

상처입은 자로서 그것은 자기 생각에는 세상 삶의 의미가 없어지는

전 인생을 지배해오는 삶의 패턴을 찢고 나오는 아픔,

즉, 우주 파멸의 아픔을 겪어야 하는 것이기에 그런 환도 뼈의 탈골 되는 아픔에 비유한 것은 혹시 아닐까?

이것이 과연 지나친 논리의 비약은  혹 아닐까?

그러나, 최소한 난 그 아픔을 아는 사람이다.

분노가 많았던 사람이다.

지금도 꽤 있다.

연민도..

그 안에 들어 있는 마음 -용서못해 ! -라는 사단적 생각을 떨치고 용서하기에는 마음이 찢어지는 고통이었다.

아니 ,

처음에 예수님 믿고 의미있는 그들을 용서하라는 말씀에는 강력한 저항이 마음 속에 일어났다.

솔직히 이런 용서 못하는 쾌감 - 그것은 솔직히 사단적 쾌감이다. !!!!-은 삶을 지금까지 유지시키는 원동력처럼 날 속여왔다.

비록 그 삶이 고혈압과 심장의 두근거림, 발한 등 부작용을 가져왔어도...

 

그러다가

하나님이 내 위에 넘어지시면서  

난 모종의 결단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눌려서 넘어져 허덕이고

� 쪽이 아파도

가슴이 헐떡거리는 찢어지는 아픔처럼

옛 사람의 성질이 붙들고 늘어지며

그 오래된 구습을 벗어버리는 아픔이 힘들어도

날 부인하고

주님을 인정하고

내 영혼 위에 누워 계신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은혜, 주 예수님의 그 사랑을 받아 들여야만 했다.

아직은 비록 내 모습이

야곱의 절룩거리는 것 처럼

스스로 받아 들이기 어렵고

전인치유의 무대에 서서 찬양하는 내 모습이

아직은 더러분 성질로 인해 자격이 있을까..한번 씩 스스로 웃기기는 해도

이제 곧

야곱이 그 모든 것을 감수하며

주님의 말씀을 죽음으로 결사각오 매달린 것처럼

조금 더

조금 만 더

그 분의 은혜와 사랑을 간구하고 기다리면

야곱이 그랬듯

술수는 그의 성정에서 사라지고

마치 없는 듯 있는 듯

존재감을 드러내며

자식들의 그 연단과정을 은혜 가운데 지켜본 것 처럼

나도 내 자식들에 대하여

내가 펼쳐 놓은 인생의 씨앗에 대하여

조금 있으면 하나하나 이루어 가고

어긋난 내 모습을 받아들일 기회가 있게 될 것이다.

 

곧 ~

 

 

적용

 

1.  모든 것 내려 놓고 혼자 있을 시간을 가진다.

     교회에서 늦게까지 기도하겠다.

 

2. J 전도사님을 받아들인다.

   마음 속으로 내려놓는다.

 

3.  날 사랑한다.

   아직은 절뚝거리는 내 모습이 생경하다.

   그러나, 주님이 주신 약한 내 모습을 그냥 인정하리라.

   내 하는 모든 일을 사랑하리라.

   인정하리라.

 

4. 야곱이 그런 것처럼 내 식구들을 위하여,

   내 주변을 위하여 최선을 다해 건네겠다.

 

5. 성경 5장 읽겠다.

   주님의 말씀을 놓치지 않겠다.

 

 

기도

 

주님

유명한 환도뼈 얘기입니다.

그 얘기에서 주님은 또 다른 말씀을 허락하십니다.

아직도 완전히 절뚝거림을 부끄러워 하고 있는 내 마음 가짐에 대하여 돌아볼 기회를 허락하십니다.

주님

새로운 삶

새로운 사람이 되기 위하여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에 대하여 말씀하고 계십니다.

세상의 거추장스러운 허물

헛된 욕심

용서치 못하는 마음 등을 다 내려 놓고

온전히 주님을 만나 뵙기를 촉구하고 계십니다.

그 비록

혼자 있는 아픔과 두려움을 느끼겠지만

그 과정을 통하여

환도뼈가 위골 되는 아픔을 느낄 수 있겠지만

주여

저에게 바라시는 것이

조금은 더 성숙하기를 바라시는 것 같습니다.

주여

감사합니다.

주여

힘을 주소서

그 마저도우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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